"손 벌리지 않을게" 스물다섯 딸 일터, 폭탄 공장이었다
6월 24일 오전 10시 30분. 작은 배터리에서 난 연기가 42초 만에 공장을 가득 메웠다. 그 짧은 시간 동안 23명의 소중한 삶이 사라졌다. <오마이뉴스>는 숫자 '23명'이 아닌 그들 한 명, 한 명의 삶을 전한다. <편집자말>
[김성욱 기자]
▲ 아리셀 참사로 사망한 고 엄정정(25)씨의 어머니 이순희(54)씨가 딸과 함께 찍었던 사진을 보여주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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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에겐 중국에 놓고 온 1999년생 딸이 있었다. '깨끗하고 평안하다'는 뜻의 이름 '정정'은 할아버지가 지었다. 딸은 방학 때마다 한국에 와 엄마 아빠를 보고 돌아갔다. 자주 만나진 못하지만, 딸이 매해 학급 대표로 칠판 판서를 도맡는다는 말에 부부는 시름을 덜곤 했다. 입버릇처럼 "내 걱정 말라"던 딸은 초등학교 교사가 될 수 있는 사범대에 진학했다.
엄씨 부부도 차츰 한국에서 자리를 잡아갔다. 둘이 모은 돈으로 2015년 경기도 시흥시 정왕동에 중국음식점을 차렸다. 첫째 딸 정정과 열한 살 터울의 둘째 딸도 낳았다. 투룸 빌라 집도 얻었다. 이대로면 두 딸 결혼 때까진 충분할 것 같았다. 그러다 2020년 코로나가 터졌다. 방학 때면 한국에 건너왔던 첫째 딸을 2년간 볼 수 없었다. 식당은 2022년 결국 폐업했다. 이씨는 다시 보험회사에 취직했고, 엄씨는 공사장으로 돌아갔다.
코로나가 끝난 뒤에야 마주한 첫째 딸은 부쩍 가족들과 떨어지길 싫어했다. 어느덧 성인이 된 딸은 방학 때 한국에 잠깐 머무는 동안에도 부부의 집에서 가까운 시화 공단에서 일용직으로 공장을 다니면서 생활비를 충당했다. 올해 초 대학을 졸업한 딸은 이제 자기도 엄마, 아빠, 동생과 함께 살고 싶다고 했다. 딸은 중국 생활을 접고 지난 3월 말 한국에 왔다. 투룸이라 중학생 동생과 한방을 써야 했는데, 불편해서 8월에는 가족 모두 시흥의 방 세 칸짜리 아파트로 이사하기로 했다. 첫째 딸까지 한국에 정착하기로 하면서 엄마와 아빠는 영주권 신청을 했다.
딸은 한국에서 네일아트 자격증을 따겠다고 했다. 필기시험을 봐야 해 한글 공부를 시작했다. 딸은 자격증 시험을 준비하면서도 손 벌리지 않겠다며 집에서 수공예품을 만들어 팔았다. 그러다 아는 언니로부터 '공장인데 앉아서 일할 수 있는 곳이 있다'는 소리를 들었다. 경기도 화성시 아리셀 공장이었다.
▲ 아리셀 참사로 사망한 고 엄정정(25)씨의 어린시절 사진. 엄씨의 어머니 이순희(54)씨가 핸드폰에서 찾아서 보여주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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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은 지난 4월 말부터 아리셀로 출근했다. 중국동포들이 많이 모여 사는 시흥 정왕동 집에서 아리셀까지 오가는 통근버스가 있었다. 딸은 "일이 많은 날이면 버스에 30명까지도 탄다"고 했다. 딸은 아침 7시 40분이면 집에서 나가 저녁 7시면 돌아왔다. 일주일 중 일요일 하루만 쉬었고, 잔업이 있는 화요일과 목요일 이틀은 밤 9시 30분쯤 집에 왔다. 일용직이라 5월까지는 주급으로 임금을 받다가, 6월부터는 월급으로 받는다고 했다.
딸은 매일 퇴근해 통근버스에 앉으면 곧장 엄마에게 카톡부터 했다. "배고파요. 오늘은 뭘 먹어요?", "집에 감자채 다 먹었으면 내가 시킬게요", "나는 치킨마요덮밥 시킬 건데 뭐 먹을래요?", "먹을 거 없으면 내가 채소 사갈게요". 오후 6시를 넘기면 어김없이 날아오는 딸의 카톡들이었다. 보험일로 서울을 오가는 엄마와 안양의 아파트 건설현장에서 일하는 아빠도 비슷한 시각 퇴근했기 때문에 딸은 가족들의 저녁 식사를 챙겼다.
▲ 아리셀 참사로 사망한 고 엄정정(25)씨의 어머니 이순희(54)씨가 지난 24일 경기도 화성시에서 <오마이뉴스>와 만나 인터뷰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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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이 도착할 시각인 저녁 7시까지 기다렸지만 딸은 귀가하지 않았다. 엄씨는 왠지 느낌이 안 좋았다고 했다. "사람이라는 게 예감이 있는지, 기분이 별로였어. 그날 이상하게 자동차 바퀴도 문제가 생겨서 4개를 다 바꿨는데." 부부는 곧바로 인근 경찰서로 뛰어갔다.
엄씨 : "딸이 연락이 안 되니까 핸드폰 위치 추적 좀 해달라고. 금방 되더라고. 근데 위치 추적은 됐는데, 위치는 안 알려준대. 이게 말이 돼요? 조선족이라고 무시하는 거 아니고 뭐예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부모가 울고부는데."
엄씨 부부는 끝내 경찰로부터 딸의 위치를 듣지 못했다. 부부는 무작정 화성으로 차를 몰았다. 가는 동안 뉴스에 나온 아리셀 공장의 주소를 검색해 내비게이션에 입력했다.
이순희씨 : "제발 아니길 빌었어요. 그럴 리 없다고…"
부부는 저녁 8시 반을 넘겨 아리셀 공장 앞에 도착했다. 건물은 다 타버린 채였고 수많은 소방차와 경찰, 회사 직원, 공무원, 기자들이 뒤엉켜 정신이 없었다. 그들 중 '내 딸이 있는지만 확인해달라'는 말에 대답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우여곡절 끝에 통제를 뚫고 공장 안으로 들어간 부부의 눈에 상황판이 보였다. 수습된 고인들의 명단이었다.
엄씨 : "엄정정(25). 위에서 딱 열한 번째. 우리 애 이름이더라고."
▲ 아리셀 참사로 사망한 고 엄정정(25)씨의 아버지 엄(56)씨가 아리셀 측 변호사가 보낸 문자를 보이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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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4일 경기 화성시에서 만난 이씨는 딸의 이야기를 시작하자마자 눈물을 참지 못했다. 엄씨는 대화 도중 자주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엄씨 : "이런 인터뷰해서 뭐해? 난 다 필요 없어. 고조 그 아리셀이라는 개XX들 다 때려죽이고 싶어. 뭘 만나야 싸움이라도 하지, 계속 발뺌할 궁리나 하고 우릴 피하잖아. 변호사라는 XX나 내세워서 카톡으로만 재잘거리지, 얼굴 한 번 안 비치잖아. 우리 딸 스물다섯이에요. 이런 사람들 그렇게나 많이 죽여놓고, 나 몰라라? 무릎 꿇고 사과해도 모자랄 판에 카톡으로만 띡띡 '합의하면 5000만 원 더 주네, 길림성 임금으로 따지면 일급이 얼마네'. 이게 인간이에요? 인간에서 많이 벗어났어. 욕밖에 안 나와요. 열이 나요, 안 나요? 억울해요, 안 억울해요?"
핸드폰을 쥔 엄씨의 손이 심하게 떨렸다. 부부는 참사 한 달이 지난 지금까지 아리셀로부터 제대로 된 설명이나 사과를 받지 못했다고 했다. 최근에는 딸의 비자(F-4 재외동포비자)로는 아리셀에서 합법적으로 일할 수 없었다는 협박성 문자까지 받았다고 했다.
엄씨 : "그게 맞다면, 자기들이 사기 쳐서 일 시킨 거 아냐? 위험한 거 다 알면서 들여보내놓고 죽였잖아. 우리 딸, 한국말 다 알아들었어. 만약에 회사에서 '도망치라' 한마디만 했어도 우리 애 살았어요. 안전교육 시켰으면 일이 났겠어요? 불 번지는데 40초 넘게 걸렸는데, 20초면 다 도망갔다고. 불 났는데 소화기 들고 끄려는 자체부터가 틀려먹었잖아요. 그게 어디 배터리 공장이야? 폭탄 공장이지. 우리가 알았으면 폭탄 공장에 딸을 보냈겠어요? 어느 부모가 그러겠어요?"
이순희씨 : "화성시나 정부도 아리셀 편인 것 같아요. 우리는 한국 정부로부터 아무 연락도 못 받았어요. 사고 난 날에도 전화 한 통 안 왔고, 다 저희가 직접 뛰어다녀서 안 거예요. 수사는 또 왜 이렇게 오래 걸려요? 아리셀이 잘못한 게 있으면 바로바로 얘기해주면 되잖아요. 왜 우리만 이렇게 가슴을 쩔쩔 매요. 화성시는 7월말까지만 유가족 체류 지원을 한대요. '너희 이제 그만 집에 가라'는 거잖아요. 새끼가 아직 저 찬 데 누워있는데 어딜 가요? 이젠 정말 악밖에 안 남아요."
▲ 아리셀 참사로 사망한 고 엄정정(25)씨의 어머니 이순희(54)씨가 지난 24일 경기도 화성시에서 <오마이뉴스>와 만나 인터뷰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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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씨 부부는 한 달이 지나도록 딸 엄정정씨의 장례조차 치르지 못하고 있다. 10여 명 아리셀 참사 피해자의 유가족들도 마찬가지다. 이번 아리셀 참사로 사망한 23명 가운데 17명이 중국 국적이었다.
이순희씨는 인터뷰 내내 "할 수만 있다면 바꾸고 싶다. 내가 냉동고에 들어가고 애가 살았으면 좋겠다"며 울었다. 참사 사흘 후 딸의 시신을 확인한 이씨는 충격을 받아 정신을 잃기도 했다.
이순희씨 : "애가 엄마 아빠랑 같이 살겠다고 한국에 온 거잖아요. 이런 애를 우리가 어떻게 보내요? 막막해요. 너무 힘들어요. 진짜 보고 싶어요. 꿈에라도 나왔으면 좋겠는데 지금 꿈에도 안 나와요. 숙모 꿈에는 나와서 아무 말도 안 하고 그냥 웃고 갔다던데. 나한텐 한 번을 안 나와. 내가 너무 잘못했나 봐요.
오래 떨어져 지냈고, 항상 사랑이 부족했던 것 같아 미안해요. 내가 한 번은 지나가는 말로 '우린 딸만 둘인데 누구 집엔 아들이 있네' 했더니 우리 딸이 그래요. '엄마 나만 믿어, 나만 믿어, 걱정하지 마.' 이렇게 보내니까 못해준 것만 생각나요. 그 애를 가슴에 안고 어떻게 살아요? 엄마라고 미안함 뿐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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