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곤'으로 연기 떠난 남자, 공연기획자로 우뚝 서다
[최방식 기자]
"청소년기에 무대에 꽂혔죠. 연극을 공부하고 현장을 다니며 공연했어요. 배가 고파 일탈했지만 돌아왔죠. 연기를 선망하는 학생을 가르치려고요. 민족춤으로 사회의 모순을 고발하는 데 앞서기도 했죠. 그러다 문화예술 일가(一家)를 이뤘네요. 부자가 기획하고 모녀가 연기하는 공연 어떨까요. 사회와 개인의 아픔을 치유하는 문화예술도 꿈꾸죠."
'여주·양평 문화예술인들의 삶' 스물세 번째 주인공 변우균(65·남) 공연기획자의 말이다. 중복 더위, 양평 용문의 한 카페에서 마주한 그가 털어놓은 삶이다. 자극이 덜한 맑은탕 느낌이랄까. 흐르는 물도 좋고. '상선약수'(노자)라 하면 수긍이 더 쉬울성싶다.
"무대 위 공연자들이 얼마나 멋있던지요. 서민들의 고달픈 삶을 대변하겠다고 발버둥쳤죠. 현실은 녹록지 않았어요. 먹고 살아야 하고, 꿈은 멀어지고. 생계 임노동에 열정은 식어갔고요. 아쉬움만 한가득입니다. 성에 안 찰 밖에요."
흐르는 물과 같은 삶
▲ 변우균 공연기획자. |
ⓒ 최방식 |
"양평 태생 몽양(여운형 선생)이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좌우합작에 애쓰다 1947년 7월 19일 혜화동 로터리에서 극우 총격으로 사망했잖아요. 서거일 행사는 우이동 묘소에서 열렸거든요. 제가 양평문화재단 공모에 제안, 신원리 기념관 앞 추모제를 시작하게 됐어요. 지역 문예인들과 함께요."
몽양추모제 기획에는 8년 전 결성한 한국민족춤협회(이사장 이삼헌, 아래 민족춤협) 활동이 도움이 됐다. 세월호 참사 1주기를 맞은 2015년 진도(팽목항) 추모제 때 한풀이굿을 하며 중론을 모아 이듬해 결성됐다. 초대 이사장은 장순향씨가 맡았고, 그는 이태 뒤 사무총장을 맡아 4년을 일했다.
"민족춤협은 전래 민속춤이나 궁중춤과 달리 우리춤으로 사회적 아픔을 치유하자는 취지를 가지고 있죠. 민족예술인총연합에 민족 춤·굿·극을 포괄하는 춤위원회가 있었는데 사라지면서 관련 단체가 필요했거든요."
민족춤협은 2017년부터 매년 전국을 순회하며 한국민족춤제전을 개최한다. '아재'(중장년), '젊은'(청년), '오늘'(동시대 이슈) 등 3분야 행사를 진행한다. 올해엔 10월 2~5일 창작마루(서울 동대문)에서 개최한다. 2019년부터는 남북춤교류전, 2022년부터는 통일예술제를 매년 주최하고 있다.
"민족춤협이 사회적 아픔을 치유하는 진보적 사업을 수행하다 보니, 정책·사회적 지원을 받는 게 쉽지 않았어요. 모금과 후원으로 간신히 유지해왔죠. 대학로에 카페 '춤추는 사람들'(동양예술극장 커피숍 철수하며 임차인 구해)을 열어 재정난을 극복하고 모임 공간도 확보해야 했어요. 건물이 매각되며 카페도 철수했지만요."
그의 공연기획 저력은 연극에서 비롯됐다. 고향 인천에서 중학생 때부터 무대를 기웃거렸단다. 고교는 서울에서 다녔는데, 툭하면 친구들과 삼일로 창고극장에 달려가곤 했다고. 대학은 어쩌다 이공계로 진학했지만, 결국 연극영화과(중앙대)로 재입학, 연기 공부를 할 수 있었다.
"'연희광대패' 창립자 임진택 교실을 다녔죠. 관객과 동떨어진 무대보다 관객 속에서 울고 웃고 춤추는 마당극이 좋았어요. 독재정권에 신음하는 도시 서민과 노동자·농민의 아픔을 공감하고 알리는 데 앞장서고 싶었거든요.
▲ 몽양 여운형 선생 77주기 추모제 뒤 기념촬영.(2024년 7월 20일) |
ⓒ 변우균 |
빈곤으로 좌절... 하지만 또 다른 길이 다가와
하지만 열정도 빈곤 앞에선 오래 가지 못했다. 88년 근로복지공단에 취업했다. 직장 노동자의 문화를 담당하는 일이었다. 연극·문학·미술·음악을 공모해 책자를 발간하고 전시회와 공연을 기획하는 부서였지만, 8년여 직장생활은 그에겐 아픈 역사다.
"그때 결혼도 할 수 있었고, 가정을 꾸릴 재정적 기반도 마련했죠. 하지만 꿈을 실현하는 게 녹록지 않다는 걸 절감했죠. 고통을 감내하며 조금 더 참고 견딜 수 있었는데, 그러지 못한 아쉬움이 늘 남아있죠. 포기한 건 아니지만요."
공부를 더 해야 해 직장을 그만뒀지만, 그 뒤에도 그는 생계문제로 비정규 노동을 해야했다. 8년여 학교(초중고) 예술강사 생활이 그것. 연기를 희망하는 청소년에게 그 꿈을 키우는 일이어서 나름 보람도 있었다. 새로운 도전이기도 했고.
연기 꿈을 키우는 초중고 학생들에게 그는 늘 꿈을 포기하지 말라고 당부한다. 과거 생계 때문에 연기를 포기해야 했던 자신의 좌절감이 컸기에 더욱 그랬다. 마당극을 시작하며 다짐했던 사회진보의 삶, 세상을 바꾸는 문화예술을 못다 했다는 미안함이 인터뷰 내내 묻어났다.
길은 희망이라 한 이는 작가 루쉰(단편소설 외침)이다. 원래 없었지만, 누군가 가면 길이 된다고 했다. '분투 없이 열리는 길은 없다'(단편소설 상서)고도 했다. 티베트인들은 사람을 '걷는 존재'로 안다. 길이 삶의 무대인 셈이다. 그러니 종국에는 삶이 길이 되는 것. 그래서 시인 장순하는 '날 따라다니느라 지쳐 누운 길'이라 했다.
그렇게 또 다른 희망, 그 길이 연극인인 변우균에게 다가온 것이다.
"학교예술강사를 하며 노조도 결성했어요. 5명이 시작했는데 1천여명으로 조합원이 늘었죠. 예술인이 무슨 노조냐며 꺼리더니, 참여자가 늘었죠. 처우가 형편없었거든요. 노조를 인정조차 안 하다 이젠 사무실과 전임자도 생겼어요. 현재는 학교비정규직노조(예술분과)로 통합됐고요."
그가 양평으로 온 건 처가의 권유 때문. 처남이 양평에서 목회(개신교 목사)했는데 용문에 분양하는 아파트를 전세금(서울)으로 구입하는 게 어떠냐고 권했다고 한다. 장모와 부인이 거들어 그는 따랐다. 딸과 아들의 학교 문제도 걸림돌이 안 돼 수월했다고.
"우연히 양평에 오게 됐지만 대중교통과 자연환경이 좋아 모두가 만족했죠. 서울과는 달리 한가했고요. 요즘에는 용문(소재지)이 도시화하며 좀 복잡해졌어요. 더 한적한 양동(양평), 아니면 정선(지인이 권고해 현장답사까지)이나 거창으로 가볼까도 생각해봤죠."
부자가 기획하고 모녀가 춤·연기하는 가족공연단
▲ 프랑스 파리 마틴루터킹목사고교에서 개최된 ‘습’ 공연 뒤 기념촬영.(2024년 3월) |
ⓒ 변우균 |
그는 생계 때문에 연기를 포기하고 여러 우회로를 걸어왔다. 또 그런 사실을 아쉬워했다. 하지만 그는 문화예술 일가(一家)를 이뤘다. 무용하는 아내(정금희, 한국무용 전공 처용무 이수자)를 맞이했고, 딸 역시 무용가로 성장했으며, 아들은 컴퓨터영상을 공부하며 래퍼(작곡과 노래) 활동(학업 중)을 하고 있다.
"부자가 기획하고 모녀와 아들까지 출연하는 재미있는 가족공연이 가능하지 않을까요. 넷이 모이면 한 번씩 얘기하곤 하는데, 언젠가 해보려고요. 연기와 춤을 활용한 치유예술도 장기적 목표죠. 40여년 내공이면 가능하지 않을까요?"
'뒷것' 이야기가 한창이다. 21일 영면에 든 전 학전 대표 김민기의 덕목이다. 돈 되고 유명해지는 일은 '앞것'에 맡기고, 뒤(어둠)에서 묵묵히 돕는 이를 칭송하는 말이다.
몽양도 자기 공이나 주장만 내세우면 되는 게 없다고 이야기하곤 했다. 좌우합작 통일국가를 위한 간절한 호소였다. 자신의 길은 굽었지만 타인의 길을 곧게 펴주는 변 총장. 그의 덕목, '뒷것'에 견줄만하지 않을까.
덧붙이는 글 | 인터넷저널에도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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