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양 성폭행 사건 다룬 '한공주', 새롭게 알려진 진실
[김성호 기자]
잊힌 줄만 알았던 사건이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경남 밀양 여중생 집단성폭행 사건 이야기다. 20년 전인 2004년 경상남도 밀양시에서 발생한 이 사건은 인면수심이란 말이 꼭 어울리는 참극이다. 44명의 고등학생들이 5명의 중학생들을 1년 동안 집단적으로 성폭행하고 그 장면을 촬영해 유포하기까지 한 사건. 직접 성폭행에 참여하지 않았을 뿐 영상촬영을 보조하거나 망을 본 이들까지 포함하면 100여 명이 넘는 청소년이 가해자가 된 충격적 일이었다.
그럼에도 처벌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수사를 맡은 울산남부경찰서는 관련자 대부분을 훈방 조치했고, 구속수사를 거쳐 기소에 이른 이들도 대부분 형사처벌을 받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소년보호처분으로 소년원에 간 것은 한 명 뿐이고, 16명은 봉사 처분을 받았다. 나머지는 공소권 없음 등으로 불송치됐다. 사건은 그대로 종결됐고 관련자가 누구인지 대중 일반은 물론 전과 등 법적 기록조차 남지 않아 알 방도가 없다.
얼마 전 유튜버 '나락보관소'가 이들에 대해 순차적 신상공개에 들어간 것이 화제가 됐다. 가해자의 얼굴과 직장을 공개해 큰 파급을 일으킨 사건으로, 공개된 이들은 일자리를 잃고 정상적인 삶을 영위할 수 없는 상황에 내몰리기도 했다.
오작동하는 공적체계 응시하는 영화
▲ 영화 <한공주> 스틸컷 |
ⓒ 무비꼴라쥬 |
그럼에도 이 유튜버의 행위에 찬동하는 의견이 많았단 사실은 여러모로 의미심장하다. 법 앞에 만인이 평등하다는, 법이 사회적 약자까지도 공정하게 지켜준다는 믿음이 산산이 박살나버린 현실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어서다. 범죄에 대한 공적제재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다는 짙은 불신이 어느 유튜버의 신상공개를 응원하는 대중심리를 빚었다.
밀양 여중생 집단 성폭행 사건은 그 자체로 한국 법체계가 공적 제재를 하는 데 실패한 사건이 아닌가. 여론재판을 비판하는 이들조차 한없이 겸손해질 수밖에 없는 건 어느 언론 하나도 이 사건을 비롯해 법제도가 기능하지 못한 실패들에 대해 치열하게 취재하고 개선했다 말할 수 없어서 아닐까.
영화 <한공주>(감독 이수진)는 최근 다시 뜨거운 감자가 된 밀양 여중생 집단성폭행 사건과 관련해 시사점이 큰 작품이다. 영화가 실제 이 사건을 모티프로 삼았고, 그저 착상을 얻는 수준을 넘어 상당 부분을 재현에 가깝게 구성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작품을 제작하는 과정에서 피해자들의 동의를 얻는 절차가 없었다는 사실이 최근 드러나기도 했다. 지난 20일 방송된 SBS <그것이 알고 싶다>는 밀양 집단 성폭행 사건을 다루며 당시 피해자를 인터뷰했다. 피해자는 이 과정에서 제작진에게 "영화도 그렇고 드라마도 그렇고 저한테 동의를 얻었던 건 아니잖아요"라고 말했다.
일각에선 언론과 달리 대중을 대상으로 수익을 거두는 창작물인 영화가 동의 없이 작품을 제작해 상영한 것이 공론화를 넘어 2차가해가 아니냐는 비판이 나온다. 설득력이 아예 없는 문제의식이라곤 할 수 없는 일이다.
이로부터 한국 콘텐츠 제작의 그릇된 관행, 즉 당사자의 동의 없이 작품을 만드는 일의 타당성 또한 따져볼 필요가 있겠다. 비단 민감한 형사사건인 <한공주>뿐 아니라, 유행가 제목을 딴 tvN드라마 <스물다섯, 스물하나> 또한 곡 제작자의 동의를 구하지 않고서 드라마를 제작해 상영한 사실이 알려져 논란이 인 바 있다. 현행법에 저촉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관련자 동의를 구하려는 노력 자체를 하지 않는 관행이 바람직해 보이진 않는다. 특히 사건의 피해자가 명확하고 여전히 어린 나이였을 그들이 받을 수 있는 고통이 분명하단 점에서 더욱 그렇다.
이토록 평화로운 세상 어느 한 켠엔
그럼에도 작품엔 선명한 가치가 있다. 한국사회가 제대로 소화하지 못한 사건, 공적 제재를 하지 못했고 그럴 의지도 없었던 이 참극의 부조리함을 낱낱이 지적해 일깨우고 있기 때문이다. 대법원 판결이 나왔다고 해도 납득할 수 없는 이 사건에 분개하고 문제를 지적하여 이제라도 바로잡을 구석이 있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한공주>는 주인공 한공주(천우희 분)가 다른 도시로 전학을 온 시점부터 시작한다. 고향을 떠나 전학을 온 공주는 낯선 도시에서 혈혈단신 혼자다. 그녀를 데리고 온 전 학교 교사(조대희 분)는 그곳에 사는 제 어머니에게 공주를 떠맡기듯 맡기고 돌아간다. 제 이름으로 개통한 전화기 하나를 내주고는 저와 공주의 아버지 말고는 누구의 전화도 받지 말라고 당부한다.
그로부터 공주의 삶이 펼쳐진다. 그 또래 아이들처럼 학교에 가고 공부를 하고 이런저런 일을 겪는다. 수영에 관심이 있어 동네 수영장에 등록한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일상이다. 3년 동안이나 왕래가 없었던 어머니를 찾아가보지만 박대만 당하고 돌아오고, 기댈 곳 없는 외로움 가운데 제가 묵는 집 주인인 교사의 어머니와 조금씩 감정을 교류하기도 한다. 학교에선 먼저 다가온 급우 은희(정인선 분)와 그 친구들과도 관계가 생기지만 선뜻 친해지진 못한다. 공주가 유난히 예민한 탓이다.
밀양 여중생 집단성폭력 사건의 영화적 재현
▲ 영화 <한공주> 스틸컷 |
ⓒ 무비꼴라쥬 |
<한공주>는 있는 그대로 밀양 여중생 집단성폭력 사건의 영화적 재현이다. 극영화라곤 하지만 주된 사건이 실제 발생한 범죄와 그 이후 벌어진 일을 그대로 극화한 수준이다. 사건이 보도된 내용을 추려 이야기로 꾸린 것으로, 사건 관계자가 아니더라도 영화를 보는 누구나 이것이 실제 사건임을 알 수 있을 정도다. 심지어 영화 홍보 과정에서부터도 이 사건을 모티프로 삼았음을 알리기도 했다.
영화의 클라이맥스는 공주를 찾아 그녀가 전학온 학교로 몰려든 가해자 부모들의 모습으로 채워진다. 공주는 거듭 숨고 도망해야 하는 신세다. 합의하고 사과하겠단 이들이 전혀 그와 같은 태도가 아니다. 기댈 곳 없는 공주가 갈수록 설 자리 없는 곳으로 물러나는 과정이, 선한 마음을 가진 이들조차 선뜻 그녀에게 손 내밀지 못하는 모습이 우리가 외면해 온 이 땅의 비정한 현실을 눈앞에 펼쳐낸 듯 그려낸다.
작품에서 유달리 인상적인 대목이 몇 개쯤 있다. 공주의 상황이 문학적이며 상징적으로 표현된 장면들이다. 공주가 제게 다가서는 친구 은희를 피해 걸어가며 테니스코트로 들어가 문을 잠그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그를 쫓아온 은희는 코트 안엔 길이 없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공주는 스스로 좁은 곳으로 달아나 외부와 통하는 문을 잠근 꼴이다.
공주는 선뜻 문을 열고 나올 생각이 없다. 은희와 공주는 코트의 경계를 따라 걸으며 대화한다. 스스로 문을 잠그고 나올 곳 없는 곳에 갇힌 공주의 상황이 어디 학교 안 테니스코트에서만일까. 바깥에서 그녀를 보고 있는 것이 어디 은희만일까.
잊지말자, 세상의 '공주'들은 아직 살아있음을
25미터 레인의 끝까지만 헤엄을 쳐보고 싶다는 공주의 말에, 한 친구가 어차피 가봐야 벽뿐이라 답하는 대목 또한 그러하다. 물에 빠져 죽은 친구의 모습을 본 뒤 수영을 배우겠다 마음먹은 공주의 이야기는 영화를 보는 이의 마음을 먹먹하게 한다. 어쩌면 물에 빠진 뒤에도 살고 싶다는 마음이 들 수 있으니까, 헤엄을 칠 수 있다면 그때 제게 한 번의 기회를 줄 수 있으니까, 믿을 것은 오로지 저 자신뿐이니까.
25미터를 헤엄쳐 반대쪽에 도착한대도 어차피 벽이 있을 뿐일까. 나아간 그곳에 무언가 달라져 있을까. 영화의 결말이 완전한 비극인지, 약간의 희망이 서려 있는지를 우리는 아직 확답할 수 없다. 울리는 전화가 끝끝내 응답받지 못한 것인지, 홀로 남은 가방이 버려진 것인지, 물에 빠진 공주가 투신한 것인지, 그녀가 그렇게 가라앉고 마는 것인지를, 우리는 확신할 수 없다.
분명한 건 세상의 공주는 아직 살아있다는 것이다. 그들에게 연락하지 않고 만든 이 영화와 달리, 살아서 아무것도 모르고 당한 중학생이 아닌 분노와 배움을 겪은 어른으로 살아남아 있다.
▲ 영화 <한공주> 포스터 |
ⓒ 무비꼴라쥬 |
덧붙이는 글 | 김성호 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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