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보다 '즉각 행동' 노렸다...한·일 사도광산 등재 협상 막전막후
일제 강점기 약 2000명의 조선인들이 끌려가 강제노역에 시달린 장소인 일본 사도광산이 27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건 정부가 ‘후속조치를 담보할 수 없는 말’보다는 ‘당장 실행에 옮기는 행동’에 방점을 찍고 일본과 협상을 벌인 결과로 볼 수 있다. 2015년 강제노역 역사를 충분히 알리겠다는 일본의 약속에 따라 군함도 세계유산 등재에 찬성했지만, 일본이 이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은 걸 반면교사로 삼았다. 부도 위험이 있는 ‘어음’보다는 확실한 ‘현금’을 챙긴 셈이다.
이날 인도 뉴델리에서 열린 세계유산위원회(WHC) 회의에서 사도광산의 세계유산 등재가 결정된 뒤 외교부는 보도자료를 통해 “우리 정부는 전체 역사를 사도광산 현장에 반영하라는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의 권고 및 세계유산위원회의 결정을 일본이 성실히 이행할 것과 이를 위한 선제적 조치를 취할 것을 전제로 등재 결정에 동의했다”고 밝혔다.
복수의 외교 소식통에 따르면 정부가 일본과의 협상에서 중점을 둔 건 말보다 행동, 그리고 행동의 담보였다.
2015년 군함도 등재 당시 일본은 “많은 한국인과 다른 이들이 자신의 의사에 반해 동원돼 가혹한 환경 아래서 강제로 노동한 사실이 있음을 인식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일본은 이후 강제노역 피해자들을 제대로 추모하고 실상을 알리겠다는 약속을 이행하지 않았다. 군함도가 있는 나가사키가 아닌 도쿄에 ‘산업유산정보센터’를 설치했고, 강제징용 관련 역사를 왜곡하는 내용을 전시했다. 이 때문에 ‘말의 승리’도 빛이 바랐다.
정부는 그래서 이번에는 초반부터 일본의 ▶행동이 ▶등재 결정 전에 ▶현장에서 이뤄져야 한다는 방침을 정하고 협상에 임했다고 한다. 등재 자체에 반대하는 게 아니라 제대로 된 역사를 담아 등재해야 한다는 쪽이었다. 실제 아픈 과거로부터 교훈을 얻는 것 역시 중요하다는 취지에서 많은 부정적 세계 유산(네거티브 헤리티지)이 존재한다. 아우슈비츠 수용소가 대표적이다.
(1940, 1942). 한국인 노동자들에 의한 노동쟁의(1940.2월 발생/1940.3월호에 기록), 한국인 노동자가사도광산에서 작업 도중 사고로 사망한 사실(1941.12월 빌생/1942.1월호에 기록) 기록돼 있다. 사진 외교부" src="https://pds.joongang.co.kr/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2407/27/32b6a4bf-ac01-44c8-aa78-b8300c0b972a.jpg"> 일본이 이날 WHC 회의에서 등재가 확정되기 며칠 전에 이미 사도광산 인근에 있는 ‘아이카와 향토박물관’에 조선인 노동자와 관련한 전시공간 마련을 완료한 것도 이런 정부의 입장이 상당 부분 반영된 결과로 볼 수 있다. 정부가 “선제적 조치”를 언급한 이유다.
다만 일본 측이 강제성을 명시적으로 인정하지 않은 것은 아프게 받아들여야 할 대목이다. 일본 측 대표인 카네 타케히로 주유네스코 일본 대사는 WHC 회의에서 등재 결정 뒤 “일본은 한국인 노동자들이 처했던 가혹한 노동환경과 그들의 고난을 기리기 위해 새로운 전시물을 사도광산 현장에 이미 설치했다”며 매해 추도식을 열겠다고 밝혔지만, 동원과 노역의 강제성 등은 언급하지 않았다.
대신 “일본 정부는 그동안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채택된 모든 관련 결정과 이에 관한 일본의 약속들을 명심할 것(bearing in mind)”이라고만 했다. 외교부는 이에 대해 “일본 정부가 명심하겠다고 한 결정과 약속은 2015년 군함도 등재 당시 채택된 결정문과 일본 수석대표의 발언문을 포함한다”고 부연했다. 직접 언급은 안 했지만, 일본이 사실상 강제성을 인정한 당시의 입장을 계승한다는 취지의 설명이다.
하지만 이를 두고 일본이 해당 대목을 왜곡할 우려도 제기된다. 국내적으로는 강제성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식으로 주장할 가능성이다.
실제 사도광산 전시물에는 “(2차 세계대전)전시에 국가총동원법, 국민징용령 및 기타 관련 조치”에 따라 조선인이 징용됐다는 내용이 있다. 이는 일본이 식민지배의 합법성을 주장할 때 쓰는 논리와 연결될 수 있다. 일본의 한국 지배는 합법이었고, 국가총동원법 등 국내법에 따라 자국민을 징용한 것 역시 합법이라는 식이다.
외교부 당국자는 이에 대해 “강제노동이나 강제동원 논의보다는 어떤 조치를 할 것인가에 집중했다. 합의가 이뤄진 후에도 서로 다른 자기 주장을 하기 시작하면 끝없는 싸움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자기 해석이 아니라 등재 결정 때 발언문 그대로, 전시 내용 그대로 보여주고 판단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게 이번 합의의 정신이라고 양측이 동의했다”고 설명했다.
이와 관련, 일본의 ‘선제적 행동’을 끌어내기 위해 정부 역시 일정 부분의 양보는 불가피했을 것이라는 게 외교가의 대체적 관측이다. 한 소식통은 “국내적으로 위기를 맞고 있는 일본 기시다 정부로서는 행동에서 양보한 만큼 우익 여론을 설득할 반대급부가 필요했을 것”이라며 “협상에서 한쪽이 다 가져갈 수는 없기 때문에 한국 역시 이 부분은 과거 입장 계승을 확인하는 식으로 합의에 도달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1943),
「반도인 노무자에 관한 조사보고」
(1940). 동 사료들은, 『니가타현사』(1988), 『사도 아이카와의 역사』(1995)에서 참조한 데이터들이 수록되어있는 1차 사료다. 동 사료들에 △위험한 갱도 내 작업에 한국인 노동자가 일본인 노동자에 비해 더 많이 종사했다는 사실(
「반도 노무관리에 대하여」
), △계약기간 만료자에 대해 “여하를 막론하고 전원 계속해서 취로(就勞)토록 한다”는 방침(
「반도 노무관리에 대하여」
), △한국인 노동자의 월(1940.7월)평균 근로일(가동일) 수가 28일에 달했다는 사실(
「반도인 노무자에 관한 조사보고」
) 등이 기록돼 있다. 사진 외교부" src="https://pds.joongang.co.kr/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2407/27/ca08edaa-5adf-461f-9bc2-7809c4887d48.jpg"> 정부는 이에 대해서도 말로 하는 표현보다는 전시물 등에 담긴 실제 의미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는 분위기다.
전시물 중 동원과 관련한 설명에는 “조선총동부의 관여 하에 모집” “관 알선” 등의 내용도 있다. 그간 일본은 일련의 강제동원을 민간 업자차원에서 이뤄진 조선인의 자발적 취업 행위처럼 왜곡하곤 했는데, 일본 정부가 관여했다는 사실을 확실히 한 것이다.
또 전시 내용에는 한국인 노동자 7명이 도주하고, 3명은 형무소에 수감됐다는 기록도 있다. ‘도주’로 기록된 것 자체가 당시 노동자들이 인신 구속 상태에 있었다는 방증이다. 강제성을 간접적으로 시인한 것으로 볼 여지가 있다.
사료 중에는 계약기간 만료 한국인 노동자에 대해서도 “여하를 막론하고 전원 계속해서 취로(就勞)토록 한다”는 방침을 담은 문서도 소개됐다. 합법적 노동 계약이 아니라 강제적으로 노동이 이뤄졌음을 보여준다.
외교부 당국자는 “우리가 요구한 것이 전시물에 모두 담겨 있는 것도 아니고, 우리가 100% 찬성해서 등재에 찬성한 것이 아니다”라면서도 “전시내용에는 중요한 내용이 많이 반영됐다”고 자평했다.
실제 일본이 전시를 통해 1519명, 1140명 등 한국인 노동자 수가 기록된 문서 자료를 제시한 것도 눈여겨볼 만 하다. 일본은 당초 조선인 노동자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기류마저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이 처음 사도광산 등재 준비에 착수할 때만 해도 군함도 등 다른 강제노역 시설과 달리 일본 정부나 기업이 만든 당시의 노동자 명부도 확보되지 않았다.
유지혜 기자 wisepen@joongang.co.kr, 박현주 기자 park.hyunj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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