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춘기 시절 내 콤플렉스와 싸워준 투애니원... 덕분에 살았다

이진민 2024. 7. 27. 1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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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니앨범 2집 < Ugly > 들으며 위로 받은 청소년기, 그녀들은 '방공호'였다

[이진민 기자]

지금은 노트북 앞에 앉아 글을 쓰지만, 학창 시절의 나는 활자가 아닌 몸으로 말하는 게 익숙했다. 다른 친구들이 독서실과 입시학원을 들락거릴 때 나는 댄스 연습실을 오갔다. 손자국이 여러 겹 눌린 거울을 보며 두 팔로 파도를 그리며 표현했고, 조약돌같이 뻣뻣한 발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처음으로 연습 영상을 촬영했을 때다. 어울리지 않는 형광 비니를 눌러쓰고 빨간색 후드티를 입고 카메라 앞에 섰다. 다른 친구들이 살랑거리는 춤을 출 때 나는 거칠게 손을 뿌리치며 쿵쿵 뛰어다녔다. 투애니원의 < COME BACK HOME >에 맞춰 춤을 췄다. 이 곡을 고른 이유는 단순했다. 삐딱하다 못해, 삐뚤어진 여자아이를 견딜 수 있는 음악을 하는 건 오직 투애니원뿐이었다.

'나'에 취한 여자들, 투애니원
 
 지난 2009년 드라마 '스타일'에 카메오 출연한 투애니원
ⓒ 연합뉴스
  
투애니원은 데뷔하자마자 주류였다. 빅뱅의 여동생 그룹으로 등장해 당시 잘 팔렸던 '롤리팝' 휴대전화의 CM송 < Lollipop >을 함께 불렀다. 형광색 티셔츠에 지나치게 긴 아이라인, 머리를 높이 올린 '야자수' 스타일까지. 아름다움보다 개성이란 단어가 어울리는 비주얼이었다. 콘셉트 역시 사랑을 갈구하는 소녀가 아니었다. 남자가 떠나가도, 옆에 누가 없어도 아무렇지 않은 투애니원의 노랫말은 '나'를 중심으로 공회전하던 소녀들을 열광하게 했다.

그들은 자유를 위해 미친 듯이 달리고(1집 < Fire >), 바람피운 애인과 손쉽게 작별하고(1집 < I don't care >), 겸손함은커녕 "내가 제일 잘나간다"고 선전포고하는 여성들이었다. 가사에 '여자', '남자'가 나왔지만 잘 보여야 하는 '타자'로 대하기보다 '나' 스스로 성장하기 위한 발판으로 삼았다. 무대에서 깜찍한 표정 대신 기세로 관중을 압도하는 투애니원의 모습은 희귀했고, 그래서 소중했다.

지금이야 걸크러시 콘셉트가 지천으로 널려 질릴 수준이지만, 2000년대 후반과 2010년대 초반에는 귀엽고 섹시한 걸그룹이 대다수였다. 그들은 달라붙는 옷을 입고 순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을 안아주고 사랑해달라고 노래하거나 사랑하는 남자가 얼마나 대단한지 찬양하며 노래했다. 그 언니들은 정말 예뻤지만, 이상하게 거리를 두고 싶었다.

콤플렉스와 싸워준 여자들
 
 지난 2014년 홍콩 투애니원 월드투어
ⓒ 연합뉴스
 
투애니원은 사춘기 시절 내 콤플렉스와 싸워준 아군이었다. 당시에도 여자 아이돌은 10대 소녀들의 우상이었고 나 또한 그런 여자가 되어야 하는 비극에 놓였었다. 아직도 교실 TV로 뮤직비디오를 보며 서슴없이 "섹시하다"를 외치고, 아이돌과 나를 비교하며 몸매 평가와 함께 "성격이 더 부드러우면 귀엽겠다"는 피드백을 준 남학생들을 잊을 수 없다.

그때 즈음 투애니원이 미니앨범 2집의 < Ugly(어글리) >를 타이틀곡으로 활동했다. 이 곡은 추녀(醜女)의 노래다. "난 예쁘지 않아 아름답지 않아"로 시작하는 이 노래는 철저히 결핍에 파고든다. 투애니원이 발매한 여러 곡 중에 이토록 타자에 매몰된 노래는 없었다.

화자는 '너'처럼 환하게 웃을 수 없고, '너'와 어울리지 않는 '나'를 숨기고 싶어 한다. 노래가 진행되고 결핍은 더 깊어진다. 누구도 '나'를 안아줄 사람은 없지만, 그렇다고 '너'의 관심은 싫다며 어디론가 떠나려 한다. 끝까지 들어도 투애니원다운 당당함은 나오지 않는다. 내가 못생겨서 사랑받지 못한다는 걸 안다며, 언제나 혼자라는 말만 되풀이한다.

시험을 마치고 친구들과 노래방에 갈 때 이 곡을 마지막으로 불렀다. 청승맞게 이별 발라드를 부르고, 아이돌을 흉내 내며 환상에 빠지다가 시간이 끝나갈 때쯤엔 현실로 돌아와야 하는 느낌이어서 그랬을까. 우리는 콤플렉스로 가득한 10대였다. 애써 강한 척해도 부모님과 싸운 날에는 밤잠을 설쳤고, 반 친구들의 뒷담화에 무너졌다. 그리고 인생 주기 속에서 가장 거울을 많이 들여다본 시절이기도 했다.

나는 꾸미는데 재주가 없었고, 꾸미는 걸 싫어했다. 부스스한 반곱슬머리를 내버려뒀고 입술에 틴트조차 바르지 않았다. 아름다워지는 건 싫었는데 사랑받고 싶었다. 그건 모든 10대의 서글픈 욕망이었다. 못났지만, 사랑받고 싶다는 가사를 목이 터져라 부르고 도망치듯 노래방에서 빠져나왔던 시절이다.

"이상하게 < Ugly >만 부르면 눈물이 나지 않냐?"는 친구의 말에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우리는 알았다. 세상에는 끝까지 백조가 될 수 없는 미운 오리가 있고, 이 노래는 그들을 위한 곡이라는 걸.

그런 내게 투애니원은 방공호였다. 나보다 더 멋진 여성이자, 까탈스럽게 앞선 인생을 살아간 선배였다.

나도 투애니원처럼 아무도 또 다른 내가 될 수 없다(Can't nobody)며, 마음에 들지 않은 고백을 거절하고(Go away), 세상에 '멘붕'을 일으킬 사람이 될 거라고 믿었다. 아직도 새해가 되면 '내가 제일 잘 나가'를 듣는다. 걸그룹은 많지만, 투애니원 같은 그룹은 없다. 그들만이 유일하게 정상성에서 벗어난 여성들을 위로한다. 아름답고 사랑받는 것 대신에 '나'에 도취한 여성들 말이다.

이젠 콤플렉스는 개인 수납장에 보관할 줄 아는 어른이 되었지만, 이상하게 투애니원 노래만 들으면 감정이 울돌목처럼 몰아친다. 연습실에서 열등감과 춤추던 내가 떠올라서일까.

그런 투애니원이 데뷔 15주년을 맞아 오는 10월부터 한국을 시작으로 전 세계 콘서트 투어에 나선다고 한다. 과연 콘서트장에 내 자리가 있을까 싶다. 그런데 자리가 있다고 해도 어쩐지 나보다 어린 소녀들에게 양보하고 싶다. 이곳에 네 콤플렉스와 싸우고 강인함을 알려줄 여성들이 있다고 보여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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