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탁기 뚜껑 위 흐릿한 실루엣…7일 뒤 성폭행 영상 복원됐다
여성이 닫으려는 문을 비집고 검은색 옷을 입은 건장한 남성이 들어온다. 여성의 입을 막고 강제로 영상에는 보이지 않는 방 안의 사각지대로 끌고 간다.
20대 남성 A씨가 특수감금 및 강간 혐의로 지난 4월 구속 송치된 사건 영상 증거의 한 장면이다. 과거 연인 사이였던 피의자가 강제로 집으로 들어오는 장면을 증거로 남기기 위해 피해자가 집 안에 숨겨둔 촬영 장비에 A씨가 고스란히 찍혔다. 하지만 39분 분량의 영상에 피의자 모습이 담긴 건 2분, 그것도 범행 장면은 나오지 않고 피해자를 끌고 가는 장면뿐이다.
사건을 배당받은 춘천지검 강릉지청 형사부 2년 차 강윤제 검사(37‧변호사시험 10회)는 300페이지가 넘는 기록과 총 한 시간 분량의 영상 3~4개를 유심히 살폈다. 피의자가 합의된 성관계라며 혐의를 부인하는 상황에서 양쪽의 진술을 뒷받침하는 객관적 증거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해당 영상은 피의자의 송치된 범죄 사실에도 포함되지 않은 영상이었다. 피의자와 피해자가 영상의 왼편 사각지대로 사라진 순간에도 강 검사는 영상을 끄지 않았다. 영상의 100분의 1 정도 크기로 나온 통돌이 세탁기 뚜껑에 집중했다. 뚜껑에 비친 실루엣에 추가 범행의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했다. 즉각 대검찰청 법과학분석과에 영상을 의뢰했다.
강 검사는 “과거에도 매장 안 CCTV에 찍힌 소주잔을 던져 파편이 튀는 장면을 대검찰청의 영상 화질 개선으로 포착한 경험이 있었다”며 “해당 영상도 가스레인지인지 통돌이 세탁기인지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작았지만, 충분히 범행 장면을 밝힐 수 있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공은 대검 법과학분석과에 넘어갔다. 당시 영상 개선 작업을 한 윤석환 수사관은 “처음 영상이 의뢰했을 때는 너무 작은 부분이고 범행 장면이 보이지 않아 실제 범행 장면이 드러날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고 말했다.
윤 수사관이 영상을 의뢰받았을 당시 A씨의 남은 1차 구속 기간은 일주일 남짓. 윤 수사관은 “39분 분량의 영상을 개선하기 위해선 빠듯한 시간이었다. 꼬박 일주일을 야근하며 범행 단서를 찾기 위해 작업했다”고 말했다. 윤 수사관은 인공지능을 활용한 영상 개선 프로그램 5~6개를 이용해 영상 화질 개선 작업에 나섰다.
수사 기법으로 자세히 밝힐 수 없지만, 화질의 해상도를 높이고, 영상을 확대하고, 대폭 확대한 영상의 빈 픽셀은 유사한 픽셀로 채워 넣어 화질의 선명도를 높이는 작업의 연속이라고 한다. 윤 수사관의 손길을 거치자 세탁기 뚜껑에서 피의자 A씨가 피해자를 상대로 강제로 범행을 저지르는 장면이 거울에 비치듯 선명해졌다.
큰 충격으로 해당 범행을 기억하지 못하던 피해자는 강 검사의 설득과 설명에 다시 한번 용기를 내 조사실로 나왔고, 추가 피해를 진술했다. 해당 진술을 토대로 강 검사는 영상을 A씨에게 들이밀었다. 그간 합의된 성범죄라고 범행을 부인하던 A씨도 객관적 증거 앞에 범행을 전부 시인했다. A씨는 지난 5월 특수 감금과 강간 등 혐의로 구속기소 됐고, 현재 1심 공판 중이다.
강윤제 검사는 법과학분석 기술을 이용해 피의자의 추가 범행을 밝혀내고 구속기소 한 성과를 인정받아 대검찰청 2024년 2분기 과학수사 우수사례에 선정됐다. 범죄를 저지르면 반드시 처벌된다는 점을 알리기 위해 인터뷰에 응했다는 강 검사는 “과학수사를 통하여 실체적 진실을 찾기 위해 힘쓰는 대검 과학수사부의 노하우와 노력 때문에 이번 사건의 전말이 밝혀질 수 있었다”며 “범죄가 진화하지만 과학수사 기술도 그만큼 발전하고 있다. 완벽한 범죄는 없다”고 말했다.
석경민 기자 suk.gyeongm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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