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사관리사 정착, 제도적 뒷받침에 달렸다… 외국인 돌봄인력 시대
필리핀 가사관리사 100명을 도입하는 시범사업 시행을 앞두고 외국인 가사노동자를 둘러싼 논란이 가열되고 있다. 정부가 고용허가제(E-9 비자)로 들어오는 가사관리사뿐 아니라 최저임금을 적용받지 않는 가사노동자인 가사사용인 시장을 확대한다고 밝히면서 노동계 반발이 거세다. 가사·돌봄 노동이 노동법 보호를 받는 일자리로 자리 잡지 못하면 내국인은 물론 외국인도 해당 업종을 기피하는 악순환이 반복될 거라는 우려가 크다.
26일 서울시에 따르면 시는 다음 달 6일까지 필리핀 가사관리사 서비스 이용 가정을 모집하고 9월 초부터 시범사업을 진행한다. 필리핀 가사관리사는 정부 인증 가사서비스 기관과 계약을 맺고 출퇴근 형식으로 일한다. 가사관리사는 정부가 가사도우미라는 표현 대신 사용하겠다고 발표한 공식 직업명이다.
정부는 가사관리사 사업 확대를 공식화한 상황이다.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는 지난달 저출생 대책을 발표하며 내년 상반기에 E-9 가사관리사를 1200명 규모로 늘리겠다고 밝혔다. 정부 인증 기관에서 고용하는 E-9 가사관리사는 근로기준법상 근로자로서 최저임금 적용을 받는다.
이와 별개로 저출생 대책에는 가사사용인 확대 정책도 포함됐다. 가사사용인은 가정에서 개별적으로 고용하는 사적 계약 형태의 가사도우미를 뜻한다. 이 때문에 법상 가사사용인은 최저임금을 적용받지 않을 수 있다.
정부는 외국인 유학생(D-2)과 외국인 근로자 배우자(F-3)가 이러한 가사사용인 형태로 일하는 것을 허용하는 5000명 규모의 시범사업을 추진할 계획이다. 현재 재외동포(F-4) 등이 가사사용인으로 일할 수 있는데, 허용 비자를 더 늘리겠다는 것이다. 정부는 민간 기관이 외국인 가사사용인을 도입·중개·관리할 수 있는 제도 도입도 검토하기로 했다.
노동계는 정부가 최저임금 차등 적용을 위한 모순된 정책을 펴고 있다면서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돌봄 서비스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가사노동자의 근로조건을 더 열악하게 만들고 있다는 비판이다.
정부는 관련 정책을 추진하는 근거로 ‘내국인 가사·돌봄 노동자의 고령화와 인력 감소’를 꼽는다. 2022년 기준 국내 아이돌보미의 평균 연령은 57.5세였다. 60대 이상이 43.6%, 50세 미만은 7.9%에 불과했다. 가사육아도우미 종사자 수는 2019년 15만명에서 2022년 11만명으로 줄었다.
그러나 가사관리사·가사사용인을 포함해 외국인 가사노동자를 원하는 수요가 어느 정도인지, 필리핀 외에 어느 국가에서 얼마나 인력을 도입할지, 본사업 때 정부나 지방자치단체의 예산 지원은 어떻게 이뤄지는지 등 세부적인 계획은 불투명한 상태다. 1200명이라는 가사관리사 도입 규모 역시 목표치에 불과해 실제로는 얼마나 도입될지도 불투명하다. 고용노동부 관계자는 “시범사업이 어느 정도 진행되고 모니터링을 거쳐야 (본사업을) 준비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외국인 가사노동자 정책이 충분한 사회적 논의 없이 일방적으로 추진됐다고 입을 모은다. 조혁진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은 “농업이나 어업은 사업주 단체가 내국인력을 도저히 구하기 어려워 외국인력을 요청하지만, 가사·돌봄은 그러한 문제 제기 없이 정부에 의해 추진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외국인력 도입 정책은 ‘누가 원하는지’가 가장 중요한데, 정책의 근간이 흔들리고 있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조 연구위원은 “법제도 밖의 비공식 돌봄 시장을 키우는 것은 비공식 고용 시장을 줄여가는 국제사회의 흐름에도 맞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가사사용인 확대 정책이 2022년 시행된 가사근로자 고용개선 등에 관한 법률(가사근로자법)의 취지를 퇴색시킨다는 비판도 크다. 해당 법안은 정부로부터 인증을 받은 가사서비스 제공 기관이 가사노동자를 근로자로 직접 고용하도록 한 법이다. 그동안 노동법 사각지대에 있었던 가사노동자들이 최저임금과 고용·산재보험 등 사회보험 적용을 받을 수 있도록 안전망을 구축한 것이다.
정부 인증을 받은 기관은 100여곳으로, 법 시행 초반과 비교해 최근 증가 속도는 더디다. 고용부 연구용역 의뢰로 지난해 발표된 ‘정부인증 가사 서비스 시장 활성화 방안’ 보고서는 사회보험의 필요성이 적은 60세 이상보다 40대 이후 일자리에 진입하려는 예비 가사관리사에 맞춰 제도를 개선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직무 교육과 노동인권교육, 표준 가사서비스 개발 등을 통해 가사관리사가 비공식 노동이 아닌 실질적인 직업이라는 인식을 확산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외국인 가사노동자 논의가 비용에만 초점을 맞춰 진행되고 있다는 점도 문제로 꼽힌다. 최저임금 적용 논쟁처럼 사용자의 관점에서 이슈가 집중될 뿐 노동자의 생활 및 노동환경, 인권침해 문제 등에 대해서는 정책적 고민이 부족하다는 지적이다. 정부가 ‘저렴한 돌봄’의 예로 들고 있는 홍콩 싱가포르도 입주형 가사노동자의 과로, 임금체불, 외국인 이탈 등 부작용이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지난해 12월 한국행정연구원의 ‘외국인 가사노동자 도입 정책의 쟁점 분석 및 제언’ 보고서는 “외국인력이 돈을 벌러 한국에 온 상황에서 다른 산업 및 업종의 고용허가제 인력만큼 돈을 벌지 못할 경우 과연 제도가 지속가능할 수 있을지 고민이 필요하다”고 짚었다. 또 단기적으로 가사노동자의 업무환경과 업무 범위 기준 마련, 이용자에 대한 검증기준 마련 등이 필요하며 장기적으로는 가사 분야 외국인력을 위한 노동권 법 제도가 마련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국여성민우회와 야당 의원들이 지난 19일 공동주최한 국회 토론회에선 “이주 가사노동자 도입 정책은 젠더, 인종, 계급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복합적인 차별과 착취 구조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분석이 나왔다. 외국인이자 여성인 가사노동자들이 저임금 돌봄 노동에 적합하다고 여겨지고 개발도상국 출신이라는 편견으로 인해 사회적 불평등이 심화할 수 있다는 지적이다.
구미영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이용자들은 매우 저렴한 비용으로 돌봄 인력을 이용하고 싶어 하지만, 저렴한 비용과 양질의 서비스가 양립하기 어렵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고 말했다. 구 연구위원은 “서비스 품질을 높이고 지속가능한 돌봄 서비스를 공급하기 위해선 공적 책임을 강화하고, 더 많은 가사노동자가 노동법 보호를 받을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고 말했다.
세종=박상은 기자 pse0212@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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