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배 더 쓰는 여의도 시간… “장애인의 국회환경 점수는 20점”
“의사진행발언 전에 저에 대한 신상발언을 먼저 드리겠습니다.”
지난달 19일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전체회의. 의료계 비상상황 관련 긴급 현안질의 등을 위해 소집된 회의에서 서미화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입을 열었다. “저는 시각장애 국회의원으로서 소리로 본다”며 운을 뗀 그는 “선배·동료 위원들과 동일한 시간을 부여받아 발언이나 질의를 할 경우 제가 준비한 의제들을 충분히 말씀드리기 어렵다”고 말했다.
서 의원은 “동등하고 내실 있는 상임위 활동을 위해서는 통상 시각장애인에게 주어지는 1.2~1.7배의 시간이 더 필요하다. 이는 특별한 배려가 아니라 정당한 편의 제공”이라고 강조했다. 국회 보건복지위원장인 박주민 민주당 의원은 “미리 못 챙겨 죄송하다. 충분히 고려될 수 있도록 하겠다”고 호응했다. 이날 의사진행발언은 5분으로 제한됐지만 서 의원에게는 7분의 시간이 주어졌다.
이는 ‘일할 수 있는 국회법’을 구상한 계기가 됐다. 현행 국회법은 대정부 질문 때 장애가 있는 의원에게 추가 질문 시간을 허가할 수 있도록 하고 있지만 상임위 활동에 대해선 별도 규정이 없다. 이에 서 의원은 상임위에서도 추가 발언 시간을 주고, 회의 문서를 점자 및 음성 등 방식으로도 제공하며, 의정활동에 편의를 제공할 수 있는 사람이나 보조견을 회의장에 출입할 수 있도록 하는 개정안을 마련했다. 그는 시각장애가 있는 김예지 국민의힘 의원에게 공동 대표발의를 제안했다. 이어 국회 전자서명시스템에 해당 개정안을 등록하고 동료 의원들의 서명을 받고 있다.
서 의원은 “이러한 문제의식 자체는 학창시절부터 수없이 겪었던 내용”이라며 “서로 다른 여건의 사람들에게 기계적으로 동등한 환경을 제공하는 것은 곧 차별”이라고 말했다.
지난 18일 서 의원의 의정활동 하루 동행을 위해 찾은 국회 의원회관 사무실에선 기계 음성이 계속해서 흘러나왔다. “차별적 위치에 놓인 집단을” “최우선으로 지원하는 것이” 등 어절 단위로 나누어진 문장이 통상 대화보다 배 이상 빠른 속도로 재생됐다. 서 의원은 문구를 되뇌며 “미리 외워 놓지 않으면 현장에서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고 말했다.
오전 8시50분. 서 의원은 선임비서관의 팔꿈치를 잡고 사무실을 나섰다. 당정책조정회의와 의원총회, 토론회로 이어지는 일정이었다. 서 의원이 움직일 때마다 보좌진이 자리를 안내하고 이어폰과 마이크 등 장비를 세팅했다. 이어 회의 진행자가 누구이고 옆자리에 누가 앉았는지 알려줬다. 30년 가까이 남편이 맡았던 화장도 지금은 보좌진이 돕는다고 한다.
밀착 보좌 속에서도 사고 위기는 수시로 찾아왔다. 서 의원은 이날 의총장에서 다른 의원이 내민 손을 잡으려다 계단에서 넘어질 뻔했다. 의원회관으로 돌아가는 차량 안에선 조수석 머리받이에 부딪혔다. 최근 본회의 때는 전자식 표결 버튼에 불이 들어온 것을 놓쳐 기권표를 던질 뻔했다고 한다.
서 의원은 중학교 때 망막색소변성증으로 시력을 잃었다. 낮과 밤만 분간할 정도의 중증 시각장애였는데 점자는 배우지 못했다. 특수학교가 아닌 일반 공립학교를 다녔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모든 일은 ‘시간과의 싸움’이었다. 학창시절에는 시험기간마다 곤욕을 치렀다. 먼저 시험을 마친 친구가 문제를 읽어주면 그제서야 답안지를 작성할 수 있었다. 종이 울리고 쉬는 시간까지 써내려가도 늘 시간이 모자랐다.
그로부터 40여년이 지나 국회의원이 된 지금도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서 의원은 아침 8시 전에 출근해 밤늦게 퇴근하고 점심 식사는 중요한 약속이 아니면 회관 사무실에서 해결하며 시간을 번다.
서 의원에게 ‘국회 환경이 장애 의원의 의정활동에 얼마나 친화적인지 점수를 매겨 달라’고 했다. 그러자 “100점 만점에 20점”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실제로 필요한 지원은 사람마다 다른데 사회는 장애인을 집단화해 바라본다는 것이다. 그는 “저 같은 유형의 시각장애인이 국회에 처음 들어왔으니 그런 것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그러면서 22대 총선 전인 지난 3월 더불어민주연합의 ‘국민후보 오디션’ 때도 예산 문제로 수어 통역을 제공하지 않겠다고 해 항의하는 일이 있었다고 덧붙였다.
서 의원은 이날 8·18 전당대회준비위원회 토론회에서 민주당 강령에 장애인 등 사회적 소수자에 관한 구체적인 정책 방향을 담아야 한다고 제안했다. 그는 “가장 차별적인 위치에 놓인 집단을 최우선으로 지원하는 것이 결국 한국 사회 전체의 삶의 질을 높이는 길”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시혜적 관점의 ‘장애인복지법’에서 벗어나 기본권을 중시하는 ‘장애인권리보장법’으로의 인식 전환이 필요하다고 힘줘 말했다.
서 의원은 하루 일정을 마무리하며 이렇게 말했다. “소수인 장애인을 계속 ‘없는 사람’ 취급해선 한국 사회가 행복할 수 없어요. 불평등과 양극화에 따라 갈등이 심화되니 세상이 시끄러워지는 거거든요. 적극적으로 중재하고 해결하기 위해 법과 제도를 만드는 것, 그것이 정치의 몫입니다.”
송경모 기자 sso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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