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춘추] 국정원은 왜 그랬을까
한·미 정보당국 간 불협화음
드러낸 ‘수미 테리’ 기소 사건
이번 일 계기로 정보수집 활동
전반에 대한 총체적 점검 필요
시대 맞는 새 매뉴얼 만들어야
근년에 우리가 해외에서 얻은 정보 가운데 국익에 큰 도움을 준 것 중 하나는 일본의 수출 규제 관련 정보일 듯하다.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는 2019년 8월 한국에 대한 반도체 소재 수출 규제를 발표했다. 그런데 의외로 우리 기업들이 잘 대응했는데 그 배경엔 사전에 해외에서 얻은 고급 정보가 있었다.
최근 문재인 전 대통령은 회고록에서 이 사연을 처음 공개했다. 책에 따르면 수출 규제 관련 첫 정보는 일본의 발표 8개월 전인 2018년 12월에 얻어졌다. 당시 노영민 주중대사가 중국에 나와 있는 일본 경제계 인사한테 들은 정보였는데, 일본이 반도체 소재 수출을 금지하는 걸 검토 중이란 내용이었다. 노 대사가 이를 놓치지 않고 3개 품목 리스트까지 꼼꼼히 적어 본국에 보고했다. 당시로선 불확실한 정보였지만 정부는 만일에 대비해 기업들에게 이를 전파해 재고 확보에 신경 쓰라고 당부했다.
그런데 2019년 2월 이번엔 문정인 외교안보특보가 일본에서 자민당 고위 인사를 만나 들은 얘기라며 역시 같은 보고를 했다. 노 대사가 보고한 3개 리스트까지 일치했다. 정부와 기업들은 이때부터 대체 수입처 확보 등 본격적인 대책 마련에 나섰다. 이 덕분에 6개월 뒤 수출 규제가 발표됐지만 기업들은 이미 재고를 많이 확보한 상태였고, 불화수소 자립화에도 성공했다. 노 대사와 문 특보 모두 무슨 대가를 주고 얻은 정보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정보를 캐자고 작심해서 달려들어 얻은 것도 아니다. 외국 인사들과 자연스러운 교류를 통해 얻은 정보였다.
주러시아 대사를 지낸 인사한테 미국 외교관들이 주재국에서 ‘감시’를 당하지 않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는지에 대한 일화를 들은 적이 있다. 그가 모스크바에서 근무할 때인데, 당시 주러 미국 대사와 식사 약속을 잡았는데 미국 대사가 만나기로 한 당일 약속시간을 1시간 앞두고 돌연 장소를 바꾸더라는 것이다. 당초 한 레스토랑에서 만나기로 했었는데 다시 잡은 장소에 갔더니 룸도 없는 시끌벅적한 일반 대중식당이었다. 너무 시끄러워 대화가 잘 안 들릴 정도였다고 한다. 러시아 정보기관이 늘 미국 대사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기에 장소를 바꾸고, 바꾼 장소조차 도청이 어려운 곳을 고른 것이다.
정보기관의 타국 요원들에 대한 활동 감시는 사이버 공간에서도 활발하다고 한다. 가령 A국이 B국 정부의 서버를 한창 해킹하고 있는데 C국이 뒤늦게 B국을 해킹하러 동시간대에 서버로 진입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A국은 도대체 C국이 어떤 나라인지, 또 이들의 해킹 실력은 어떤지를 파악하려고 일부러 미리 캐낸 A국 정보를 떨어뜨려 정보를 잘 챙겨가는지, 또 어디로 가져가는지를 감시한다는 것이다.
이런 정보전(戰) 뒷얘기를 접해오다 최근 수미 테리 미국외교협회 선임연구원 사건을 마주하고선 말문이 막혔다. 주미대사관 소속 국가정보원 인사가 테리에게 명품백을 사주고 레스토랑에서 같이 식사하는 모습과 차 안에서 테리의 메모를 휴대폰으로 찍은 장면이 고스란히 미 정보당국에 들킨 것이다.
정보 커뮤니티가 돌아가는 사정에 밝은 한 인사는 이 일이 왜 이렇게까지 커졌는지 이해가 안 된다는 반응이다. 한·미 정보당국은 자국에서 활동하는 상대국 요원을 어지간히 파악하고 있고, 간혹 너무 노골적으로 정보를 수집할 땐 ‘경고 사인’도 준다고 한다. 어떤 땐 ‘그 요원은 활동이 너무 튄다. 좀 빼 달라’고 요구할 때도 있고, 그런 경고를 받으면 요원을 귀국시키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미국이 이번 일을 공개적으로 터뜨려 국정원을 망신시켰으니 이상할 수밖에 없다. 이는 한·미 정보당국 간 소통이 원활하지 않기 때문에 빚어졌을 개연성이 높다. 아울러 동맹인 미국조차 불쾌할 정도로 ‘너무 튀게’ 정보활동을 해온 게 아닌지, 명품백 매장에서 카드로 결제해 누군지 흔적을 남길 정도로 정보 수집의 ABC가 안 지켜지고 있는 건 아닌지도 의심된다. ‘대가’나 ‘선물’ 등의 구식 관행에 지나치게 의존해 왔을 수도 있다.
정부는 이번 일을 계기로 국정원이나 외교부 등의 정보 수집 활동 전반을 총체적으로 재점검할 필요가 있다. 정보 수집 방식과 매너, 요원의 자질, 정보비(특수활동비) 지출 관행, 정보 협력자 보호 실태, 해외 기관과의 소통 수준 등을 모두 살펴서 시대에 걸맞은 새로운 활동 매뉴얼을 속히 만들어야 한다.
손병호 논설위원 bhso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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