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시론] “누가 이 초고를 모르시나요”
전체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본문 보기를 권장합니다.
본래 원고는 처음부터 끝까지 일사천리로 완성되지 않는 법.
아무리 걸작이라도 초고(草稿)가 따로 있다.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도 일단 초고를 완성한 그때부터 또 다른 승부가 시작된다고, 바로 거기서부터가 시간을 들일 만한 보람이 있는 신나는 부분이라고 고백한다.
작가 스스로 초고를 버렸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본래 원고는 처음부터 끝까지 일사천리로 완성되지 않는 법. 위대한 작품일수록 그런 일은 드물다. 아무리 걸작이라도 초고(草稿)가 따로 있다.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도 일단 초고를 완성한 그때부터 또 다른 승부가 시작된다고, 바로 거기서부터가 시간을 들일 만한 보람이 있는 신나는 부분이라고 고백한다. 그런데 고쳐쓰기에서 빠질 수 없는 과정이 있다. 그것은 한 차례의 긴 휴식을 갖는 일이다. 하지만 단순한 휴가는 아니다. “덜 말라서 무른 것, 고르게 배어들지 않은 것이 나오지 않도록 하기 위한” 양생(養生)의 기간이다.
그런데 고쳐쓰기 중에는 초고가 거의 해체되다시피 하는 경우도 있다. 작가 스스로 초고를 버렸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최근 뉴욕타임스가 선정한 ‘21세기 100대 도서’에 포함된 이민진의 ‘파친코’가 그랬다. 뉴스를 들으면서 문득 그녀의 초고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궁금해졌다. 초고의 비애를 알고 있어서다. 본래 그녀는 대학 3학년 시절 자살로 생을 마친 13세 재일한국인 소년의 실화를 바탕으로 오랜 시간 공들여 쓴 초고가 있었다. 하지만 그 초고를 출간할 수는 없었다고 한다. 초고가 화가 잔뜩 나 있는 얼굴을 하고 있어서였다. 성난 사람과 굳이 시간을 들여 만나고 싶은 독자가 있을까. 고민하던 작가는 초고 뭉치 중 한 챕터만 남기고 모두 버리고 새로 쓰기 시작했다. 신기하게도 작은 이야기의 자투리 정도였던 초고 조각은 거대한 서사를 담은 마중물이 되었다.
하루키나 이민진처럼 이야기를 써가는 작가는 초벌 원고 뭉치를 넣어둔 서랍이 갖는 역할과 함의를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얼마간은 태연자약하게 지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고무줄에 동그랗게 말린 채로, 혹은 누런 폴더에 끼인 채로 캄캄한 서랍 속에 아무런 기약도 없이 갇힌 원고 뭉치의 입장은 어떨까. 다락방 서랍은 그냥 서랍이 아닐 것이다. 막막한 광야가 따로 없다. 서랍 속 원고 뭉치는 토이 스토리 인형들처럼 주인이 나를 영원히 잊어버리면 어쩌나 한숨만 나오지 않을까.
원고 뭉치의 탄식은 하나님이 나를 버리신 건 아닐까 한탄하던 시편 기자의 기도와 다를 바 없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시 22:1) 서랍 속 원고 뭉치는 시인 T S 엘리엇처럼 “나는 말도 못 하고 눈도 안 보여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니었다”고 푸념할 것이다. 하지만 선지자 이사야가 하나님은 화살통 속 화살을 잊지 않으신다고 알려주듯(사 49:2) 작가도 서랍에 있는 자기 원고를 한순간도 잊지 않는 법이다. 딴청 부리는 것 같아도 늘 고심하고 있게 마련이다. 언젠가 서랍을 열고 다시 쓰기 시작할 때면 고민했던 부분만 집중적으로 고쳐나가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구약도 알고 보면 작가이신 하나님의 아이디어가 담긴 처음 원고 뭉치와 같지 않을까. 마지막 챕터인 말라기 이후 400년 동안 서랍에 처박혀 있다가, 하나님께 버림받은 십자가라는 또 하나의 서랍 속 시절을 고스란히 거친 주님을 통해 새로 쓰인 신약으로 완성됐다.
‘침묵’의 작가 엔도 슈사쿠의 말처럼 우리 주님은 인생의 어떤 초고라도 버리지 않으시는 분이다. 냄새가 나고 추해도, 더러워도 끝까지 버리지 않으시는 주님은 내 삶의 어떤 조악한 초고와 같은 시절도 버리지 않으신다. 그분이 계획하신 완성된 원고를 위해 소중하게 사용하신다. 바야흐로 휴가의 계절이다. 서랍 속 초고 뭉치가 문장 사이 어딘가 스며들어 있을, 아끼는 고전 한 권 들고 훌쩍 떠나 보는 것은 어떨까.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마 5:17)
송용원 (장로회신학대학교 교수·조직신학)
GoodNews paper ⓒ 국민일보(www.kmib.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Copyright © 국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단독] 김여사 “대통령, ‘디올백’ 서울의소리 취재로 알았다”
- 칼부림 현장서 도망간 경찰관 “내가 대신 찔렸어야 했느냐”
- “내 거 아니면 다 죽어”… ‘교제살인’ 김레아, 모두 녹음됐다
- 위메프 대표 “현장서 700건 환불 완료…큐텐 대표 한국에 있다”
- “직원 4명, 적자 7억”…홍진영 회사, 상장 추진에 시끌
- “170만원 여름휴가 날렸다”… ‘티몬 사태’ 소비자 울분
- 2PM 닉쿤 여동생 “전 남편에 가정폭력 당해” 고소
- 쯔양 협박 의혹 변호사 수사 착수… “이씨가 한 것” 반박
- “본사 가구라도 훔쳐라”… 티몬 사태에 자구책까지 등장
- 배우 강경준, 사실상 불륜 인정 “내 부덕함 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