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시평] 국민은 항상 옳은가?

2024. 7. 26. 0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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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세정 서울대 물리천문학부 명예교수·전 총장

윤석열 대통령은 작년 10월 서울 강서구청장 보궐선거에서 여당이 패배했을 때 “국민은 늘 무조건 옳다. 어떠한 비판에도 변명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올해 4월의 총선 참패 이후에도 “총선에서 나타난 국민의 뜻을 겸허히 받들어 국정을 쇄신하겠다”고 하였다. 선거 결과에 승복하고 민심을 살피겠다는 뜻을 나타낸 것으로 이해되고, 민주국가의 정치인으로서 바람직한 태도라고 생각된다. 선거로 대표자를 결정하는 것은 국민의 권리이고, 그 결과를 오롯이 감당하는 사람들은 국민이라는 점에서 국민의 선택은 존중받아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연 “국민은 항상 옳은가”라는 명제는 따져볼 필요가 있다.

「 “국민 항상 옳다” 명제 따져볼 필요
선거 승리한 당도 과반 지지 안 돼
‘민의’ 표방한 일방 독주 자제해야
세계사적 대전환 힘 합쳐 대비해야

선거는 1인 1표제로 국민의 뜻을 모으는 것이다. 집단지성이 발휘되면 합리적인 결과가 도출될 것으로 기대할 수 있다. 그러나 선거 과정에는 여러 불합리한 면들도 있기 때문에 항상 최선의 결과가 나온다는 보장은 없다. 우선 유권자는 자신의 표가 수많은 표 중의 하나일 뿐이라는 생각에 심사숙고하여 책임 있는 결정을 하지 않을 수 있다. 분위기에 휘둘리거나 단순한 감정에 따라 투표하기 쉬운 것이다. 예를 들어 최근 실시된 영국 총선에서는 노동당이 압승하였지만, 여론조사에 의하면 노동당 정책이 좋아서 표를 던진 유권자는 5%에 불과하였고 48%는 보수당을 쫓아내기 위해서라고 답하였다고 한다. 즉 정책을 면밀히 검토하고 투표하기보다는 단순히 현재의 집권세력이 싫어서 상대 당에 투표한 유권자가 많았던 것이다.

영국 왕 찰스 3세(오른쪽)가 5일(현지시간) 런던 버킹엄 궁에서 총선 승리로 차기 총리에 취임할 키어 스타머 노동당 대표와 악수하고 있다. 지난 4일 치러진 총선에서 스타머 대표가 이끄는 노동당은 하원 650석 중 412석을 차지해 14년 만에 정권 교체를 이뤘다. AP=연합뉴스


실제로 역사적으로 보면 선거 결과가 국가에 큰 피해를 준 경우도 많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독일 국민들이 1932년 선거에서 히틀러의 나치당을 제1당으로 만들어 제3제국의 출현을 가능하게 한 일일 것이다. 당시 독일 국민들의 판단은 결국 제2차 세계대전을 불러왔고 독일도 패망하여 매우 어려운 시기를 겪었다. 그 후에도 아르헨티나 등 여러 국가에서 포퓰리스트 정권을 선출하여 국가 발전이 정체 혹은 퇴보하는 일이 일어나고는 하였다.

이처럼 선거로 나타나는 국민의 판단에 오류가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선거에서 이긴 사람들은 겸허해야 한다. 특히 여론은 시시각각 변하고, 선거에서 이겼더라도 실제로 승리한 정당을 지지한 사람들은 과반수에 훨씬 못 미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지난 4월의 우리나라 총선 결과를 보면 압승을 거둔 더불어민주당의 지역구 총득표율은 50.6%로서 패배한 국민의힘의 득표율 45.1%와 크게 차이 나지 않고, 투표율이 67.0%임을 고려하면 총유권자의 3분의 1 정도인 33.9%만 더불어민주당을 지지한 것으로 나타난다. 2년 전에 있었던 20대 대통령 선거의 경우는 승자와 패자 사이의 득표율 차이가 0.73%포인트에 불과하여 정말로 박빙의 승부였다. 이런 상황에서 승자라고 국민의 절대 신임을 받았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4.10총선 당시 대전시선거관리위원회에서 선거에 사용할 전용 도장을 선보이는 모습. 총선 결과 더불어민주당의 지역구 총득표율은 50.6%, 국민의힘의 득표율은 45.1%를 기록했다. 중앙일보


그런데 총선에서 소선구제 때문에 득표율보다 훨씬 많은 의석을 차지한 야당은 요즘 ‘민의’를 내세우면서 가보지 않았던 길을 가고 있다. 그들이 내세우는 소위 ‘민의’라는 것은 국민의 3분의 1만 지지했는데도 말이다. 또한 2년 전 0.73%포인트 차이로 정권을 잡은 대통령과 행정부는 야당과의 대화와 타협을 거부하고 자기 길만 가려 하는 ‘불통(不通) 정권’이라는 평을 얻고 있다. 사실 민주주의 체제는 여러 허점이 있어서 권력자들이 상호 존중과 절제심을 발휘해야 원활히 굴러간다고 정치학자들은 말하고 있다. 입법부, 행정부, 사법부의 지도자들이 상대방을 무시하고 각자의 권력을 최대한 휘두르려고 하면 여러 마찰음이 생기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한국의 정치 상황은 서로 마주 보는 기관차가 상호 절제 없이 충돌 코스로 질주하는 모습처럼 보여 국민을 불안하게 하고 있다.

사실 정치학을 전공한 것도 아니고 정치 평론가도 아닌 필자가 이런 글을 쓰는 것은 평상시라면 자연스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평상시’가 아니다. 세계정세는 미·중 갈등으로 크게 요동치고 있으며, 인공지능(AI)과 기후변화는 인류 문명을 바꾸고 있다. 모든 나라가 이에 대응하기 위해 골머리를 싸매고 있는데, 우리나라는 여기에 덧붙여 인구 감소와 산업경쟁력 저하라는 위기도 맞고 있다. 우리의 주력산업은 중국과 많이 겹치는데, 중국의 과학기술은 이미 많은 분야에서 세계 최고 수준으로 발전하였기 때문이다(중앙일보 7월 8, 9일자).

이 같은 시점에 온 국가가 힘을 합쳐 대응책을 마련해도 국가의 존망이 위협받을 텐데, 정치권은 패가 갈려 내부 싸움으로 세월 가는 줄 모르니 답답할 따름이다. 요즘 ‘자고 나니 선진국’이라는 말이 유행하는데, 사실 우리나라가 선진국 문턱에 다다른 것은 앞선 세대들의 선견지명과 피나는 노력 때문이었다. 그런데 지금 우리 세대는 후손들을 위해 무슨 노력을 하고 있나. 사회 지도층은 제 역할을 하고 있는가.

오세정 서울대 물리천문학부 명예교수·전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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