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숙인의 조선가족실록] 겉도는 남편에 치솟는 비통함, 240수 시로 달래
외롭고 꼿꼿했던 김호연재의 삶
고택은 축제 분위기, 시는 상처 가득
이 고택을 중심으로 ‘김호연재 여성문화축제’와 ‘호연재 여성휘호대회’ 등 다양한 문화행사가 열리고 있어 송씨 집 아들 소대헌보다 며느리 김호연재를 통한 문화 유적이 되었다. 그런데 호연재는 고택의 축제 분위기와는 달리 외로움과 그리움, 상처 가득한 마음 풍경을 담아낸 조선 후기의 시인으로 알려져 있다. 한시와 한글 시를 합쳐 240여 수의 작품을 남겼는데, 살기 위해 시를 쓴 것이다. 김호연재, 그녀는 과연 어떤 문제를 안고 어떻게 살다 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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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론 두 세도가 결혼 화려했지만
“나는 규중의 물건, 날개가 없다”
“부모 욕 끼칠까 자나깨나 걱정”
혼인 10년 평가한 글에서 자책도
집안 자제 가르치며 말년에 생기
아내 죽자 재혼 남편 83세 천수
」
우선 호연재는 친가·외가·시가의 세 가계 모두 눈이 부실만큼 화려하다. 아버지 김성달은 선원 김상용(1561~1637)의 증손이고, 어머니 이옥재(李玉齋)는 월사 이정구(1564~1635)의 증손녀이자 월당 강석기(1580~1643)의 외손녀다. 소현세자빈 강씨는 어머니 이옥재의 이모다. 따라서 김호연재와 송요화의 혼인은 조선 후기 대표적인 두 세도가 장동(안동) 김씨와 은진 송씨의 결합이면서 종횡으로 연결된 노론 세가(世家)의 확장과 결속을 의미했다. 호연재는 19살에 오두리(홍성군 갈산면) 장동 김씨 가에서 300리 길의 회덕 송촌(대전시 대덕구)의 은진 송씨 가로 혼인해 갔다. 사실 명문 세도가에서 차출된 남녀라고 해서 행복한 부부로 산다는 보장은 없다.
20대의 호연재는 외로웠다. 남편 송요화가 늘 밖으로만 돌았고 둘은 아예 등을 지고 살았다. 호연재는 종일토록 찾아오는 사람 없는(終日無人到) 집에서 그 긴긴 외로움의 시간을 달래야 했다. “꿈속에 마음을 실어 고향으로 돌아가니, 강엔 노을 안개 자욱하고 물은 부질없이 물결치네. 어촌은 적막하고 봄빛도 저무는데 저 멀리 높은 집이 나의 집이로구나.”(‘몽귀행(夢歸行)’) 마음은 늘 형제들과 시를 짓고 놀던 오두리 집에 가 있었다.
호연재 친부모 평생 다정
호연재의 친정은 독특한 가족문화를 가지고 있었다. 아버지 김성달과 어머니 이옥재는 시로써 소통하며 시로써 서로를 격려하는 부부였다. 내기 바둑에서 진 사람이 시를 지어 올리는 놀이를 즐기던 부부, 서로 주고받은 시가 무려 250여 수에 달했다. “다시 세세토록 부부 되어 다음 생에도 복록 누리며 편안하기를” 다짐한 이 부부의 시는 『안동세고』에 실려있다. 한편 여덟 번째 호연재를 비롯한 그들의 자녀 5남 4녀도 시에 능하여 『연주록(聯珠錄)』이라는 공동 시집을 내기도 했다(문희순, ‘17세기 여성 시인 이옥재의 삶과 문학’). 오두리 친정에서 형제들과 보낸 행복한 기억들이 절대 고독의 호연재를 버티게 해 준 힘이었던 것 같다. “이 아우는 규중의 물건으로 빈 골짝에서 문을 닫고 지내고 몸에 양 날개 없으니 어찌 신선이 사는 산에 이를 수 있으리오. 한 조각 마음은 나날이 아득하고 귀향을 꿈꾸며 홀로 서성이는데 아득한 회포 금할 길 없어 편지를 부쳐 속내를 토로한다오.” 시를 쓰고 편지를 쓰는 일이 호연재에게는 상처를 치유하며 자기 존엄을 회복해 가는 과정이었던 셈이다. 그녀는 혼인 9년 만에 첫 아이를 얻는다.
많은 시를 남긴 호연재지만 남편과 수창(酬唱, 서로 주고받으며 부름)한 시는 한 편도 없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아들 익흠의 ‘유사(遺事)’에는 “가군(家君)은 할머니를 모시느라 서울이나 백부의 임소에서 지내시고 항상 집에 계시지 않았다”고 했다. 외손자 김종걸은 “외조부는 젊을 때 호방하여 법도를 생각하지 않으셨고, 외조모는 고결한 뜻을 품은 채 마음으로 숨은 근심이 있어 글 중에 종종 비통한 심정을 묘사하셨다”라고 했다. 호연재 자신도 남편에 대한 마음을 단호하게 끊어버리기로 한다. “부부의 은의가 비록 중하지만 저가 나를 저버리기를 심하게 하니, 어찌 나 홀로 구구한 정을 지녀 스스로 주위 사람의 비웃음과 경멸을 받아야 하느냐?”(‘자경편(自警編)’). 호연재는 부부가 서로 사랑하는가 아닌가에 따라 시가와의 관계가 정해지는 것이라 사실 자신의 시집 생활은 엉망이었다고 한다. 외손자는 이를 두고 “이성(異姓)이 서로 모여 신맛 짠맛이 같지 않은 것이 많았다”고 표현했다.
호연재는 혼인 생활 10년을 평가한 글을 남기는데, 그 내용은 이러하다. “자모의 사랑스러운 가르침을 받지 못해 부인의 행실 대강도 알지 못했다. 부모를 일찍 여윈 나를 형들이 외람되이 명문 가문에 맡기어 출가한 것이 이제 10여 년이 되었다. 시부모 봉양이 천박하고 남편 대우가 예모에 어긋났으며 종들을 부리되 상벌이 분명치 못했다. 진퇴와 주선(周旋, 일이 잘되도록 여러 방면으로 힘씀)의 모든 행실이 규범에 어긋났고 사람과 사물을 대할 때도 예의를 알지 못해 사람들의 원망이 나에게 몰렸다. 과실을 자초한 것으로 인해 아래로는 나 자신이 위태로웠고, 위로는 부모에게 욕을 끼쳐드려 자나 깨나 걱정하고 두려워하느라 하루도 편치 못했다.”(‘자경편’)
호연재의 고백을 보면 평생토록 시속의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했고, 지체 높은 시집 사람들과도 껄끄러운 것이 너무 많았다. 그는 시집 식구란 명목상 친(親)이지만 정은 소원하고, 은혜는 박하지만 의리는 무거운 존재들이라고 한다. 좋으면 좋겠으나 그렇지 못하더라도 끊어버릴 수 없는 관계다. 개선을 위해 노력은 하되 “속마음을 드러내지 말 것”을 스스로에게 주문한다. 눈썹을 내리고 조심하며 사는 동안 연기와 불꽃이 창자 속에서 치솟는 경험을 하며 “화복은 본디 정해져 있는 운명일 뿐 인력(人力)이 아니로다”라고까지 한다.
자신을 ‘규중의 물건(閨中之物)’으로 치부하던 호연재에게 새로운 세계가 열린 것은 30대 중반에 들어서다. 시집과 친정 조카들이 배움을 청해 오기 시작한 것이다. 송명흠은 호연재가 집안 자제들을 가르치던 모습을 글로 남겼다. “13세에 숙모를 알게 되었다. 화락한 담소에 기운이 평온하며 용모가 수려했다. 속세에 얽매이지 않은 깨끗한 성품에 때가 끼지 않았다. 여러 형을 따라 가까이 좌우로 모시고 경서와 사기를 탐구하여 토론하고 시구(詩句)도 일일이 점을 찍으며 평론해주셨다.”(‘종숙모김씨천장제문(從叔母金氏遷葬祭文)’). 호연재 인생 후반의 시에는 이 조카들과의 토론과 놀이로 생기가 넘친다.
42세의 호연재는 죽음을 앞둔 병상에서 아들에게 당부의 글을 남긴다. 아직은 어리지만 남기고 싶은 말이 많았다. 자신의 세상사가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았고, 근심과 가난이 잠시도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이 어미는 귀신의 희롱을 받아 반평생 일신에 차질이 많았다”만 “내 아들에게 오로지 원하는 것은 노력하고 또 노력하는 것”이다. 죽음에 이르러 미움도 원망도 넘어선 그녀에게서 호연(浩然)의 기상이 느껴진다.
남편 재혼한 박씨, 시모가 흡족
호연재(1681~1722)가 세상을 떠난 뒤 남편 송요화는 18세 연하 박씨와 재혼을 한다. 계실 박씨는 호연재와는 다른 방식의 시집살이를 한 것 같다. “박씨 부인은 착하고 다정하며 부공(婦功)에 능하여 어른 말씀에 잘 응대하였다. 시어머니를 효를 다해 섬기고 집안 다스리는 데 조리가 있어 나씨 부인(시어머니)이 매우 흡족해하셨다.”(종숙모박씨묘지명) 부인 박씨는 15년 남짓한 혼인 생활 끝에 자식 없이 3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떴다. 한편 송요화(1682~1764)는 호연재 사후 8년 만에 비로소 관직으로 진출하여 여러 벼슬을 거치고 83세의 수를 누렸다.
300년이라는 세월을 건너온 오늘의 호연재는 대전지역 문화 브랜드가 되어 만인의 사랑을 받고 있다. 여기서 소대헌·호연재 부부를 격조 있고 행복한 삶을 산 모델로 안내하는 고택 행사의 의미를 생각해본다. 후세인의 기대와는 다르게 부부는 남남이었고 호연재는 이 집에서 외롭고 가난한 삶을 살았다. 장소로서의 고택이 문화가 되려면 그 아픈 시간들을 시로서 버텨낸 그 집 주인 호연재의 삶을 함께 기억해야 하지 않을까.
이숙인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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