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지원의 마음상담소] 우울은 한데, 행복하기도 한
우울한 사람들은 문제가 아주 많습니다. 셀 수 없는 문제 중에서도 딱 세 개만 이야기해보고 싶습니다. 정확히는 ‘우울의 원인’을 둘러싼 이야기들입니다. 불면의 밤이 시작되거나 눈물이 멈추지 않거나 누군가를 만나는 일을 생각하기만 해도 질식할 듯 고통스럽거나 더는 뭔가를 맛있게 먹는다는 느낌이 들지 않거나 해야 할 일을 미루기 시작할 때, 분명 내 마음의 기능이 무너져 버렸을 때, 우리는 이 우울의 원인을 찾고자 합니다.
자기 역사에 대해서는 자기만 한 전문가가 없다 보니, 자신만 아는 미로를 끝도 없이 만들기 시작합니다. 그러다 문득, 다른 사람들에게 내 마음의 지도를 모두 이해시키기 어렵다는 생각에 사람들과 거리를 두고 말문을 닫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첫 번째 문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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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울 원인 애써 찾을 필요 없어
‘지금 나 힘들어’ 한마디로 충분
누구나 ‘마음 속 바위’ 안고 살아
함께하면 불행 극복할 힘 생겨
」
우리는 자동차의 시동이 걸리지 않을 때 전문가를 찾아가 자동차의 열역학과 유체역학, 기계 역학적 이론과 가설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시동이 안 걸려’ 그 한마디면 됩니다. 혹은 열이 나고 콧물이 날 때, 친구들에게 내 증상과 관련한 감염학과 면역학, 공중 보건학적 이론과 가설을 설명할 필요도 없습니다. ‘나 아파’ 그 한마디면 됩니다. 그다음부터는 함께 문제의 ‘실질적인’ 해결방법을 찾으면 됩니다. 필요한 약을 먹고, 따뜻한 차를 많이 마시고, 푹 쉬고, 집안의 온도를 높이고 쉬어 가면 됩니다. 이유를 알아내는 것은 분명 중요합니다. 해결의 시작이 됩니다. 그러나 그런 작업은 나와 나의 정신건강 전문가가 하면 될 일입니다. 나의 사람들에게 이해 받기 위해 내 우울의 역사와 병인을 샅샅이 알릴 필요는 없습니다. ‘지금 나 힘들어’ 그 한마디면 영문을 몰라도 함께 머물러 줄 이가 분명 있습니다.
우울한 이들이 자기 우울의 시작과 과정에 대해 누구보다 자주, 오래도록 탐색하는 이유는 우울의 원인을 알면 이를 고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두 번째 문제입니다. 그러나 크게 두 가지 이유로 이는 틀린 이야기입니다. 첫째, 많은 원인은 놀랍게도 바뀌지 않습니다. 사람이든, 과거든, 그게 그렇습니다. 냉정히 말하자면, 고칠 것도 없이 그저 버리고 떠나야 하는 순간이 옵니다. 둘째, 우리의 기억은 그렇게나 대단히 정확하지 않습니다. 정확하지도 않은 과거의 일들에 자꾸 마이크를 갖다 대지 마세요. 걔는 또 아무 얘기나 합니다.
어느 정도 우울의 원인을 가족에서, 과거 또래 관계에서, 나의 실패에서 찾았다면, 이제 그다음으로 넘어가세요. 지금 내가 할 수 있고 내가 하고 싶은 일들에 마이크를 갖다 대세요. 우울의 원인은 거기 있으라고 두고, 행복과 충만감과 연결감의 원인을 늘려나가세요. 그렇게 당신은 어딘가 우울하지만 어쩌다보니 행복한 사람이 되어 갑니다.
우울에 잠겨 있을 때는 다른 사람들 역시 큰 짐을 지고 살아가고 있다고 짐작하기 어렵습니다. 다른 이들은 내가 겪은 일을 겪지 않았으니 나를 제외한 사람들은 늘 연결되어 있고 어두운 구석 없이 잘 지낼 것이라 짐작합니다. 이것이 세 번째 문제입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누구나 어쩌지 못할 바위가 마음 안에 있습니다.
발달정신병리학 수업에서 동일결과성(equifinality) 개념을 설명할 때면, 불행한 가정은 각자 저마다의 다른 이유로 불행하다는 톨스토이의 문장을 들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동일결과성에 대한 가장 적확한 표현일 것입니다. 다 같은 ‘우울’로 묶여 있는 천 명이 있대도, 그들 중 정확히 같은 이유로 우울한 이는 없습니다. 더욱이 뚜렷한 이유도 없이 밑도 끝도 없이 찾아오는 내인성 우울을 가진 분들도 있습니다. 생물적 특성이 원인이며 때론 아무런 역경도 없이 이런 우울이 찾아오기에 사람들은 그이가 우울할 거라 짐작할 수도 없습니다. 각자의 바위를 지고 그렇게 살고들 있습니다.
많은 분이 심리치료 장면에서 깨닫게 되는 사실이 있습니다. 나의 ‘모든 모습’을 사랑해주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 언젠가 내 우울의 원인을 내가 ‘극복’해 내리라는 것? 아닙니다. 그저 대부분의 사람이 원래 그렇게 생을 버티며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를 심리학에서는 ‘고통의 정상화(normalizing suffering)’라 합니다. 고통의 정상화는, ‘다들 그렇게 살아, 혼자 유난 떨지 말고 그냥 참고 살아’가 아닙니다. ‘우리가 다 원래 좀 그래. 그러니까 그냥 같이 있어’입니다. 외롭게 불행해 말아요. 같이 불행해 해요. 서로 같이 짠해서 함께 머무르다 보면 각자의 비극을 두고 농담할 기운도 좀 생깁니다.
이런 문제들 역시, 정상입니다. 우울은 한데, 행복하기도 한, 나만의 기이한 삶의 방식을 발견하세요. 오늘 적히는, 당신 우울의 역사입니다.
허지원 고려대 심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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