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편 밀수 가담·中 상대 간첩활동?…한국 최초 선교사가 받은 오해

임보혁 2024. 7. 25. 21:41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보령시 교계·루터회, 제3회 귀츨라프 학술세미나 개최
“오히려 아편 중독자 치료 나서며 아편에 반대”·“선교 밖에 몰랐던 열정의 선교사” 반론
보령기독교역사문화선교사업회가 25일 저녁 충남 보령시 대천중앙장로교회에서 연 ‘제3회 귀츨라프 학술세미나’ 모습. 보령기독교역사문화선교사업회 제공

“아편 밀수에 가담한 선교사다.” “영국 정부를 위해 중국에서 간첩 활동을 했다.”

1832년 한국에 온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인 칼 귀츨라프(1803~1851)를 두고 일각에서 제기한 오해들이다. 이 같은 오해를 바로잡고, 귀츨라프의 선교사적 의미를 짚어보는 세미나가 열렸다.

사단법인 보령기독교역사문화선교사업회는 25일 저녁 충남 보령시 대천중앙장로교회(최태순 목사)에서 ‘제3회 귀츨라프 학술세미나’를 진행했다. 보령시기독교연합회, 기독교한국루터회가 후원했다.

칼 귀츨라프 선교사의 초상화. 국민일보DB

독일 루터교 목사로 의사이기도 했던 귀츨라프는 주기도문을 우리말로 번역했고, 당시 한국인들에게 처음으로 감자 재배법을 가르쳐준 인물로 잘 알려져 있다. 또 중국 내지선교에도 큰 관심을 두고 집중적으로 선교했다. 그런 귀츨라프는 중국 역사학자 등으로부터 몇 가지 오해를 받는다.

먼저 아편 선(船)에 탑승했고 아편 밀수에 가담해 5만3000파운드 상당의 순이익을 얻었다는 오해다. 이를 두고 이날 세미나에서 주제 발표에 나선 권평 평택대 역사학과 교수는 “귀츨라프가 활동한 시대는 아편전쟁이 일어난 시대였고, 중국으로의 이동과 선교지 개척을 위해선 아편 선이나 군함에 의존해야 했다”며 “귀츨라프는 1차 항해에서 배에 같이 탄 선원들이 대부분 아편을 피우는 것을 보고 매우 못마땅하게 생각했고, 정박지에선 아편 중독을 치료하는 의술을 베풀기도 했다”고 일축했다.

또 다른 오해는 중국의 국방 정보 등을 서방에 넘겨주는 등 간첩 활동을 하며 서구의 상업·제국주의 팽창에 동참했다는 부분이다. 당시 귀츨라프가 영국 동인도회사나 영국 정부의 통역관으로 일하며 가는 곳마다 중국의 지리 정보와 지역 특징, 청나라 군대의 해안지역 방어 체계 등을 상세히 관찰하며 기록했기 때문이다. 이에 권 교수는 “무역과 같이 국가 간의 자유로운 교류와 교역을 청원하기 위한 목적었지 중국의 기록처럼 간첩행위를 하기 위한 목적은 아니었을 것으로 여겨진다”고 주장했다.

기독교한국루터회 칼 귀츨라프 연구위원회 위원장으로 이날 권 교수의 발표를 논찬한 최태성 목사 역시 “귀츨라프가 당시 중국에 거주하며 죽음을 무릅쓰고라도 선교할 수 있는 단 하나의 방법은 동인도회사 같은 서구 열강의 상업회사 직원이 되는 것밖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고 봤다.

오직 선교만 생각했던 귀츨라프가 중국에 대해 더 알고자 자유롭게 여행하기 위해서는 서구 열강의 회사 직원으로 일하며 상업용 배를 탈 수밖에 없었음을 고려해야 한다는 취지다. 또 시급한 선교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서 서구 회사에서 일할 수밖에 없었던 현실적인 문제도 있었다. 무엇보다 귀츨라프를 향한 중국의 부정적인 평가는 당시 기독교를 ‘인민의 아편’이라 부르며 박해하고, 선교사들의 좋은 행적보다는 악의적인 자료만 갖고 선교사들을 제국주의 앞잡이로 몰아간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고려할 필요도 있다고 했다.

세미나 모습. 보령기독교역사문화선교사업회 제공

전문가들은 귀츨라프를 향한 평가가 엇갈리지만, 그가 어떤 마음으로, 어떤 선교적 정체성을 갖고 중국선교에 임했는지를 깊이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제언한다.

권 교수는 “귀츨라프는 무엇보다 선교에서 가장 중요한, 언어에서 천재적인 면모를 가졌고 중국의 복음화를 위해 언제든 죽을 수 있다는 열정과 하나님의 부르심에 언제든 응답하겠는 뜨거운 신앙을 가졌다”며 “자신이 익힌 의술을 통해 사람들과도 좋은 관계를 잘 맺어나갔다”고 전했다. 최 목사도 “귀츨라프는 복한회라 불리는 중국인들로 구성된 기독교연합을 운영했는데 이는 본토 중국에 성경을 배포하고 가르치는 일을 목적으로 한, 중국선교를 중국인이 담당한다는 토착화 선교의 시초라 할 수 있다”고 평가했다.

최 목사는 또 귀츨라프가 중국에서 근대 교육과 고아 돌봄 사역을 펼쳤고, 중국인 스스로 자립해 내지선교를 담당할 수 있도록 도우며 토착화 선교에 앞장섰던 점 등을 들며 “복음을 한 번도 접하지 못한, 많은 믿지 않는 이들에 대한 영혼 구원의 열정에 사로잡혀 있었던 인물이다”고 밝혔다. 이어 “우리나라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로 내한해 박해의 위험을 무릅쓰고 전도 서적을 주민들에게 나누고, 복음을 전한 귀한 선교사역들에 대한 정당한 평가가 이뤄지기를 바란다”고 덧붙였다.

임보혁 기자 bossem@kmib.co.kr

GoodNews paper ⓒ 국민일보(www.kmib.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Copyright © 국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