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워K-우먼]미혼모 돕다가 교도소, 보육원까지…1만명의 기적

서믿음 2024. 7. 25.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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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미 심리상담가(47)는 다양한 이름으로 불린다.

정신의학계의 거장 이시형 박사와 함께 이끄는 한국의미치료학회에서는 부회장으로, 한양대학교 대학원에선 교수로 불린다.

박상미 힐링캠퍼스 더공감 학장은심리상담가이자 문화심리학자다.

현재 한양대학교 일반대학원 협동과정 교수, 한국의미치료학회 부회장 및 수련감독, 심리치료 교육기관 '힐링캠퍼스 더공감' 학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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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랑 끝 아이들, 믿어주는 한 사람만 있었더라면
불행의 고리 끊기 위해 곳곳에 선행 고리 연결
"극단적 선택 실패…덕분에 1만명 도울 수 있어"
'더공감 센터' 자립청년들의 '외갓집' 존재 됐으면

박상미 심리상담가(47)는 다양한 이름으로 불린다. 정신의학계의 거장 이시형 박사와 함께 이끄는 한국의미치료학회에서는 부회장으로, 한양대학교 대학원에선 교수로 불린다. 심리상담교육센터 힐링캠퍼스 더공감에선 학장이다. 교도소 심리상담을 받는 재소자들에게는 "살찐 이영애"란 애칭으로, 보육원 출신의 자립 청년들에게 ‘쌤(선생님)’이라 불린다. 이런 배경에 그의 거침 없는 성향이 자리한다. 마음만 동한다면 그는 "하고 싶다는 건 곧 할 수 있다는 것"이란 생각으로 밀어붙인다.

13년 전 시작한 재소자 심리치료상담은 독일에서의 우연한 만남에서 비롯했다. 유학 간 독일에서 만난 한국계 입양인 친구의 친엄마 찾기를 도왔던 것. 출생 당시 친엄마가 17세 미혼모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미혼모들을 돕기 시작했다. "미혼모를 잘 도우면 내 친구 같은 아이가 안 생기겠지"라는 생각이었다. 그러다 문득 "아빠들은 어디서 뭘 하고 있을까"라는 궁금증이 일었다. 수소문해 보니 상당수가 교도소에 수감 중이었다. 그렇게 재소자 상담을 시작했다. 그런데 그들과 대화해보니 의외로 보육원이나 소년원 출신이 많았다. ‘믿어주는 한 사람만 있었어도 현실은 달랐을 텐데’라는 생각에 안타까웠다. 이후 그들에게 ‘믿어주는 한 사람’이 되기 위해 십수 년을 고군분투했고, 최근엔 심리상담가 양성을 통해 자신 이외의 ‘한 사람’들을 세우는 데에도 힘쓰고 있다.

지난 17일 서울 서초동 소재 ‘힐링캠퍼스 더 공감’에서 박상미 학장을 마주했다.

박상미 힐링캠퍼스 더공감 학장이 서울 서초구 힐링캠퍼스 더공감에서 아시아경제와 인터뷰하고 있다. 사진=허영한 기자 younghan@

- 방송인, 유튜버, 작가, 강연가, 교육가 등 다양하게 불린다. 개인적으로 무엇에 중점을 두나.

▲내게 직(職)은 학교에서 학생을 가르치는 것이고, 업(業)은 죽는 날까지 심리상담사로 사는 것이다. 세상에 정말 경제적으로, 환경적으로 힘들어서 (상담)치료받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그들을 돕는 게 제 업이다. 쉬지 않고 방송하고 책 써서 번 돈으로 치료받고 싶어도 못 받는 사람들을 돕는 데서 기쁨을 느낀다.

- 특히 소년원 청소년이나 보육원을 나온 자립청년들을 돌보는 데 힘쓴다고 들었다.

▲미혼모와 재소자 심리지원을 하면서 불행의 근원을 탐색해 보니 어린 시절의 불우한 환경 탓이 크더라. 어린 시절 따뜻한 지지를 못 받은 경우가 많았고 특히 보육원 출신이 많았다. 보육원에서 방황하다 나쁜 형, 누나와 친해져서 소년원 가고 다시 교도소로 건너가는 경우가 빈번했다. 제가 내린 결론은 "믿어주는 한 사람만 있어도 무너지지 않는다"이다.

- 자립청년들의 삶의 모습은 대체로 어떠한가.

▲보육원 아이들은 만 18세가 되면 자립청년이란 이름으로 세상에 나온다. 근데 믿고 의지할 사람이 없으니 노숙하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는 비율이 매우 높다. 보육원을 나올 때 1000만원 정도 지원금을 받는데 대개는 사기를 많이 당한다. 누가 조금만 정을 줘도 쉽게 믿어 버린다.

- 어떻게 지원하나.

▲지난해에는 ‘더공감 센터’에서 두 명씩 데리고 살기도 했다. 인원별로 최소 한 달, 최장 두 달이다. 노숙과 정신병원을 반복해서 오가는 아이들을 우선한다. 근데 크게 상처받은 마음은 회복되는 데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린다. 한두 명 데리고 산다고 될 일이 아니더라. 예방이 중요하다는 생각에 지난해부터 전국보육원 청소년 대상으로 자립캠프를 열고 있다. 부모가 있었다면 당연히 알려줬을 것들을 가르친다. 2박3일간 공과금고지서 보는 법, 알바·집 계약서 쓰는 법, 우연히 범죄에 연루되었을 때 대처법, 누가 휴대폰 개통한다고 명의 빌려달라고 할 때 대처법 등을 세세하게 알려준다.

- 효과가 큰가.

▲처음에는 ‘도대체 이런 걸 왜 하나’ 하는 태도를 보인다. 근데 집에 갈 때면 "나도 부모가 있었다면 이런 걸 배웠을 텐데" 하면서 울면서 간다. 지난해만 한 번에 50명씩 5번을 했다. 헤어질 때면 단체 카톡방을 만든다. 정말 괴롭고 죽고 싶을 때 여기에 소식을 남기라고 한다. 그럼 실제로 약 먹고 입에 거품을 문 상태로도 연락이 온다. 아이들은 센터를 ‘외갓집’이라고 부른다. 명절처럼 가족이 없어 외로운 날에는 모두가 센터에 모여 음식을 함께 만들고, 치우며 시간을 보낸다. 다행히도 요즘은 자원봉사 희망자가 너무 많아 거절하는 게 힘들 정도다.

박상미 힐링캠퍼스 더공감 학장이 서울 서초구 힐링캠퍼스 더공감에서 최근 저서들과 함께 서가 앞에 앉았다. 사진=허영한 기자 younghan@

- 선행에 꼭 이유가 있는 건 아니지만, 그럼에도 특별히 마음을 쏟는 이유가 있나.

▲아이들의 모습에 제 청소년기가 오버랩되기 때문인 것 같다. 중학교 때 경제적으로 어려워지면서 부모님이 많이 싸우셨다. 괜히 태어나서 엄마, 아빠 힘들게 한다는 생각에 밤새 잠을 못 이뤘다. 학교에선 잠만 자는 아이였다. 성적은 최상위에서 하위권으로 밀려났다. 당시 병원에서 악성 그레이브스병이라고 했다. 면역 체계가 무너지는 병으로 의사 선생님이 "이 아이는 기어다니기도 힘든 수준"이라고 했다. 결과적으로 인문계 고등학교에 못 가 재수를 했는데 그때 학교 밖 청소년이 겪는 따가운 시선을 경험했다.

- 고통의 시기였겠다.

▲당시만 해도 고등학교 재수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내 인생이 여기서 끝나는 것 아닌가 하고 너무 두려웠다. 그럴 때면 책에 몰입했다. 매일 부산시립도서관에 가서 1년 사이에 세계문학전집, 한국문학전집을 섭렵했다. 그리고 매일 ‘재수 여학생의 일기’를 썼다. 이 내용은 고등학교 입학 이후 고교생 시소설 공모전에 제출했는데, 내는 곳마다 상을 받았다. 그 덕에 문학특기생이 되었고, 서울에 올 수 있었다.

- 그럼에도 대학 시절 극심한 우울증을 겪었다고 들었다.

▲지방 학생이 혼자 상경해 지내는 게 너무 큰 고통이었다. 아르바이트하면서 등록금과 생활비 고민하는 부담도 컸고, 대학교 4학년 때는 심적으로 크게 의지했던 아버지마저 돌아가셨다. 그때 죽자고 마음먹고 소주를 구해 수면제를 삼켰다. 다행히 죽지 않고 3일 만에 자취방에서 혼자 깨어났는데 삐삐를 보니 아무 연락도 없더라. 고독사가 그렇게 일어난다는 걸 알게 됐다. 최근 위급한 상황에 놓인 아이들을 데리고 사는 이유이기도 하다.

유튜브 채널 '박상미 라디오'로 받은 실버 버튼과 제자들이 선물한 그림. 현재 유튜브 구독자는 24만 명이 넘는다.

- 개인적으로 인생에 가장 큰 도전은 무엇이었나.

▲34살에 하던 걸 다 그만두고 심리학 대학원을 선택한 것이다. 국문학 박사 과정을 앞두고 자신에게 물었다. "너 행복하니?" 근데 답은 "아니"였다. 늘 가난했고 돈을 모아야 했고, 내세울 게 없으니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 공부했다. 우울증에 공황장애까지 앓았다. 그때 나 같은 사람을 돕고 싶다는 생각에 심리학대학원을 갔다. 그때 주변 사람 모두가 너무 늦었다고 했다. 박사가 된다고 해도 시간강사도 못 한다고 했다. 근데 제 장점이 남의 말을 안 듣는 거다(웃음). 뜻대로 도전했다.

- 결과적으로 그 도전이 성공한 듯하다.

▲그때부터 삶을 제가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기 시작했다. 생각해 보면 세상은 한 번도 절 먼저 알아봐 주지 않았다. 36살에 떠난 독일 유학도 본래 지원 자격은 30살 미만의 독일어 능통자였다. 그때 난 나를 뽑았을 때 독일이 얻을 이득을 10장에 걸쳐 설명하고, 그걸 전문 번역가를 통해 번역해서 보냈다. 결국 합격했다. 얽매이지 않으면 할 일이 너무 많다. 독일 유학 시절 조선일보와 경향신문에 직접 기고하고 싶다고 연락을 하기도 했다. 다행히 기회가 주어져 독일에서 인기를 얻기 시작한 BTS(방탄소년단)를 최초 인터뷰하기도 했다. 그때 BTS가 “누나 (인터뷰) 잘 써주세요”라고 하던 기억이 난다(웃음). 전 하고 싶은 건 계속 두드린다. “저 할 수 있어요” “기회 줘 보세요” 그럼 안 열릴 것 같은 문이 열린다.

- 본인 삶의 의미를 어떻게 정의하나.

▲사람 살리기다. 과거 극단적 선택에 성공했다면 지금의 전 없다. 살아났기에 지금의 모든 일이 존재한다.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다. 죽음에서 벗어나 의미 있게 살기로 작정하면 모두가 저 이상의 삶을 살 수 있다. 그때 이후로 지금까지 도움 준 사람 수가 1만명이 넘는다. 그 사람들이 또 1만명을 살릴 생각을 하면 굉장히 행복하다. 좋은 경험을 한 번이라도 해본 아이들은 잘못된 길로 가기 어렵다. 그걸 도울 마음을 가진 어른들도 많다. 저는 그게 이뤄지는 커다란 판을 만들고 싶다.

- 도전을 머뭇거리는 분들에게 용기 낼 수 있는 말을 전해준다면.

▲늦은 때란 없다. 지금 시작해도 된다. 34살에 도전할 때 늦었다고 절 말리던 친구 중에 뒤늦게 사이버 대학에서 들어가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사람이 많다. 특히 여성분들 나이에 얽매이지 마시라. 여러 길이 있지만 그중 심리상담가는 온갖 인생 풍파 겪어 본 경험이 스펙이다. 50대에 시작해도 충분하다. 심리상담은 60대가 꽃이다. 그 밖에도 찾아보면 내 경험과 나이가 스펙이 되는 일들이 많다. 환경, 돈, 아이디어가 문제가 아니다. 진짜 문제는 실천력이다. 늘 강조하는 말이 있다. "실천만이 실력이 된다."

박상미 힐링캠퍼스 더공감 학장은

심리상담가이자 문화심리학자다. 현재 한양대학교 일반대학원 협동과정 교수, 한국의미치료학회 부회장 및 수련감독, 심리치료 교육기관 ‘힐링캠퍼스 더공감’ 학장이다. 문학, 상담심리학, 대중문화, 문화심리학을 전공했고, 한양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독일 학술교류처 DAAD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독일에서 연구했다. 독일에서 빅터 프랭클 ‘의미치료(로고테라피)’의 놀라운 치료 효과를 체험한 후, 수련을 받고 의미치료 교육에 앞장서고 있다.

서믿음 기자 fait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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