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슈비츠에서의 첫 밤을 잊을 수 없다
[정병진 기자]
▲ 엘리 위젤의 소설 <나이트>의 표지 |
ⓒ 정병진 |
독일 나치는 폴란드 남부 아우슈비츠에서 유대인, 폴란드인, 로마인(집시), 소련 전쟁포로, 동성애자, 노약자 등 100만 명 이상을 조직적으로 학살한 것으로 알려졌다. 엘리 위젤은 그런 곳에서 자신이 살아남은 건 기적이나 능력이 출중해서가 아니라 '우연'이라 말한다.
그는 살아남은 자로서 "무언가 의미 있는 일"을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자신이 겪은 아우슈비츠 기억을 토대로 자전적 소설 <나이트 La Nuit>를 1958년 프랑스에서 출간하였다. 이 소설은 <흑야>(1978, 가톨릭출판사), <밤>(1986, 햇빛출판사)으로 국내에 알려지다가 지난 2007년 <나이트>(위즈하우스)로 새로 나왔다. 작가의 부인 매리언 위젤이 지난 2006년 새 영역본을 내놓았는데 그 책을 한국어로 옮긴 작품이다.
'경고'를 무시한 유대인들
이 소설은 '모이셰'란 인물 소개로 시작한다. 그는 외국인으로서 유대교 신비주의 분파인 하시드파 시티블(Shtibl, 작은 회당)의 허드렛일을 하던 사람이다. 헝가리 시게트 사람들은 모이셰를 좋아하긴 하였으나 그의 비범함에 그다지 주목하지 못했다. 소년 엘리저만이 그를 '스승'처럼 여기며 따랐다.
어느 날 나치는 시게트에 살던 외국인을 끌고가 집단학살하였다. 모이셰는 다리에 총을 맞고 죽은 척하여 겨우 도망쳐 돌아왔다. 그는 자신이 겪은 일을 사람들에게 부지런히 알리며 경고하였다. 하지만 마을 사람 누구도 그의 말을 귀담아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를 미쳤다고 여기며 멀리하려 들었다. 왜 그랬을까? 모이셰가 외국인인데다 몹시 비천한 상태라 그의 말을 신뢰하지 않았을 것이다.
모이셰처럼 독일 나치의 유대인 대량 학살 계획을 경고한 소수의 사람들이 있었다. 하나 대다수 유대인 공동체는 그들 경고를 '틀린 정보'라고 무시하거나 '과장'된 거라 여겼다. "지금 같은 시대에 설마 그런 야만적인 학살이 벌어지겠냐"며 안일하게 생각하였다.
설령 이런 비극이 벌어진다 해도 자신과 가족만큼은 피할 방법이 있으리라고 믿었다. 아우슈비츠 같은 강제 수용소에 끌려 가기 전까지 그들 대부분은 무슨 일이 벌어질지 예상하지 못하였다.
평생 잊지 못할 밤
1944년 5월 16일, 엘리저와 그의 가족은 시게트에서 아우슈비츠로 강제 이송되었다. 그곳에 도착하자마자 엘리저의 모친과 여동생은 가스실로 끌려가 살해당하였다. 엘리저와 그의 부친은 일할 능력이 있다는 판정을 받아 처형당하지 않았다. 먼저 들어온 다른 수감자가 나이를 속이라 조언해줘 그게 도움이 되었다. 실제 나이(열다섯 살)를 말했다면 너무 어리다고 일찌감치 화장장 연기로 변하였을지 모른다.
"난 잊을 수 없다. 수용소에서의 첫 밤, 내 인생을 하나의 긴 밤으로 바꾼 그 밤, 일곱 번 저주받고 일곱 번 봉인된 그 밤을 잊을 수 없다. 그 연기를 잊을 수 없다. 침묵하는 하늘 아래 연기로 변해버린 아이들의 작은 얼굴들을 잊을 수 없다. 내 신앙을 영원히 불태워버린 그 불꽃들을 난 잊을 수 없다. 내게서 영원히 삶의 의지를 앗아간 그 밤의 침묵을 난 잊을 수 없다."
내 부모님은 한국전쟁의 참상을 직접 겪은 세대다. 두 분 모두 살아오신 이야기 중 전쟁 때 겪은 일을 비교적 가장 생생히 기억하셨다. 엘리 위젤도 악몽 같이 무시무시한 광경을 감수성 예민한 청소년기에 목격하였다. 그게 평생의 상처로 그에게 아로 새겨졌다.
'선별'이라는 공포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수감자들에게는 '자긍심', '인격', '희망', '영혼' 따위는 사치에 불과하였다. 그들은 날마다 죽음과 삶을 가르는 '선별'과 '모면'의 외줄 타기를 강요받았다. 수감자는 이름 대신 왼팔에 새긴 수감 번호로 불렸다. 금품을 소지해선 안 되었으며, 새 신발이나 심지어 금이빨까지 다 빼앗겼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구타를 당하기 일쑤였다. 공습 중에 수프 두 그릇을 훔친 어떤 소년은 교수형을 당하였다.
친위대는 카포들을 앞세워 거의 매주 수감자 '선별' 작업을 하였다. 이때 번호가 적힌 자는 화장장행이었다. 주로 극도로 허약한 사람, 무슬림 등이 뽑혀 죽임당했다. 수감자들은 발가벗은 채 달려서 자신의 신체가 아직 쓸 만한 상태임을 입증해야 하였다. 다들 '선별'되지 않고자 있는 힘껏 달렸을 것이다. 작가는 '선별'을 '최후의 심판'이라 표현한다. 하지만 '최후의 심판'은 단 한 차례 있기에 '선별'은 그보다 훨씬 더 끔찍한 일이다.
"선별작업"의 절정은 전쟁 막바지에 벌어졌다. 독일군은 러시아군에 패주를 거듭하자 한겨울 폭설 중인데도 수용소 수감자들을 20km 넘게 쉼 없이 달리게 강요해 이주시켰다. 친위대는 달리다가 멈추거나 이탈한 자들을 즉시 총살하였다. 수천 명 수감자는 추위, 목마름, 굶주림, 생리적 욕구도 다 잊고 무조건 앞만 바라보며 달려야 하였다. 달리다가 넘어지거나 주저 않으면 뒤따르는 자들에 의해 짓밟혀 죽을 위험도 있었다. 목적지에 겨우 다다른 사람들 중에서조차 무수히 얼어 죽었다.
침묵 말야야할 이유
작가 엘리 위젤은 소설 <나이트>로 홀로코스트의 끔찍한 실상을 생생히 증언하였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인종과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각종 차별과 박해를 받는 사람들을 옹호하는 인권평화 운동을 벌였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1986년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엘리 위젤은 수락 연설에서 소년 엘리저가 아버지에게 물은 다음의 질문을 여전히 기억한다고 말한다.
"이런 일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습니까? 지금은 중세가 아니라 20세기입니다. 그런 범죄를 저지르도록 사람들이 놔둘 리 없습니다. 왜 사람들은 침묵을 지키는 겁니까?"
작가는 이 소년에게 자신은 침묵하지 않고자 노력했노라 대답하고자 힘썼다고 말한다. 홀로코스트를 기억하고 증언하고자 노력하였고, 굴욕과 고통을 당하는 자들 편에 서서 싸우고자 노력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인간의 존엄성이 위협받고, 인종, 종교, 정치적 견해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박해받는 사람들이 있는데도 '중립'을 표방하거나 '침묵'하는 이들이 있다면 그는 '공범'이나 다름없다고 말한다.
아우슈비츠의 또 다른 생존자인 프리모 레비는 그의 책 <이것이 인간인가>에서 "고의적 태만은 유죄"라 말한다. 그는 대부분의 독일인이 유대인 대학살이 벌어지는 중임을 몰랐다는 건 '핑계'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알고자 했다면 충분히 알 수 있었는데도 '모르는 척'하고 싶어 몰랐을 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고의적 태만'에 대해 자신은 '유죄'라고 생각한다고 하였다.
아직도 지구촌 도처에는 전쟁, 가난, 인종, 종교, 정치 때문에 온갖 인권 유린을 당하는 사람이 너무 많다. 아우슈비츠 화장장의 검은 연기는 흘러간 옛 광기의 시대에나 존재하는 게 아니다. 오늘 우리 사회 곳곳에서도 얼마든지 다양한 형태로 그 끔찍한 얼굴을 들이 밀곤한다.
엘리 위젤과 프리모 레비 같은 증언자들의 경고처럼 그런 사실을 알면서도 또는 충분히 알 수 있었으면서도 '침묵'하거나 외면하면 사회는 기초가 무너져 더욱 심각한 위험을 맞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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