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덩치 키워야 산다” 에너지 기업은 충전 중
최근 글로벌 에너지 기업들이 미래 성장을 위해 인수·합병(M&A)을 통한 몸집 불리기에 나서고 있다. 단기간에 사업 포트폴리오를 다각화하고, 신규 시장으로 외연을 확장하는 데 유용하기 때문이다. 특히 전기차 캐즘(일시적 수요 정체) 등 그동안 겪어보지 못했던 위기 상황에서 장기간 버틸 힘을 확보하기 위해 M&A에 사활을 걸고 있다. 향후 글로벌 에너지 시장에서 규모의 경제를 달성한 기업들만 살아남을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에너지 분야에서 성공적인 사업 모델을 창출하려면 대규모 장기 자본 투자가 필수적이다. 거액의 투자를 장기간 진행해야만 서서히 성과를 낼 수 있는 구조이기 때문에 에너지 기업의 자본력은 곧 시장 장악력으로 통용된다. 이런 측면에서 M&A는 ‘저비용 고효율’ 수단이다. 단숨에 기업의 덩치를 키워 경쟁력을 확보하고 지속가능한 경영 목표를 수립하는 기반이 되기 때문이다.
24일 에너지 업계에 따르면 지난달 시가총액 기준 세계 4위 에너지 기업인 영국의 쉘은 싱가포르 액화천연가스(LNG) 기업 파빌리온 에너지를 인수한다고 발표했다. 쉘이 LNG 회사를 인수한 데는 2가지 목적이 있다. 중국 등 동북아시아 국가에서 시장 지배력을 강화하고 장기적으로는 안정적인 수요가 예상되는 LNG 생산량을 대폭 확대하려는 전략이다. 쉘이 세계 최대 수요처인 중국에 인접한 싱가포르의 주요 에너지 기업을 인수하면서 미래 성장 전망이 밝은 중국 시장 진출을 위한 교두보를 확보했다는 평가다.
쉘은 지난 2월 파빌리온 인수를 앞두고 “중국이 석탄에서 천연가스로 산업용 에너지전환을 가속화하고 남아시아·동남아시아 국가들이 경제 성장을 위해 더 많은 LNG를 사용하고 있다”면서 “2040년까지 글로벌 LNG 수요는 50% 이상 증가할 것”이라고 밝혔다. LNG 시장에서의 외연 확장 필요성을 강조한 것이다. LNG 글로벌 거래량은 2023년 4억400만t으로 전년(3억9700만t) 1.7% 소폭 증가했는데, 업계에서는 LNG 공급만 충분하다면 거래량이 크게 늘어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세계 2~3위 에너지 기업도 잇따라 대규모 M&A 전략을 수립하고 글로벌 에너지 패권 경쟁에서 밀리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다. 지난해 10월 세계 2위 에너지기업인 미국의 엑손모빌은 세계 3대 셰일오일 시추업체 파이어니어 내추럴 리소시스를 595억 달러(약 82조3599억원)에 인수했다. 이에 세계 3위 에너지기업인 셰브론은 석유·가스 생산업체 헤스를 530억 달러(약 73조3626억원)에 인수한다고 발표하며 맞불을 놨다.
이들 두 회사는 특히 미국의 셰일 오일의 최대 중심지로 불리는 퍼미안 분지에서 원유 생산량을 늘리려는 시도 중이다. 퍼미안 분지는 미국 석유 생산량의 40%를 차지하는 최대 유전 지역이다. 이 지역을 차지하는 기업이 글로벌 에너지 패권 경쟁에서 우위를 잡을 수 있다는 평가까지 나온다. 엑손모빌은 파이어니어를 인수해 퍼미안 분지에서만 미국 전체 하루 생산량의 10% 수준인 130만 배럴까지 생산량을 확대할 것으로 알려졌다. 셰브론도 대규모 M&A를 통해 몸집을 키운 뒤 생산량을 대폭 늘려 경쟁 구도 이어가겠다는 전략이다.
신규 시장을 개척해 수요처를 확보하는 데도 M&A는 마중물 역할을 한다. 지난 1월 이탈리아 에너지 기업 에니는 사업 영역 확장을 위해 영국 석유회사 넵튠에너지를 49억 달러(약 6조7816억원)에 샀다. 에니는 서유럽과 북아프리카, 인도네시아, 호주 등 다양한 지역에서 에너지 포트폴리오를 확장하기 위해 인수 전략을 짰다. 에니는 “글로벌 에너지 회사로 입지를 공고히 하는 동시에 북아프리카에서 탄소포집·저장(CCS) 사업 기회를 창출하고 북유럽에서 가스 생산을 늘리는 전략”이라고 설명했다. 월스트리트저널은(WSJ)은 “우크라이나와 중동 지역에서 분쟁 확대 위협으로 국제적 투자 불확실성이 커지자 석유 메이저 회사들이 서반구로 관심을 돌리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고 분석했다.
한국도 M&A로 시너지를 창출하려는 시도가 이뤄지고 있다. 지난 2020년 1월 한화그룹은 한화케미칼과 한화큐셀앤드첨단소재를 통합해 현재의 한화솔루션을 출범시켰다. 화학·에너지·소재 사업의 시너지를 극대화하고 세계 시장에서의 경쟁력을 강화하는 차원이었다. 한화그룹 내 혼재돼 있던 태양광 사업을 한화솔루션으로 일원화해 사업 가치를 극대화해 M&A 성공 모델로 평가받고 있다. 지난해 1월에는 포스코에너지가 포스코인터내셔널로 흡수합병되면서 친환경에너지 전문기업으로 변신했다. 포스코인터내셔널은 합병을 통해 연 매출 40조원, 영업이익 1조원을 넘기는 기업으로 덩치를 키울 수 있었다.
최근에는 SK이노베이션과 SK E&S의 합병 발표로 자산 규모 100조원이 넘는 대형 에너지 전문 기업 탄생이 임박했다. 양사는 합병으로 자원 탐사와 개발 역량을 공유하고 CCS사업을 공동으로 추진하면 신규 시장에서의 규모의 경제를 달성할 수 있다고 본다. SK E&S가 하는 에너지솔루션 사업에 SK온의 ESS(에너지저장장치) 배터리를 활용하는 식으로 시너지도 낼 수 있다. 재계 관계자는 “양사는 원료 수급(Sourcing)부터 운송, 활용에 이르는 업·미드·다운스트림 전 분야에서 걸친 에너지 밸류체인을 구축해왔다는 공통점이 있어 합병이 원활하게 이뤄질 경우 윈윈 효과를 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전성필 기자 fee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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