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시평] 불행한 역사를 피하는 학습능력
“검찰총장이 자기 정치를 한다.”
이원석 검찰총장이 “대통령 부인 조사 과정에서 원칙이 지켜지지 않았다”고 항의하자 대통령실과 친윤 쪽에서 나온 반응이다. 이런 반응은 윤석열 검찰총장 시절을 소환한다. 윤 총장은 검찰 권한을 줄이려는 문재인 정부와 갈등을 빚으며 보수 진영 대선 주자로 부상했다. 2021년 3월 3일 “검수완박(검찰수사권 완전 박탈)은 부패완판(부패를 완전히 판치게 하는 것)”이라는 일갈을 남기고 다음 날 사표를 냈다. 그러자 문 정부 인사들이 공격했다. “검찰총장이 자기 정치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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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탄핵 비극에서 교훈 놓친 윤 정부
거대 야당 공격에 빌미 자꾸 제공
용산 견제 딛고 당 대표 된 한동훈
보수 일신의 구심점 될 수 있을까
」
불과 3년여 만에 ‘복붙’(복사+붙이기)마냥 되풀이된 검찰 풍경에 당혹감이 앞선다. 적과 아군이 바뀌었을 뿐이다. 윤 대통령이 단숨에 전국구 스타로 떠오른 계기는 “나는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는 2013년 국감 발언이었다. 지금 용산이 검찰에 보내는 압력은 ‘사람에게 충성하라’는 노골적 사인이다. 지난 5월 검찰 고위 인사에서 법무부가 ‘친윤 검사’라는 이창수 서울중앙지검장을 앉힐 때부터 예견됐던 일이다.
아니나 다를까, 이번에 조사받은 김건희 여사의 두 가지 사안(도이치모터스 주가 조작, 명품백 수수) 모두 무혐의가 될 것이라는 관측이 흘러나온다. 엄정한 조사와 냉철한 법리에 따른 결과라고 믿고 싶다. 문제는 여론이다. 그 수사 결과에 흔쾌히 고개를 끄덕일까. 민심은 녹록지 않다. 이렇게 된 데에는 용산의 실책이 크다. 호미로도 막을 일을 지나치게 방어적으로 대응하다 가래로도 막기 힘들어졌다. “박절하지 못해서” “아랫사람이 깜빡해서 못 돌려줬다” 같은 변명이 국민의 화만 돋웠다. 도이치 주가조작 사건은 “전 정부에서 탈탈 털었지만 별것 없었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주가조작 관련 인물이 채 상병 사건의 임성근 전 해병대 사단장과 연결되며 ‘김건희 네트워크’에 대한 온갖 억측이 증폭되는 양상이다.
이런 난처한 지경은 자초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0.73%포인트 차로 간신히 당선된 윤 대통령 앞에는 172석 단일 거대 야당이 버티고 있었다. 윤 대통령 스스로 당선 전부터 “민주당이 탄핵 위협을 하고 있다”고 할 정도로 정치적 입지는 위험했다. 보수 지지층에서부터 ‘부인 리스크’를 조심하라는 충고가 나왔다. 그런데도 제2부속실 설치나 대통령 직속 특별감찰관 임명 같은 방안은 끝내 선택지 밖이었다. 결국 국정 난맥마다 여사 이름이 등장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국정 농단’이란 단어만 들어도 경기(驚氣)를 일으키는 우리 국민이다. 탄핵 수사 경험이 있는 검사 출신 대통령답지 않게 이런 민감한 문제에 너무 둔감했다.
22대 총선에서 여당이 참패한 것은 이런 둔감의 결과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윤 대통령은 재임 중 단 한 순간도 여소야대에서 벗어나지 못한 역대 유일의 대통령으로 남게 됐다. 윤 대통령이 부르짖는 각종 개혁도 동력을 찾기 힘들어졌다. 사법 리스크에 시달리는 야당 지도자와 정치적 생존 투쟁을 벌이는 서글픈 현실만 남았다. 그 불운을 누구에게 돌리겠는가.
한동훈을 새 대표로 뽑은 국민의힘 전당대회 결과는 보수의 구심점이 용산을 이미 벗어났다는 신호다. 배신자 공격, 문자 ‘읽씹’ 논란 등 용산의 전대 개입 정황이 뚜렷했지만, 당원들은 62.84%라는 압도적 지지로 한동훈을 택했다. 냉정한 것이 정치다. 대통령이 재집권에 도움이 못 된다고 판단하면 지지층은 ‘지못미’(지켜주지 못해 미안해)도 외치지 않고 돌아설 것이다. 채 상병 문제, 김 여사 문제 등 각종 현안에서 용산의 획기적이고 전향적인 조치가 없다면 보수층의 이반은 더 빨라질 가능성이 크다.
“역사는 되풀이된다. 한 번은 비극으로, 또 한 번은 소극(笑劇)으로.” 카를 마르크스가 남긴 유명한 말이다. 1804년 나폴레옹 1세의 황제 등극을 ‘비극’에, 48년 뒤 가문의 명성에 기댄 나폴레옹 3세의 황제 등극을 ‘소극’에 비유했다. 탄핵이라는 정치적 비극을 계기로 집권에 성공한 세력이 불과 몇 년 뒤 거꾸로 탄핵 위협을 받는 신세가 된 상황을 어떻게 봐야 할까. 탄핵을 정치적 생존을 위한 거의 유일한 출구로 삼는 거대 야당의 폭력적 행태는 분명 문제다. 하지만 과감한 일신(一新)과 결단으로 약점을 끊어내지 못하고 계속해서 빌미를 제공하는 여권의 수동적 태도도 답답하다. 역사의 되풀이가 누군가에겐 소극일 수 있겠으나, 보수 지지층엔 끔찍한 비극이다.
한동훈 대표에게 거는 보수의 기대는 간단하다. 학습능력이다. 비극적 역사의 덫에 걸리지 않기 위한 제대로 된 공부다. 그가 욕하는 ‘여의도 화법’도 오히려 익혀야 한다. 그래야 그 동네에서 대화가 된다. ‘여의도 사고’에 빠지지만 않으면 된다. 무엇보다 ‘검사 티’를 벗어야 한다. 머리뿐 아니라 용기도 필요한 일이다. “잘못을 바로잡으려는 노력은 배신이 아니라 용기”(4월 20일 페이스북)라고 스스로 말했다. 한 대표가 추진을 밝힌 ‘제3자 추천 방식의 채 상병 특검’의 성사 여부가 첫 시험대가 될 것이다.
이현상 논설실장 leehs@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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