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놀라게 한 북측 책임자의 뜻밖의 유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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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교형 기자]
▲ 영화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 스틸컷 |
ⓒ 소니픽처스코리아 |
그는 자기 삶을 바꾸고자 무작정 1년 동안 세계 곳곳 마음 끌리는 곳들을 여행한다. 그리고 새로운 환경과 경험 속에서 여행 중 만난 사람들과 참된 인생을 발견하고 행복을 찾았다는 이야기다.
하도 유명해서 나도 영화를 봤지만, 보는 내내 깊은 반감이 일어났다. 부자 나라 전문직 중산층이 무려 1년이나 세계를 여행하는 가운데 만난 행복이라는 게 우리 일상의 행복과 얼마나 관련이 있을까 하는 의문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어찌 됐든 동서고금,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사람은 누구나 행복을 추구한다는 공통점을 가졌다.
내게도 기억에 남는 여행이 있다. 벌써 20년 가까운 추억이 된 개성과 금강산 방문이다. 2007년 봄 개성공단이 가동되면서 남측 관광객이 여행을 갈 수 있게 되었다. 당시 나는 '하나누리'라는 남북교류단체 사무처장으로 정치 및 사회운동 단체의 겨레 나무 심기 행사 일원으로 그곳을 방문했다.
개성으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주최 측 관계자가 북한 사람들의 자존심을 다치지 않도록 말과 행동에 각별히 조심해 줄 것을 여러 차례 당부했다. 체제 선택적 용어인 북한이나 남한 대신 북측, 남측이라는 용어를 부탁했고, 북한의 어려운 경제 상황을 동정하는 발언은 삼갈 것, 여성 안내원을 '아가씨'나 '아줌마'로 부르지 말고 '안내원 선생님'으로 부를 것 등이었다.
그러나 공단 내에서의 차분한 관람을 벗어나 심리적 거리감이 제법 지워진 뒤 말만 들어본 평양냉면과 반주(飯酒)로 점심 만찬을 하고 나니 어느새 우리는 여느 관광객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여성 안내원에게 자꾸 "몇 살이냐", "결혼했냐", "얼마 받냐" 같이 호기심 가득한 질문들을 던지기 시작했다.
▲ 2022년 7월 19일 경기도 파주시 판문점 3초소에서 바라본 북한 기정동마을 너머로 개성공단이 보이고 있다. |
ⓒ 사진공동취재단 |
몇 달 후 남북 자전거 대회를 함께 열자는 건으로 북측 민경련 관계자를 만나러 다시 개성에 갔다. 이번에는 북측 차량을 이용해 공단을 지나 개성 시내를 통과해 한적한 근교로 갔다. 상견례, 탐색전, 기싸움을 거쳐 실무적인 이야기를 다 마친 후 북측이 준비한 오찬에 약간의 반주를 곁들였다.
기왕 거기까지 간 김에 욕심이 생겨 어느 정도 친해진 북측 책임자에게 "개성까지 왔는데 선죽교 한 번 봤으면 좋겠다"고 슬쩍 떠봤다. 그러자 그는 능청스럽게 웃으며 "선죽교 그까짓 것 봐서 뭐 합네까"라고 했다. 어렵게 꺼낸 말을 별스럽지 않게 무시하는 것에 화가 나고 무안하기도 해서 섭섭한 마음 달래려고 바람 쐬러 잠깐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보니 우리가 머무는 건물 조금 앞에 상품 매대가 차려져 있고, 어느 여성 판매원이 어색하게 이런저런 물건을 판매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주변이 왠지 눈에 익어 보여 다시 살펴보니 바로 선죽교였다. 북측 책임자의 뜻밖의 유머와 여유로움에 뒤늦게 놀라며 잠깐이지만 행복을 느꼈다. 여행의 최고 선물은 이처럼 뜻밖의 사람들을 만나는 기쁨인 것 같다.
그해 가을 남쪽 관광객을 모집해 금강산 기행을 다녀올 기회도 있었다. 속초, 고성을 지나 북한 경내에 이르자 북측 지프가 나타나 길을 선도했고, 금강산에 이르는 길가 곳곳에서 어렵지 않게 북한군과 다연장포 장갑차, 부대 등을 보며 군사지역임을 알 수 있었다. 현대에서 지은 호텔 주변에는 서커스 관람장 등 각종 위락시설이 있었고, 저녁에는 금강산이 내다보이는 노천탕에서 목욕도 하고, 오가며 쉽게 만날 수 있던 그곳 주민들에게 괜한 미안함을 느끼기도 했다.
단지 흐른 세월보다 더 급격히 변한 남북 관계로 인해 이제는 정말 전설 같은 이야기가 되어 버렸다. 두 번 다녀온 개성은 지금 내가 일주일에 두 번씩 오가며 일하고 있는 파주 만우리에서 아주 가까운 곳이라 더욱 생각이 난다. 놔두면 얼마든지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을 체제와 이념, 정치로 억지로 가로막고 서로 적대하게 만드는 현실에 분노를 느낀다.
중국의 성현 노자는 임금이 누군지도 모르고 알 필요도 없는 시대가 바로 태평성대라고 했다. 그러나 지금 대한민국은 매일 매 순간 대통령을 비롯한 주요 정치인들의 기침 소리 하나까지 세심히 전달해 주고 있지만, 국민 행복, 만족과는 갈수록 멀어지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만사의 정치화, 정치 과잉 속 절망은 단지 우리나라만의 문제가 아니라 근대 민주주의의 고향이라는 서구를 비롯한 현대 세계의 일반적 현상이 되어가고 있다.
지금 정치혐오나 회의주의를 선동하려는 게 아니다. 다만, 정치의 근본 의미와 나아가 작동 방식을 새롭게 모색하지 않으면 모든 게 정치인 시대에 오히려 정치로 인해 사회 퇴행이 일상화되는 시대가 되었음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 행복이란? |
ⓒ 픽사베이 |
마지막으로 다시 '행복'을 이야기해 보자. 그저 이상이나 학문이 아닌 현실 세계에서 행복은 거의 생활 조건 개선과 동의어다. 바른 정치로 좋은 사회구조를 만들고, 경제로 삶을 풍요롭게 하려는 모든 이유도 따지고 보면 행복해지려는 몸부림일 것이다.
더구나 사람의 마음과 몸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으므로 우리가 처한 상황, 삶의 조건이 행복이나 만족에 깊이 연관되어 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분명히 일단 몸이 편해야 맘도 편한 게 사실이다. 특히 절대적 빈곤이나 정치적 억압에 시달리는 사회를 사는 사람들일수록 더욱 그렇다. 지원과 구호, 자유와 민주가 여전히 중요한 과제일 수밖에 없다.
대개 우리는 이분법적 판단으로 살아간다, 출생, 취업, 승진, 장수는 좋은 일, 행복한 일이라 축하하고 환영하며, 사망, 해고, 강등, 요절은 나쁜 일이요 불행이라 애도하고 회피하려 한다. 당연하다.
그러나 지나 보면 인생과 세상이 꼭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은 것 같다. 행복은 우리가 바라고 기대하는 일들로만이 아니라 바라지 않고 피하려 하는 일들까지 씨줄-날줄로 엮일 때만 달성할 수 있는 아주 신비한 고차 방정식 같다.
특히 21세기 대한민국의 우리는 너무 익숙해서 느끼지 못할 뿐 생활 수준이 이미 세계 상위 10%다. 해외여행, 유학, 이민조차 환영받는 국민은 우리나라를 포함해 전 세계에서 그리 많지 않다.
그러므로 세계화된 오늘날 우리의 행복은 단지 대한민국 국부의 증대로만 향하기보다는 기후위기, 신냉전과 핵전쟁의 위기, 인공지능(AI)으로 무장한 첨단문명생활 속에 더욱 심화되는 엄청난 세계 불평등의 위기를 개선하고 극복할 수 있는 노력 속에서도 찾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남들만 못하다는 것에는 쉽게 분노하지만, 우리가 남들보다 좋은 상황에서 산다는 것은 너무 당연하게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특히 우리 사회가 지금 당장 더 풍요롭게 누리려는 데서 벗어나 더 힘겹고, 외롭고, 더 오랫동안 분투해야 할 다음 세대의 행복과 지속가능성에 초점을 맞추는 전환이 속히 일어나기를 소망한다. 다음 세대가 뭔가 해보기도 전에 포기하고 지치지 않도록 기성세대가 구조를 바꾸고 실질적으로 응원하는 노력을 기대한다. 반년 동안 연재를 읽어주신 독자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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