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려진 섬 싱가포르는 어떻게 아시아에서 가장 잘 살게 됐을까

이준목 2024. 7. 24. 1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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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tvN <벌거벗은 세계사>

[이준목 기자]

'사자의 도시' 싱가포르 공화국(Republic of Singapore)는 아시아의 대표적인 도시국가이자, 놀라운 경제발전으로 작지만 강하고 부유한 강소부국(强小富國)의 대명사로 통한다. 현재는 1인당 GDP 아시아 1위(88.450달러, 세계 5위)에 빛날 만큼 잘 사는 나라가 됐지만, 불과 약 200년 전만 해도 싱가포르는 쓸모없는 늪지대로 둘러싸인 '죽음의 섬'에 불과했다.

열악한 지리적 환경과 강대국의 수탈, 수많은 정치적 격동기를 딛고 싱가포르는 어떻게 오늘날 동남아시아를 대표하는 글로벌 경제 강국으로 올라섰을까. 또 싱가포르의 화려하고 빛나는 성공 이면에 가려진 어두운 그림자는 무엇일까.

지난 23일 방송된 tvN <벌거벗은 세계사> 161회에서는 '죽음의 섬 싱가포르는 어떻게 부국이 되었나' 편을 통해 싱가포르의 파란만장한 역사를 조명했다. 김종호 서강대 동아연구소 교수가 이날의 강연자로 나섰다.
 
 방송 화면 갈무리
ⓒ tvN
 
쓸모없이 버려진 섬, 싱가포르의 변화  

싱가포르라는 지명은 '착각'에서 비롯됐다. 싱가포르의 기원은 1299년 '싱가푸라 왕국'에서 출발한다. 산스크리트어로 싱가는 사자, 푸라는 도시를 뜻한다. 인도네시아 팔렘방 왕국의 왕자였던 상 닐라 우타마의 일행이 섬에 도착해 가장 먼저 범상치 않은 위용을 과시하던 호랑이를 보고서 사자로 오인하면서 섬의 명칭을 '사자의 도시'로 삼았다는 전설에서 유래했다.

14세기 싱가푸라 왕국이 멸망하면서 그 지배 세력은 새로운 지역에 터를 잡고 이슬람 군주가 통치하는 믈라카 술탄국을 건설하며 명맥을 이어갔다. 15세기 들어 '대항해 시대'가 시작하면서 유럽 강대국들이 말레이반도로 잇달아 진출하여 아시아 무역 항로를 장악하기 위한 치열한 패권 경쟁을 펼치게 된다. 말레이반도는 19세기에 접어들며 포르투갈-네덜란드를 거쳐 영국의 영향권에 속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강대국들의 관심은 주로 믈라카 해협과 인도네시아에 집중되었고, 싱가포르는 400여 년 가까이 그저 쓸모없는 버려진 섬으로만 남았다.

스탬포드 래플스(1781-1826)는 동인도 회사의 직원으로 싱가포르를 처음으로 발견하고 개척한 인물이다. 당시 싱가포르는 척박한 환경에다가 해적과 살인자들의 은신처로 활용되던 '죽음의 섬'으로 취급됐었다.

하지만 안목이 남달랐던 래플스는 당시 싱가포르의 지리적 위치와 높은 잠재력에 주목했다. 그는 당시 이 지역을 지배하던 조호르 술탄국에 거액을 주고 싱가포르섬을 사들인 데 이어, 과감한 투자를 통해 아시아를 대표하는 새로운 항구도시로 발전시켜 나갔다. 영국은 1824년 3월 식민지 경쟁을 벌이던 네덜란드와 '영국-네덜란드 조약'을 맺고 정식으로 싱가포르를 식민지로 편입시키기에 이른다.

영국의 대대적인 도시개척 프로젝트를 바탕으로 싱가포르는 중계무역의 거점이자 군사기지로서 번영을 누린다. 수에즈 운하가 개통한 이후에는 유럽과 아시아를 무역을 잇는 항구로 싱가포르의 전략적 중요성은 더욱 높아졌다.
 
 방송 화면 갈무리
ⓒ tvN
 
싱가포르의 암흑기

싱가포르가 국제적인 항구로 명성을 떨치게 되면서 다양한 인종들이 사람들이 몰려들며 인구도 크게 증가한다. 이중 오늘날까지 싱가포르의 발전에 중요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 것은 중국계 화교(華僑, 해외로 이주한 중국인)들이었다. 당시 화교는 동남아시아 전역으로 진출하여 막대한 부를 쌓았고 싱가포르에서의 전체 인구와 생산력의 절반 이상을 책임지며 막대한 비중을 차지하게 된다. 영국도 이러한 화교들을 적극적으로 포용하고 우대하는 정책을 펼쳤다.

하지만 1941년 2차세계대전과 태평양전쟁이 발발하면서, 싱가포르에 암흑기에 찾아온다. 동남아시아 식민지 확대를 노리던 일본 제국은 1942년 싱가포르를 무력으로 점령했고 자본을 갈취하기 위하여 화교들을 잔혹하게 학살했다. 당시 90만에 이르던 싱가포르 인구만 약 5만 명 이상의 화교가 살해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1945년 일본이 패망하면서 싱가포르는 다시 영국의 지배로 돌아왔다. 하지만 20세기에 접어들어 세계 각지에서 '민족자결주의'에 대한 목소리가 높아지며 오랫동안 서양 열강의 지배를 받아오던 식민지에서 독립 및 자치권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말레이시아 연방 측은 완전한 독립을 요구했지만, 자체적인 생존이 어려웠던 싱가포르는 영국 정부에 자치권만을 요구했다.

1959년 싱가포르에 최초의 자치 정부가 수립되고 6월에는 의원내각제 기반의 보통선거가 실시된다. 이 선거에서 총리로 당선된 것이 훗날 '싱가포르 건국의 아버지'로 불리는 리콴유(李光耀 이광요, 1923-2015)라는 인물이다. 그는 1990년까지 무려 31년간 총리로 장기 집권하며 싱가포르 성장의 기틀을 닦은 지도자로 꼽힌다.

화교 4세 출신의 리콴유는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을 졸업하고 변호사로 활동하다가 정계에 입문했다. 리콴유는 영국 통치 시절을 거울삼아 싱가포르의 번영을 위해서는 다인종 간의 화합을 강조했고, 교역 중심에서 산업 중심의 사회로의 변화를 공약하며 대중의 지지를 얻었다.

하지만 냉전(Cold War) 시대의 개막과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의 출범은, 싱가포르에 뜻하지 않은 위기를 불러온다. 영국과 서방 진영은 공산주의 세력의 확산에 노심초사하고 있었다. 특히 중국계 화교가 인구의 75%를 차지하던 싱가포르에서는 중공의 출범 이후 사회주의 세력이 빠르게 확산되고 있었다.

싱가포르의 사회화를 경계한 영국은 1963년 강력한 반공주의 연대를 표방한 말레이시아 연방의 수립을 추진하며 싱가포르를 포함시켰다. 이에 동의한 리콴유는 싱가포르의 자유무역항으로서의 입지를 유지하면서 말레이 연방과 공동시장 조약을 맺으며 새로운 경제통합과 성장 효과를 기대했다.
 
 방송화면 갈무리
ⓒ tvN
 
홀로서기 나선 싱가포르

리콴유의 기대와 달리, 말레이 연방은 이후 싱가포르와의 공동시장 조약을 지키지 않았다. 말레이 연방은 본토 위주의 개발과 말레이인 우대 정책을 밀어붙였고, 이는 다인종 국가인 싱가포르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차별 정책이었다.

싱가포르 내에서는 서로를 적대시하던 말레이인과 중국계 화교 간의 인종갈등이 점차 악화됐다. 급기야 1964년 7월에는 말레이계 무슬림들이 예언자 무함마드 탄신일을 기념하는 행진을 하던 도중 중국계와 충돌해 대규모 사상자가 속출하는 폭력 사태로 번졌다. 이 시점에서 이미 말레이시아 연방과 싱가포르는 도저히 공존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 상태였다.

툰구 압둘라만 말레이시아 연방 총리는 1965년 8월 헌법 개정을 통해 골칫거리가 된 싱가포르를 2년 만에 연방에서 전격 축출하기로 결의한다. 이는 싱가포르와는 합의가 없었던 일방적인 결정이었다. 당시 방송에 출연한 리콴유는 연방 축출 통보의 충격으로 인하여 인터뷰 도중 눈물을 흘리며 기자회견이 잠시 중단되는 모습이 연출되기도 했다.

이로써 싱가포르는 독립 국가로서 온전한 홀로서기에 나서야 했다. 리콴유가 먼저 주목했던 것은 다인종 국가였던 '싱가포르만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작업이었다.

리콴유는 먼저 대통령으로 말레이인이던 유솝 빈 이스학을 임명하면서 인종 간의 화합 메시지를 강조했다. 또한 화교와 말레이인, 인도인이 다수를 차지하던 싱가포르에서 과감하게 '영어'를 공용어로 채택했고, 중국과 말레이의 국기 디자인을 결합한 싱가포르만의 국기를 제작했다.

이어 리콴유는 싱가포르의 생존을 위한 대대적인 개혁에 나섰다. 리콴유는 철저한 '무관용 원칙'을 표방하며 철저한 규칙과 질서에 따라 운영되는 법치국가를 추구했다.

싱가포르 정부는 1952년 총리 직속의 부패행위조사국(CPIB)을 설립하며 강력한 수사권을 부여했고, 1960년에는 부패방지법을 도입하며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부패행위에 대한 강력한 처벌을 선언했다. 리콴유는 1959년 한 연설에 각료들과 함께 모두 하얀 옷을 입고 등장하며 청렴결백에 대한 강한 의지를 드러내기도 했다.

또한 리콴유는 관료들이 부정부패의 유혹에 노출되는 것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 공무원의 임금을 대폭 인상했다. 싱가포르에서 총리를 비롯한 관료들의 연봉은 지금도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준으로 꼽힌다. 싱가포르는 지난 2023년 발표된 '세계 국가 청렴도' 순위에서는 무려 83점으로 아시아 1위, 세계 5위(1위는 덴마크)를 차지했다.

특히 지금까지도 엄격한 규칙과 질서를 강조하는 특유의 '엄벌주의' 문화 때문에 싱가포르는 외국인들에게는 '벌금의 왕국'으로 불리기도 한다. 한 손 운전, 타인의 와이파이 사용, 길거리나 껌을 뱉거나 쓰레기를 투척하는 등 사소한 부주의에도 싱가포르에서는 막대한 벌금을 물거나 봉사활동을 해야 하며, 이는 외국인에게도 예외가 없는 것으로 유명하다.

심지어 21세기에 현대 국가에서는 거의 사라진 태형(회초리로 엉덩이를 때리는 형벌)이나 사형까지도 집행되는 나라가 싱가포르다. 1993년 미국인 소년 마이클 페이가 싱가포르에서 차량 50대를 연이어 파손하는 비행을 저지르다가 체포된 후, 강대국인 미국 정부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끝내 태형을 집행한 일화는 유명하다. 2002년에는 베트남계 호주인 투옹 반이 싱가포르 공항에서 마약을 반입하다가 적발되어 호주 정부의 간곡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사형이 집행되기도 했다.

엄벌주의 바라보는 시각차

이러한 싱가포르의 엄벌주의 정책에 대해 일각에서는 인권을 소홀히 여긴다고 비판한다. 동시에 법과 원칙에 예외가 없다는 일관된 이미지와 안전한 치안에 대한 신뢰를 주는 요소로도 인정받고 있다.

또한 싱가포르는 교육에 있어서는 효율과 경쟁을 중시하는 철저한 '엘리트 위주의 차등 교육 시스템'을 채택하고 있다. 싱가포르의 교육 기관들은 초-중-고상위 단계로 갈수록 진학의 기회가 줄어들고 경쟁에서 이겨만 상급 학교로 진학할 수 있는 피라미드 시스템이다. 학업성적에서 떨어지는 학생들은 직업훈련원으로 가서 기술을 습득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싱가포르에서는 대학 입학이 곧 엘리트를 증명하는 수단이 되고, 장학생으로 국가적인 지원을 받는다. 싱가포르는 다양한 국제학교를 설립하여 글로벌 인재 양성에 주력하고 있었으며, 세계대학순위 상위 20위에 싱가포르 대학이 두 곳이나 이름을 올릴 만큼 경쟁력을 인정받고 있다.

한편 리콴유는 1961년부터 국가경제개발계획을 수립하고, 국가 주도 하의 공업 중심 개발 정책, 해외 자본 유치, 파격적인 세금 감면 정책을 추진하며 싱가포르의 경제성장을 이끌었다.

이어 리콴유는 지리적으로 좁은 도시국가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대규모 간척사업을 추진했다. 1965년만 해도 서울보다 작았던 싱가포르의 국토는 지속적인 간척사업으로 영토를 22%나 확장하며 현재 서울의 약 1.2배까지 넓어지게 됐다.

1960년대 높은 실업률을 개선하기 위하여 싱가포르 정부는 노동력 중심의 단순 제조업 의존도에서 벗어나, 70년대 후반부터는 석유화학, 컴퓨터 제조업 등 기술집약적 산업에 집중투자를 하면서 크게 발전하게 된다. 이때부터 해외 유명 브랜드의 제조공장들도 싱가포르에 대거 진출한다.

무역업과 금융업. 관광업 등도 싱가포르에서 번성했다. 1960년대 7억 달러에 불과했던 싱가포르의 무역 GDP는 이미 1980년대 초반에 이르면 66억 달러로 20년 만에 급격히 성장한다. 싱가포르의 관광수익은 2022년 기준 한화로 약 14조 8000억에 이른다.

또 싱가포르는 70년대부터 외환 자유화를 도입하고 전 세계은행의 지점들을 유치했다. 1984년에는 아시아 최초의 금융선물거래소까지 설립했다. 이로 인해 싱가포르의 금융업계는 각종 수수료와 환전 수익만으로도 막대한 차익을 확보하고 있다. 세금 우대정책으로 인하여 전 세계의 부자들이 세금을 피하여 싱가포르로 귀화하는 일도 빈번하다. 2023년 현재 싱가포르는 미국 뉴욕, 영국 런던, 홍콩과 더불어 세계 4대 금융도시에 선정되며 국제 금융거래의 요충지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싱가포르의 이러한 화려한 성장 이면에는 어두운 그림자도 존재한다. 법치주의를 내세운 엄격하고 권위적인 사회 통제로 싱가포르는 2023년 언론자유지수에서 '나쁨' 수준인 126위, 민주주의 지수는 69위로 '결함있는 민주주의'라는 평가를 받는 등 부정적인 면모도 동시에 안고 있다. 리콴유의 장기 집권에서 비롯된 특정 가문의 권 력독점과, 사회적 다양성-포용성의 부족이라는 싱가포르의 약점은, 시대가 변화하면서 끊임없이 도마에 오르고 있다.  

"지도자는 비전을 가져야 한다. 더 중요한 것은 현실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는 싱가포르의 국부 리콴유의 통치 철학을 드러내는 어록이다. 싱가포르가 철저한 국가 주도 정책으로 기반을 마련하고 각종 산업을 개발하며 아시아 최부국까지 기적 같은 경제발전을 이뤄낸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업적이다. 하지만 번영과 발전이라는 목표를 달성해낸 지금, 이제는 그 성공을 지켜내고 이어나갈 수 있는 새로운 시대정신을 찾아내는 것은, 앞으로의 싱가포르에게 남겨진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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