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한 탈북이 아니다, 이 영화가 뛰어넘고자 하는 것
[조영준 기자]
▲ 영화 <탈주> 스틸컷 |
ⓒ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
01.
북한의 휴전선 인근 비무장지대. 전역을 앞두고 있는 중사 규남(이제훈 분)은 매일 밤 막사를 이탈해 부대의 철책을 넘는다. 군사분계선 인근에 매설된 지뢰의 위치를 파악하고 지도를 완성하기 위해서다. 자칫 목숨이 위험해질지도 모르는 순간의 연속이지만 그의 움직임에 망설임은 조금도 찾아보기 힘들다. 목표는 단 하나, 현실로부터 탈주해 남한으로 넘어가는 것. 오로지 하나의 목표만을 향해 달리고 또 달리는 남자의 모습을 영화 <탈주>는 처음부터 스크린 위로 옮겨놓는다.
문제는 남한에 대한 동경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규남만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후임 동혁(홍사빈 분)은 그의 월남 계획에 대해 알게 되자마자 지도를 훔쳐 먼저 탈주를 시도하고 끝내 실패하고 만다. 동혁의 충동적인 행동을 만류하기 위해 나선 규남 역시 함께 붙잡힌다. 북한 보위부에서는 두 사람이 연루된 전방 지역의 탈주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소좌 현상(구교환 분)을 파견한다. 오랜 시간 준비해 왔던 규남의 꿈이 위기에 놓이는 순간이다.
영화 <탈주>는 직선의 움직임을 곡선으로 그리다 끝내 다시 직선의 자리로 되돌아오는 이야기다. 처음의 직선은 규남으로부터 제시된다. 그는 매일 밤 반복해서, 마치 타임 루프에 갇히기라도 한 듯 달려 나간다. 프레임으로부터 벗어날 것만 같은 역동성마저 느껴진다. 아무런 정보 없이도 그가 가진 남한에 대한 갈증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그는 매일 밤 뛰쳐나간다. 영화가 일부러 많은 설명을 하지 않기 위해 더 강렬한 직선적인 이미지를 구현한 것이라 믿는다.
▲ 영화 <탈주> 스틸컷 |
ⓒ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
일반적으로 영화에서 인물의 동인(動因)은 중요하게 다뤄진다. 이 작품처럼 서로 다른 위치에 놓인 이들이 서로 쫓고 쫓아야 하는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목적 없이 나아가고자 하는 인물은 어디에도 없다.
극 중 규남 역시 마찬가지다. 명확하게 주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이종필 감독은 그가 탈북을 결심하게 되는 요소를 곳곳에 마련해두고 있다. 기본적인 배경은 쉽게 해결할 수 없는 허기와 기존의 권력 체계가 갖고 있는 부정부패다. 순찰 도중 구한 멧돼지를 병사들이 아닌 직책이 높은 이들에게 헌납하는 장면이나 화려한 총 정치국장의 연회 장면은 꽤 직접적인 편에 속한다. 현상이 쓰고 있는 미제 립밤을 포함해, 물티슈나 액상 담배조차도 인민에게는 허용되지 않는 물품들이다.
출신 성분이 3등급이라 제대 후에는 탄광으로 가야 한다는 규남의 타고난 성분에 대한 후임 병사들의 이야기도 또 하나의 요소다. 실제로 규남이 현상에게 자신의 앞길을 스스로 정하고 싶다는 욕구를 드러내는 장면도 놓인다. 너무 당연한 이야기지만 여기에서는 아닌 종류의 것이다. 결과에 대한 책임만 질 수 있다면 어떤 미래도 선택하고 나아갈 수 있는 남한과는 분명히 다르다. 보좌관으로 일할 수 있게 해 주겠다던 현상의 제안이 보통 같았으면 행운처럼 여겨지는 이유 역시 마찬가지. 이곳에서 개인의 운명은 당의 결정에 의해 이루어진다.
03.
"규남아, 너 탈주범 때려잡은 영웅이잖아?"
규남에게 나아갈 동인이 주어졌다면 현상에게는 반대로 그를 붙잡아야 할 이유가 필요하다. 이 부분은 이미 명백하게 제시되었다. 북한에서 탈주와 이탈은 총살형에 준하는 행동이다. 두 사람이 마주 본 상태 그대로 직선으로만 달렸다면 이야기가 여기에서 끝나도 무방할 정도다. 하지만 현상은 규남을 총살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것도 모자라 상을 주고자 한다. 탈주병을 잡은 인민의 영웅으로 만들고자 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필요해지는 것이 현상이라는 인물이 자신에게 주어진 방향을 향해 직선으로 강하게 나아가지 않은 이유다. 그는 왜 규남을 힘껏 쫓지 않았던 것일까.
▲ 영화 <탈주> 스틸컷 |
ⓒ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
한편 이 작품에서 인물이 가진 동력 외에 극을 추동하게 하는 것은 역시 속도감이다. 여기에는 직선적 움직임에 따라 발생하는 시각적 동력 하나와 의도적인 생략과 절삭을 통해 완성된 편집에 의한 또 다른 동력 하나가 함께 작용한다. 플롯의 구성에 대해서는 이종필 감독 또한 '의도적으로 캐릭터에 부여된 구체적 사연을 덜어내고자 노력했다'고 말한다. 원래의 목적은 관객이 서사에 이입하는 데 어려움을 겪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지만 이것이 오히려 극의 생동감을 더 극대화한 셈이다.
수많은 밤을 고생해 가며 완성한 지도가 예정된 비가 내리고 난 이후 쓸모 없어진다는 설정 또한 극에 긴장감을 불어넣는다. 규남은 이 문제로 인해 자신의 목숨이 달린 연회장에서조차 초침과 시간에 훨씬 더 신경을 곤두세우고 하루라도 빨리 복귀하고자 한다. 차량을 훔쳐 달아난 뒤에 독립적으로 수감된 동혁을 구해내고, 다시 그를 쫓는 현상과 장력을 형성하는 장면들 또한 여기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나 다름없다. 지도가 없이는 계획한 대로 군사분계선을 넘을 수 없고, 비무장지대가 진창이 되기 전에 지도를 활용하기 위해서는 타임어택을 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05.
"여기서는 실패할 수도 없으니 내 마음껏 실패하러 가는 겁니다."
규남의 세 번째 탈주, 두 사람이 마지막으로 내달리는 마지막 추격 장면에서는 '실패'라는 단어를 둘러싼 서로 다른 서사가 대립한다. 실패를 하더라도 자신이 정한 대로 걸어가고 싶다는 규남과 직접 해보고 실패를 경험한다고 해서 마냥 후회가 남지 않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 현상이다. 같은 방향을 향해 내달리고 있으면서도 완전히 다른 경험과 사상을 갖고 있는 두 사람의 차이는 역설적이게도 북한이라는 동일한 공간으로부터 비롯된다. 출생 성분과 계급 차이다.
어린 시절부터 부유하고 계급이 보장된 삶을 살 수 있었던 현상은 러시아로 떠난 유학의 삶에서 이미 실패를 경험한 바 있다. 세계적인 피아니스트로 성장하고 있던 그는 과거의 어떤 사건으로 인해 소환당한 뒤, 군의 보위부의 일을 하고 있다.
▲ 영화 <탈주> 스틸컷 |
ⓒ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
영화의 마지막에서 등장하는 규남의 다음이 어떤 모습일지에 대한 묘사는 별로 중요해 보이지 않는다. 이야기의 매듭을 짓기 위한 한 방법에 불과하다. 오히려 크게 다가오는 것은 공간과 시간의 단절이 만들어내는 간극이다. 군사분계선 너머에 마련된 고장 난 귀순 전화는 공간의 간극에 해당한다. 철책 너머의 땅, 미지의 공간에 대한 경고다. 먼 곳에서 바라보는 것만큼 눈부시지도, 아련하게 들려오는 라디오 너머의 소리만큼 아름답지만도 않을 것이라는 메시지와도 같다.
시간의 단절은 현상이라는 인물이 안고 있다. 탈주 사건이 마무리되고 연회장으로 향하는 차량 안에서 규남을 보며 현상은 흡족해했다. 순순히 따라나서는 그가 주어진 운명을 받아들일 줄 안다는 것이다. 현상이 틀렸다. 규남은 탈주자의 최후가 어떤 모습인지 보여주는 사상 교육 앞에서도 자신의 마음을 꺾지 않았다. 그리고 그 마음은 어린 시절부터 놓지 않았던 책 <집념의 탐험가 아문센>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나 다름없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고 의미 없는 삶을 두려워하라'는 문구가 쓰인, 바로 현상이 선물한 책이다.
오랜 시간 철책으로 서로 나뉜 공간 안에도, 하나의 큰 사건으로 분절된 한 사람의 시간 위에도 간극이 존재한다. 영화 <탈주>는 이들 틈으로부터 달아나고자 한다. 그리고 그 탈주는 뒤도 돌아보지 않는 내달음으로 철책과 사건을 넘어 충분한 시간을 보낸 후에야 비로소 완성된다. 과거 자신이 떠나온 반대편의 자리를, 그 너머를 다시 바라보는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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