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준혁 “로열발레단에서 나를 증명하기 위해 끝없이 노력했어요”
“로열발레단 입단 이후 여기까지 올라오는 동안 피가 마를 정도로 힘들었어요. 이제는 좀 편안한 마음으로 즐겁게 춤추고 싶어요.”
전준혁(26)은 세계적인 명문 발레단인 영국 로열발레단에서 오는 9월 시작하는 2024-2025시즌부터 수석무용수 바로 아래인 퍼스트 솔로이스트로 승급한다. 2003년 입단해 현재 퍼스트 솔로이스트인 재일교포 발레리나 최유희에 이어 한국 국적 무용수로는 두 번째, 한국 발레리노로는 처음이다. 시즌을 마치고 여름 휴가 기간 한국에 돌아온 전준혁을 최근 만나 승급에 대한 소감과 그간의 이야기를 들었다.
로열발레단은 단원의 등급을 아티스트(군무)-퍼스트 아티스트(군무 리더)-솔로이스트-퍼스트 솔로이스트-수석무용수로 나눈다. 로열발레학교를 졸업하고 2017년 로열발레단 연수단원이 된 전준혁은 이듬해 정단원인 아티스트가 됐다. 그리고 4년 만인 2022년 퍼스트 아티스트로 승급한 데 이어 2023년 솔로이스트 그리고 올해 퍼스트 솔로이스트까지 승급을 거듭했다.
전준혁은 “3년 연속 승급은 못 할 줄 알았다. 이번 시즌 주역 커버(대타)를 많이 맡았지만, 막상 주역으로 무대에 오를 기회를 잡지 못했기 때문이다. 오히려 동료 무용수들의 부상으로 내가 맡은 (조역) 역할을 원래 회차보다 3배 가까이 소화하느라 몸에 무리가 올 정도였다”면서 “그러다가 시즌 막판인 6월 프레데릭 애슈턴의 ‘랩소디’에서 수석무용수를 대신해 두 차례 주역으로 출연한 것이 좋은 결과로 이어졌다”고 밝혔다.
프레데릭 애슈턴(1904~1988)은 영국 로열발레단의 토대를 놓은 거장 안무가다. 라흐마니노프의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광시곡 Op.43을 가지고 만든 ‘랩소디’는 애슈턴의 마지막 작품으로 14명이 출연하는 추상발레다. 세계적인 발레리노 미하일 바리시니코프를 위해 만든 작품답게 주역 발레리노에게 고난도 테크닉을 요구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공연을 앞두고 긴장됐지만 ‘그냥 나답게 춤추자’고만 생각했어요. 입단 이후 첫 주역이라 막이 열린 직후 약간 멍했지만 바로 무대에 집중했습니다. 실수 없이 끝마친 것에 안도하는 순간 객석에서 박수와 환호가 터져나왔어요. 주역으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관객에게 인사하는 기분은 말로 표현하기 어렵더군요. 케빈 오헤어 예술감독님도 저를 크게 칭찬하며 승급 소식을 전해주셨어요. 원래는 제가 승급 대상자가 아니었는데, 감독님이 이 작품을 보고나서 제가 준비된 무용수라고 판단하신 것 같아요.”
로열발레단은 대부분의 발레단처럼 예술감독이 무용수들의 승급을 결정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술감독은 무용수의 기량 등을 고려해 기회를 준 뒤 이를 제대로 해내는지 여부를 체크한다. 전준혁은 “오헤어 감독님은 단원에게 기회를 공평하게 주려고 하신다. 다만 로열발레단의 규모가 크다 보니 입단 초기엔 내게 기회가 오기까지 많이 기다려야 했다”면서 “내 경우 입단 이후 1년이 지난 2019년 발레 ‘잠자는 숲속의 미녀’ 중 파랑새 파드되(2인무)를 맡은 게 첫 기회였다. 이후 코로나19 팬데믹으로 로열발레단 공연이 중단됐다가 재개된 후 작품 속 솔로춤이나 파드되를 하나둘 맡게 됐다”고 되돌아봤다. 이어 “군무로 있던 4년간이 가장 힘들었다. 그때 가만히 기다리기만 하면 안 될 것 같아서 감독님을 찾아가 기회를 달라고 적극적으로 요구하기도 했다”고 강조했다.
전준혁은 입단 이후 기회가 주어질 때마다 자신의 가능성을 증명했다. 그리고 팬데믹으로 미뤄졌던 승급이 재개되면서 그는 2022년부터 매년 승급했다. 이제 퍼스트 솔로이스트가 된 그는 다음 시즌부터 작품의 주역이나 준주역으로 처음부터 캐스팅될 예정이다. 그는 “솔로이스트 때는 감독님이 테스트하는 느낌으로 주역을 맡긴다면, 퍼스트 솔로이스트부터는 믿고 맡긴다는 느낌이다. 입단 이후 나 자신을 끝없이 증명하느라 힘들었지만, 이제는 발레단을 대표할 수 있는 무용수로 인정받은 것 같아서 마음이 편해졌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랩소디’는 갑자기 주역으로 출연하는 바람에 부모님이 보시지 못해 아쉬웠다. 다음 시즌 주역을 맡는 작품에는 부모님을 꼭 모시고 싶다. 그리고 한국인 관객도 가능한 한 많이 공연을 보러오시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로열발레단은 애슈턴과 케네스 맥밀란(1929~1992) 등 거장 안무가들 덕분에 다수의 드라마 발레를 레퍼토리로 보유하고 있다. 드라마 발레는 춤의 향연을 펼치는 클래식 발레와 달리 자연스러운 이야기의 흐름 속에서 주인공의 심리변화를 묘사하는 것이 특징이다. 전준혁은 “드라마 발레에서 무용수는 캐릭터를 자신만의 해석으로 표현할 줄 알아야 한다. 언젠가 맥밀란의 대표작 중 하나로 오스트리아 루돌프 황태자의 비극적인 사랑을 그린 ‘마이얼링’을 처절하게 연기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클래식 발레나 드라마 발레 외에 컨템포러리 작품도 좋아한다”며 “특히 안무가 크리스탈 파이트와 함께한 ‘플라이트 패턴’(2017)과 이 작품을 확장한 ‘라이트 오브 패시지’(2022)에 출연할 때는 춤춘다는 게 정말 행복하다는 걸 느꼈다”고 되돌아봤다.
세계 정상급 발레리노의 반열에 바짝 다가선 전준혁은 불과 4세에 발레를 시작했다. 스웨덴 왕립발레단 솔리스트였던 전은선을 비롯해 고모 세 명이 모두 발레리나여서 어릴 때부터 자연스럽게 발레를 배운 것이다. 2009년 한국예술종합학교 한국예술영재교육원에 입학한 그는 같은 해 미국 뉴욕에서 열린 유스 아메리카 그랑프리 주니어 부문 은상을 받는 등 두각을 나타냈다. 이듬해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 한국 초연 당시 뛰어난 재능으로 ‘1대 빌리’로 내정됐지만, 발레에 집중하기 위해 자진 하차하기도 했다.
2014년 2월 선화예중 졸업 직전 10대 무용수들의 등용문인 로잔 콩쿠르에서 파이널리스트에 오른 그는 영국 로열발레학교 상급 과정에 한국 발레리노로 처음 입학했다. 아시아 출신으로 처음 전액 장학금도 받았다. 이후 기량이 한층 성장한 그는 2017년 유스 아메리카 그랑프리에서 대상을 받았다. 2003년 발레리나 서희(현 아메리카발레시어터 수석무용수), 2012년 발레리노 김기민(현 마린스키발레단 수석무용수)에 이은 세 번째 한국인 대상 수상이었다. 당시 아메리카발레시어터(ABT)에서도 입단 제안을 받았지만, 그는 오랜 꿈이었던 로열발레단 입단을 택했다. 그리고 정식 입단 이후 6년 만에 로열발레단의 퍼스트 솔로이스트가 됐다.
“마침 내년에는 로열발레단의 갈라 내한공연이 예정돼 있습니다. 2005년 ‘신데렐라’ ‘마농’으로 내한공연을 한 이후 20년 만인데요. (역대 6번째 내한이지만) 제가 입단한 이후엔 처음이라 벌써 기대됩니다. 그리고 지금처럼 열심히 하다 보면 머지않은 시기에 로열발레단 수석무용수로서 한국 관객과 만날 수 있을 거로 생각합니다.”
장지영 선임기자 jyja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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