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사초롱] 어머니의 낡은 무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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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는 올해 76세다.
어머니의 영향으로 나도 인생의 중요한 결정 과정에서 돈을 우선으로 생각하지 않을 수 있었다.
어머니의 무릎은 세월에 닳아 무너졌지만, 의지와 헌신은 결코 약해지지 않았다.
"50살 넘은 아들의 퇴근길 운전이 여전히 걱정스러운 어머니. 이제 아들 걱정은 내려놓으시고, 아픈 무릎으로 인생의 늦가을을 산책하시는 동안 아들에게 기대어 편안하게 의지하실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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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는 올해 76세다. 연세가 있다 보니 몸 이곳저곳이 불편하다. 몇 년 전 어깨를 수술하고, 이어 허리 수술을 받고, 이제는 무릎 수술을 권유받은 상황이다. 두 번의 수술로 꽤 고생했던 어머니는 이제 당신 인생에 더는 수술이 없다고 선언했다. 뼈와 관절이 특히 불편한 모습을 보면 홀로 두 아들을 키웠던 인생의 짐이 얼마나 무거웠을지 짐작이 된다.
내가 다섯 살 때 아버지가 사고로 돌아가신 후 어머니는 홀로 가정 경제를 책임져야 했다. 귤 농사를 짓고, 옷 수선을 하면서 두 아들을 키웠다. 그래도 경제적으로 아쉬운 소리를 하는 걸 본 적이 없다. 자존심이 강해 돈 때문에 기죽는 법이 없는 분이었다. 돈이 아쉬운 순간에도 “그 돈 없다고 안 죽는다”는 말로 툴툴 털고 이겨냈다. 어머니의 영향으로 나도 인생의 중요한 결정 과정에서 돈을 우선으로 생각하지 않을 수 있었다.
아버지는 공무 중에 사고로 돌아가셨다. 그런데 사고 상황이 공무 중이었는지 논란이 있어 순직으로 인정받기 위해 정부를 상대로 지루한 법정 공방을 거쳐야 했다. 행정소송은 고등법원까지 패소했다. 고등법원에서 패소한 소송을 대법원에서 역전시킬 확률은 희박했지만 어머니는 혼자 제주도와 서울을 오가며 대법원까지 가서 결국 승소했다. 그만큼 의지가 강한 분이었다. 덕분에 아버지는 국가유공자로 인정받았고, 나는 학비 걱정 없이 학업을 마칠 수 있었다.
내가 중학교 입학한 후에 어머니는 철없는 장남을 앉혀두고 이렇게 말했다. “너도 이제 다 컸으니까, 네가 할 일은 네가 알아서 해라. 이제 네가 이 집안 가장이다. 더 이상 네가 하는 일에 참견하지 않겠다.” 그 말이 정말 무겁게 다가왔기 때문에 아직도 그날의 기억이 생생하다. 그 이후로 내가 어떤 선택을 하든 어머니는 옆에서 걱정만 했을 뿐 한 번도 참견하지 않았다. 대학 전공을 택할 때도, 의대 졸업 후 전공과목을 택할 때도 어머니는 전혀 간섭하지 않았다. 어머니의 말씀 덕분에 나는 내가 한 결정에 대한 책임은 그 누구도 아닌 내가 짊어져야 한다는 생각으로 살아올 수 있었다.
내가 화학과에 입학했을 때 어머니는 정말 기뻐했다. 책 읽고 글 쓰는 걸 좋아하는 아들이 나중에 대학교수가 돼서 평생 공부할 수 있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의대로 진로를 바꾸겠다고 했을 때는 꽤나 섭섭해하고 걱정도 많았다. 병원 일이 고될까 봐 염려했고, 혹시 경제적인 문제 때문에 전공을 바꾸는 게 아닌가 하는 자책도 있었다. 그래도 내가 가장 힘들고 아픈 아이들 곁에 있다는 사실에 어머니는 걱정하면서도 내심 뿌듯해한다.
초등학교 2학년 때 놀이터에서 발목을 다친 일이 있었다. 지금 같으면 당장 응급실로 달려가겠지만 그 시절만 해도 병원 문턱이 꽤나 높아서 병원 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어머니는 걷지 못하는 아들을 등에 업고 좁은 골목과 언덕을 지나서 며칠 동안 등하교를 시켰다. 아직도 간혹 인생의 날씨가 흐릴 때 어머니 등에 업혀 있었던 그때가 떠오른다. 어머니는 평생 두 아들을 업고 인생을 살아온 것이다. 그렇게 어깨와 허리가 무너지고 무릎이 닳았을 것이다.
어머니의 무릎은 세월에 닳아 무너졌지만, 의지와 헌신은 결코 약해지지 않았다. 나는 늘 내 인생의 무게를 혼자 짊어진 채 걸어왔다고 생각했는데, 돌이켜보니 자식이 온전히 스스로의 인생을 책임질 수 있기를 바랐던 어머니의 믿음과 의지에 기대 길을 걸어왔던 것 같다.
“50살 넘은 아들의 퇴근길 운전이 여전히 걱정스러운 어머니. 이제 아들 걱정은 내려놓으시고, 아픈 무릎으로 인생의 늦가을을 산책하시는 동안 아들에게 기대어 편안하게 의지하실 수 있기를.”
고경남 서울아산병원 소아청소년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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