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찬호의 뉴스메이커] 기울었어도 유럽은 여전히 표준…‘극단 회피 DNA’ 배워야
강찬호의 뉴스메이커 : 『먼나라 이웃나라』 이원복 교수- ‘유럽의 몰락’ 바라보는 ‘유럽 전도사’의 신유럽론
『먼나라 이웃나라』 저자 이원복 교수(78·덕성여대·석좌)를 만난 것은, ‘유럽 전도사’였던 그에게 ‘유럽의 몰락’, 정확히는 대한민국의 ‘유럽 졸업’이 맞는 것인지 묻고 싶어서였다.
“43년 전 만화를 처음 낼 때는 유럽은 우리에게 넘사벽 롤모델이었죠. 우리가 지금 물질적으로는 따라잡았다고 해도 우리 사회를 구성하는 ‘스탠더드’는 여전히 유럽이거든요. 유럽과 대등해질수록 그 스탠더드의 바탕을 이해해야만 진짜 선진국이 될 수 있죠.”
마침 그는 『먼나라 이웃나라』 북유럽 편을 준비 중이었다. 내년 초 발간을 목표로 북유럽을 여러 번 갔다 왔다. 유럽에 아직 배울 게 있다면, 그중에서도 변방인 북유럽에선 무엇을 배울 수 있는지 궁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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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량형부터 헌법까지 다 유럽산
유럽 이해해야 진짜 선진사회 돼
자유·평등 조화 등 배울 점 여전
혁신 부재 등 ‘유럽병’ 경계해야
」
양성평등·‘튀지 말라’, 북유럽 유전자
Q : 북유럽을 다루는 이유를 딱 한 가지 드신다면.
A : “우리 사회가 너무 극단으로 가고 있기 때문이죠. 1789년 프랑스 혁명부터 지금까지 세계사는 자유와 평등의 싸움인데 양자의 균형을 맞추는 나라일수록 잘 삽니다. 북유럽이 그래요. ‘프리퀄런스’의 전형입니다. 내가 만든 합성어인데 프리덤(자유)과 이퀄(평등)이 조화된 나라들이죠.”
Q : 유럽의 저성장이 고착되면서 국내엔 “유럽서 더 배울 것 없다”는 ‘졸업’론이 득세하는데요.
A : “아니죠. 현대 사회의 스탠더드는 유럽이에요. 유럽이 망해도 ㎞가 리로, ㎏이 근으로 바뀔 리 없잖아요. 자유민주주의나 법치 등 우리 헌정의 뿌리도 유럽산인데, 그 전제가 르네상스와 계몽주의예요. 신으로부터 인간을 떼내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를 창출한 것인데, 이 과정을 안 겪은 나라는 권위주의나 독재국가가 됐어요. 우리가 선진국에 진입한 만큼 더 근본적으로 유럽을 이해하지 않으면 실수하기 쉽다는 얘기죠.”
Q : 그렇다면 유럽 중에서도 북유럽을 알아야 하는 이유는 뭔가요.
A : “북유럽은 1066년까지 바이킹이 지배했습니다. 바이킹 남성들이 노략질 나가면 1~2년 걸려요. 마을의 모든 일은 여성들이 맡으니, 일찌감치 남성과 대등해졌죠. 또 목숨 걸고 노략질한 재물을 한쪽만 독식하면 안 된다는 게 도둑의 생리다 보니 ‘평등’도 DNA로 자리 잡았어요. 이게 천 년 동안 안 변하다 보니 여성에 참정권이 가장 먼저 주어지고 여성 대통령도 여럿 나온 나라들이 북유럽인 거죠. 한데 북유럽 국가들이 20세기 들어 주변을 보니 러시아·독일·영국 등 강대국들로 가득해요. 그래서 ‘튀지 말라’가 DNA가 됐죠. 때문에 북유럽인들은 겸손해요. 포르쉐 사면 바로 구설에 오르니 가장 많이 굴러다니는 차가 폭스바겐 파사트예요. 옷도 다들 저가 브랜드 입고 다녀 비슷비슷해요.”
Q : ‘얀테의 법칙’이 그래서 나왔나요.
A : “1933년 노르웨이 작가 악셀 산데모제가 소설 『도망자』에서 ‘얀테’란 가상 도시를 소개했어요. 거기선 모두가 모두를 감시해 튀는 사람을 따돌려버립니다. 그게 ‘누구도 특별하지 않다’는 ‘얀테의 법칙’으로 압축됐죠. 또 중요한 게 스웨덴의 ‘라곰’입니다. 스웨덴인에게 ‘커피 얼마나 따라줄까’ 하면 ‘라곰’이란 답이 돌아와요. 한마디로 ‘과유불급’인데 직역이 어려워요. 얀테와 라곰이 일상을 지배하는 곳이 북유럽이에요. 친구 만나 1시간 내내 한마디 안 할 만큼 과묵해요. 남을 방해하지도, 방해받지도 않고 자신의 영역을 지키는 문화죠.”
Q : 북유럽에서 배울 점은 뭔가요.
A : “스웨덴이 세금 천국이라지만 상속세를 90년대 없앤 나라예요. 이케아·볼보 등 재벌들이 상속세를 피해 외국에 나가 국부가 급감하니, 결단을 내린 거죠. 튀지 않으면서도 필요하면 바꾸는 거죠. 때문에 스웨덴은 부의 편중 비율이 세계 3위예요. 또 극단을 배제하고 합의를 추구하는 것도 배울 점이죠. 이 합의의 전제가 ‘평등’ 이란 게 중요해요. 부하 의견도 똑같이 존중하죠. 회의실 탁자는 원탁이고, 장관도 교수도 미화원도 서로 이름을 불러요. (교수이신데, 제자들이 ‘원복’ 이라 부르면요?)받아들여야죠. 그렇게 안 갈 수 없어요.”
‘애어른’ 한국, ‘사랑받는 선진국’이 답
Q : 문제점도 많지 않나요
A : “수입의 75%가 세금으로 나가요. 동기도 욕망도 없어지죠. 수당 받아먹고 나태해지는 거예요. 이건 배워선 안 돼요. 또 세금은 많이 떼는데 돌아오는 혜택은 극히 적죠. 공공자금이 낭비가 심한 탓인데 제일 큰 맹점이 의료예요. 제때 치료를 못 받으니 ‘객사(street die)’가 많아요. 스웨덴은 의사들이 10가구씩 책임지는 ‘주치의’ 방식인데 새 주치의 구하기가 별 따기예요. 환자 더 받아봤자 월급은 그대로니 기피하기 때문이죠. 검사 한번 받는데 서너 달은 기다려야 합니다. 스웨덴이 1·2차 대전 때 번 돈이 넘쳐나면서 시작한 게 복지예요. 복지의 단점이 시작하면 멈출 수 없다는 거죠. 또 ‘세금 달력(Taxeringskanlendern)’이 있어요. 이름만 치면 주민번호·전화번호·자동차 번호·주소에다 소득· 납세액 다 나와요. 사생활이 없어요. 액수가 죄다 비슷한 게 특징이에요.”
Q : 스웨덴은 2015년 중동 난민을 대거 수용했다 범죄 급증 등 혼란을 겪고 있다는데요.
A : “스웨덴은 2차대전 초반 독일이 승승장구할 때는 독일에 줄 섰다가 1943년 전세가 뒤집히자 미국·영국 편으로 돌아섰거든요. 이런 흑역사 탓에 ‘쿨’하게 보이려는 의식이 있어 난민을 수용한 거죠. 6·25 때 중립국 사찰단으로 온 나라도 스웨덴이에요. 문제의 난민들은 스톡홀름 남부 슬럼에 모여 사는데 범죄는 대개 그 내부에서 발생합니다.”
Q : 2012년 유럽 국내총생산(GDP)은 16조 달러로 17조 달러인 미국과 비등했는데, 10년 만에 미국 GDP는 27조 달러로 급증했지만 유럽은 18조 달러에 그쳤습니다.
A : “선진국병이에요. 화려했던 과거에서 못 헤어나오는 거죠. 북유럽만 봐도 스타 기업은 앵그리버드나 블루투스 정도죠. 스티브 잡스가 안 나와요. 혁신이 없으니, 끓는 물 속 개구리가 되고 있어요. 그럼에도 지구촌의 스탠더드로서 유럽은 앞으로도 몇십년은 갈 겁니다. 내 생각엔 북유럽은 조금 (좌측으로) 오버했고, 독일이 자본주의에 사회주의를 합리적으로 가미한 나라예요. 값싼 퍼블릭 명품과 강소 기업이 많아요. 미국은 약육강식 정글 모델이라 우리와 안 맞아요.”
Q : 한국의 로망이 유럽이었는데 따라잡고 나니 ‘아노미’ 국가가 됐다는 지적이 있습니다.
A : “강의 때마다 ‘선진국 되긴 시간문제인데 어떤 선진국이 돼야 하나’고 물었어요. 내 답은 ‘사랑받는 선진국’ 이에요. 선진국치고 욕 안 먹는 나라가 없잖아요. 그러니 우리는 상식에 맞게 행동하고 1위 집착증을 버려야 해요. 대외정책도 반칙 없는 상생으로 가고, 공적 원조 많이 해야죠. 우리는 식민지배 같은 나쁜 짓을 안 했기에 약소국들과 잘 지낼 수 있고 글로벌 이슈에 뉴 스탠더드를 제시할 능력도 있어요. 앞서서 생각해야 하는 나라가 된 거죠. 내가 『먼나라 이웃나라』 쓰면서 제일 뿌듯한 게 젊은이들 배낭여행 시킨 거예요. 이들은 서양에 콤플렉스가 없어 자신 있게 영어 하며 돌아다니는데 예의 바르고 공사가 분명해요. 이들이 ‘실례했습니다’고 하는 건 자신들도 존중받고 싶다는 얘기인데 어른들은 그걸 무시하니 대화가 안 통하죠.”
“난 보수 아닌 중도, 극단에서 자유로워”
Q : 한국이 정상에 오르자마자 내리막을 걷게 됐습니다. 해법이 있을까요
A : “여론에 얽매이지 않고 비전을 밀어붙인 메리 로빈슨 아일랜드 대통령을 들 수 있죠. 법인세를 30%에서 12.5%로 낮추고 노사 대타협을 실현해 서유럽 최빈국 아일랜드를 세계 2위 부국으로 만들었어요. 국민소득(10만 달러)이 영국의 2배에 달해 ‘가장 아름다운 복수’라 불려요.”
Q : 『먼나라 이웃나라』가 스테디셀러가 된 건 해외와 역사에 대한 이해가 남다른 때문 같은데요
A : “10년 독일 생활이 큰 자산이고, 한참 때는 1년에 8번은 해외에 나갔죠. 역사책은 여러 권 정독하면 공통점이 나오잖아요. 인터넷으로 검색해 종합하면 팩트는 대개 정확하게 나오죠. 그걸 바탕으로 씁니다.”
Q : 2002년 이회창씨가 장대를 쥐고 ‘商高(상고)’란 장애물을 뛰어넘으려는 모습을 그린 만평을 서울대 동창회보에 냈다가 ‘보수 꼴통’ 댓글 파동을 겪었는데요.
A : “난 댓글 안 봐요. 70% 이상이 감정에 매몰된 악플이어서죠. 난 내가 ‘보수’라곤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어요. 난 중도예요. 극단적 사고에서 자유로운 리버럴이죠. 문제의 만평은 1997년 대선에서 상고 출신 김대중 후보에 진 KS(경기고·서울대) 이회창씨가 2002년 대선에서도 상고 출신 노무현 후보와 맞붙은 상황을 그린 거죠. 동창들끼리만 보는 회보에 가볍게 그린 것인데 ‘보수 꼴통’으로 몰더군요. 당장 사과했죠. 당시 손석희 MBC 앵커도 그걸 질문했는데 바로 ‘잘못했다’고 했어요. 그러자 넘어가더군요.”
강찬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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