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과학기술계도 ‘월드 클래스’ 배출할 때 됐다
많은 국민이 ‘잉글랜드 프리미어 리그(EPL)’에서 뛰는 대한민국의 자랑 손흥민 선수의 활약을 보며 역시 ‘월드 클래스’라며 뿌듯해한다. 월드 클래스가 단순히 최고 연봉자나 득점왕을 넘어 프로축구 구단과 리그 전체를 긍정적으로 변화시킨 선수에게만 부여되는 영예로운 호칭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월드 클래스는 선수로서 최고의 품격과 위상을 의미하고, 시간이 지나도 레전드로 기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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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구개발 성과에 국민 관심 줄어
자율·책임 기반 R&D 정착 필요
젊은 연구자, 글로벌 난제 도전을
」
지난 십여 년간 추격자를 넘어 선도자로 거듭나야 한다는 비전은 대한민국 과학기술계의 시대적 사명이라 할 만했다. 세계 최초와 세계 최고를 향한 도전과 이를 뒷받침하는 제도 개선 노력이 부단히 시도됐다. 창의형·융합형·임무형 등 연구 사업에 따라붙는 다양한 수식어에서 그간의 고민이 고스란히 묻어난다. ‘세계 최초 독자 개발’과 같은 가슴 설레는 소식도 심심치 않게 들려왔다. 하지만 우리 과학기술계가 지금 월드 클래스라는 찬사 대신 자성과 혁신을 요구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지표만 보면 우리 과학기술은 눈부신 발전을 거듭해 왔다. 연구자의 역량·인프라·제도 등 모든 면에서 현격한 변화가 느껴진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성장과는 달리 연구자들이 보여줬던 열정과 치열함은 시간이 갈수록 옅어진다는 인상을 지우기 어렵다.
연구자의 위상과 연구 성과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줄어든 것이 그 방증이다. 과거와는 많이 달라졌다. 이는 촘촘해진 관리·평가, 그리고 결과에 철저히 연계된 보상 체계에서 연구자들이 미래를 바꿀 도전적 연구보다는 주어진 목표를 시간 내에 달성하는 타성에 빠졌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사실 새로운 발견을 향한 호기심, 번뜩이는 창의성은 연구자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본질이다. 이는 이성뿐 아니라 본능의 영역과도 맞닿아 있다.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생동감 넘치는 연구는 연구자의 자긍심·사명감과 같은 내적 동기와 자율성·보상 등 외적 여건이 만날 때 가능하다. 호모 사피엔스는 엄혹한 환경에서도 생존의 도구를 만들고 사용함으로써 인류의 조상이 될 수 있었다. 결국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인류의 기원 때부터 유전자(DNA)에 각인된 연구 본능을 다시 일깨우는 일이 아닐까.
챗GPT로 대표되는 ‘생성형 인공지능(AI)’부터 양자 컴퓨팅, 차세대 반도체까지 경제·안보의 기존 질서를 깨뜨릴 파괴적 기술의 등장으로 과학기술은 국가 생존 경쟁의 무대가 됐다. 잘 짜인 평가관리 체계 아래에서 이성으로 길든 연구가 아니라 본능을 자극하는 역동적인 연구로 탈바꿈해야 하는 이유다.
연구자들의 사그라든 열정을 깨울 국가 연구개발(R&D) 시스템의 체질 개선이 필요하다. 거창하고 복잡한 새로운 해법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연구자가 자긍심과 사명감을 가질 수 있는 임무를 정의하고 스스로 최선의 해법을 찾도록 자율과 책임에 기반을 둔 R&D 시스템을 정착시켜야 한다.
도전적 R&D의 아이콘인 미국 방위고등연구계획국(DARPA)의 성공 비결을 배울 만하다. 이 기관은 연구 사업에 정통한 프로그램 매니저(PM)에게 전권을 위임하고, 기획부터 성과 활용까지 모든 과정을 책임지게 한다. 다행히 우리에게는 반도체·이차전지 등 일부 분야에서 추격과 추월을 넘어 초격차까지 이룬 소중한 경험이 있다.
마침 정부도 R&D 예비타당성조사 폐지, 글로벌 공동연구 체계 정비 등 연구 시스템 혁신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이런 토양 위에서 자율성을 보장하는 제도와 함께 최선의 해법을 끝내 찾아내는 연구자의 치열함이 결합한다면 우리 과학기술도 선진국을 앞서 아무도 가지 못한 새로운 길을 개척할 수 있다.
내년도 정부 R&D 예산이 역대 최대 규모로 편성되는 등 그동안 우려했던 정책 이슈들이 사실상 해소됐다. 공은 이제 연구계로 돌아왔다. 정부의 강력한 혁신 의지에 화답하는 과감한 체질 개선으로 연구 현장에 도전과 혁신의 문화를 뿌리내리고, 국민의 요구에 부합하는 성과를 창출해야 한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스포츠·문화 분야 영웅들과 기업들이 하나둘씩 월드 클래스 반열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이제 과학기술계 차례다. 젊은 연구자들이 글로벌 난제를 해결해 존경과 찬사를 받기를 기대한다.
※ 외부 필진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오상록 한국과학기술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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