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사 5적? 애국지사? ... ‘독립문’은 누구의 글씨일까?
" “독립문이란 세 글자는 이완용이가 쓴 것이랍니다. 다른 이완용이가 아니라 조선 귀족 영수 후작 각하올시다.” (1924년 7월 15일자 동아일보) " 독립문은 서재필이 조직한 독립협회가 모금을 주도해 1897년 완공됐다. 문의 앞뒷면 현판석에는 각각 한글과 한자로 ‘독립문’이라 새겼는데, 글씨 쓴 이에 대한 기록은 27년 뒤 신문의 동네 명물 소개 기사 속 전언이 유일하다.
그렇다면 ‘독립문’은 누가 썼을까? ‘을사5적’ 이완용의 글씨라는 전언과 독립운동가 동농(東農) 김가진(1846~1922)이 썼다는 주장이 있다. 둘 다 독립협회 임원으로 서예 대가였다. 그러나 글은 곧 사람이라, 잘 쓴 글씨라고 다 같은 글씨가 아니다. 글씨에는 쓴 이의 삶의 궤적이 녹아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김가진이 ‘독립문’을 썼다는 얘기는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활동한 그의 며느리 정정화(1900~91)가 1987년 구술 집필한 회고록 『장강일기』에 있다. 이동국 경기도박물관장은 “1902년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언문학교를 설립한 동농이 쓴 한글학습교재와 한글 ‘독립문’의 훈민정음체를 대조해 보면 그 혁신성을 짐작할 수 있다”며 “간송본 훈민정음 원본이 1940년에야 안동에서 발견되는 등 글씨가 쓰일 당시에는 훈민정음의 존재도 알기 어려웠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한자 ‘독립문’ 글씨 또한 창덕궁부터 안동 봉정사까지 전국에 남아 있는 그의 편액 글씨와 필법ㆍ모양에서 유사점을 찾을 수 있지만, 이완용의 큰 글씨는 독립문 글씨의 필치와 다르다고도 덧붙였다.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도 “황해도 관찰사 시절 김가진은 먹으로 유명한 해주에서 ‘독립문 먹’을 만들어 전국에 배포했다”며 정정화의 기록을 뒷받침했다.
김가진은 대한제국의 대신이자 독립운동가이며, 당대 최고의 서예가다. 글씨로 인간 김가진을 다시 보는 전시 ‘백운서경(白雲書境)’이 서울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에서 23일 개막했다.
동농의 시와 서, 그가 전국에 남긴 편액과 주련의 탁본, 인장, 그가 대대로 살던 인왕산 백운동 계곡을 그린 겸재 정선의 ‘백운동천’, 위창 오세창, 백범 김구 등 교류한 독립운동가들의 글씨 등 250여 점이 나왔다.
동농 김가진 전시 추진위원장인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은 “동농은 만년에 중국의 미불과 동기창, 조선의 원교 이광사 서풍을 자기화해 동농체라 불리는 행ㆍ초서 서풍을 완성했다”며 “독립운동가ㆍ애국계몽가로서의 명성에 가려 잘 드러나지 않았던 서예가 김가진의 면모를 보여주겠다”고 설명했다.
1903년 고종은 중추원 부의장인 김가진에게 비원 감독을 겸임하게 한다는 칙서를 내렸다. 김가진은 오세창과 함께 창덕궁 후원의 여러 전각과 정자를 중수했다. 여기 직접 쓴 편액과 주련만 89건이다.
안동 봉정사를 비롯한 전국의 사찰에도 그의 글씨가 걸렸다. 황제와 승려를 비롯한 많은 이들이 그의 글씨를 원했다. 1905년 민영환 등과 함께 을사늑약 체결에 격렬히 반대했고, 뜻을 이루지 못하자 1906년 충남관찰사로 자진 좌천했다.
이처럼 신념의 관료였지만 집에서는 자상한 아버지였다. 아들 김의한(1900~64)의 첫돌을 기념해 손수 천자문(1901)을 써주며 마지막 장에 "힘써서 훗날 아비보다 낫다는 기쁨을 주기 바란다. 56세 옹"이라고 적었다.
그러나 ‘승어부(勝於父, 아버지를 능가한다는 뜻)’의 소망조차 사치였던 시절이었다. 유홍준 위원장은 "일제는 동농에게 작위를 내리며 회유했으나, 3ㆍ1운동이 일어나자 조선민족 대동단 총재로 일제에 저항하다 73세 노구로 허름한 늙은이로 변장하고 상해 임시정부에 합류했다"고 설명했다.
함께 망명한 아들 김의한은 임시정부의 선전위원, 임시의정원 의원, 광복군 정령을 지냈다. 며느리 정정화도 1920년 두 사람을 뒤따라 상하이로 망명, 26년간 임시정부의 안살림을 도맡았다.
임정의 큰 어른으로 독립자금을 모금하던 동농은 77세로 세상을 뜬다. 상하이에서 100여명의 만장 행렬이 이어졌고, 부의록에는 박은식ㆍ이승만ㆍ안창호ㆍ김구 등 임정 요인들이 이름을 남겼다.
상하이 만국공묘에 안장됐으나 문화혁명기에 비석이 부서지고 흔적만 남았다. 김의한은 한국전쟁 때 납북돼 평양의 애국지사릉, 정정화는 대전 국립현충원에 묻혔다. 성공회대 한홍구 교수는 “죽어서도 모이지 못하고 남북한, 중국에 뿔뿔이 헤어진 이산(離散)이 길 없는 길을 헤쳐 나가야 했던 독립운동가들의 궤적을 보여준다”고 했다. 전시의 마지막은 1922년의 사진으로만 남아 있는 동농의 묘비를 재현했다. 전시는 9월 19일까지. 무료.
권근영 기자 you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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