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토가 빨갛다'고 바꿔달라는 고객을 어쩔까요 [변방에서 안방으로 : 일하는 사람책]

최문희 2024. 7. 23. 1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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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포 작가 한승태의 세 번째 노동 에세이 <어떤 동사의 멸종>

일하는 사람의 기록을 담은 책을 소개한다. 송곳이 되어 준 작가의 경험과 필자의 지금을 들여다보아 변방에서 안방으로 자리를 넓혀 먹고사는 오늘의 온도를 1℃ 올리고자 한다. <기자말>

[최문희 기자]

세상에서 가장 세련되지 않은 행위는 함부로 판단하는 것이다. 상대방의 이야기를 듣고 그의 입장에서 짐작하려는 노력은커녕 충고를 늘어놓으며 확신에 찬 표정을 짓는 것. 인간의 행동양식 중 단연 촌스러운 포즈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쓰였다고 느끼게 만드는 글도 멀리하는 편이다. 비평과 견해는 사회와 나와의 치열한 갈등에서 비롯된 소산이어야 한다.

조언을 많이 하는 사람치고 절체절명의 순간에 돕는 사람은 적다. 있는 듯 없는 듯 곁을 지키다 슬쩍 구원이 되어 준 사람을 만난 일이 더 많았고 그런 고비가 곡진하게 쓰인 글, 당사자가 경험하고 기록한 글, 특히 노동 이후의 일기를 모은 이야기에 마음이 갔다. 거기엔 일에 대한 예찬과 번뇌, 자기연민에 빠졌다가 탈출한 자의 반성, 노동 사회에 대한 자각과 비판, 타인의 생애가 조각보처럼 펼쳐졌기 때문이다.

최근에 '세련된 르포 이야기'를 만나 밤잠을 설쳤다. 고백하건대 간만의 장기 휴가 동안 매일 걸었고, 매일 밤마다 작가 한승태가 쓴 책들을 손에서 놓을 수 없었다. 열 시간에 육박하는 등반을 마친 저녁, 그의 이야기에 매혹당해 민박집에서 피로를 까먹고 말았다. '내일 새벽부터 움직여야 하는데 어떡하지. 아오, 왜 재밌지.' 발바닥에 파스를 붙인 채 그의 책도 콩깍지 씐 듯 눈에 붙이고 말았다. 밝혀 두지만 나는 다독가가 아니다. 암만 좋은 책도 피곤할 땐 몇 페이지 넘기다 꿈나라로 간다. 

콜센터, 택배, 작가... 인공지능이 대체할 거란 직업들
 
 지난해 8월, 서울 광진구 동서울우편물류센터에서 한 작업자가 땀에 젖은 옷을 입고 폭염의 날씨 속에 우체국 택배 등 분류 배송 작업을 하는 모습(자료사진).
ⓒ 연합뉴스
 
나를 잠 못 들게 한 작가는 르포 에세이를 언급할 때 단골로 등장하는 한승태. 다양한 사회계급의 노동 경험을 에세이로 출판하는 해외 시장과 달리 국내는 노동에 관해 르포, 즉 취재하거나 겪은 바를 시리즈로 내놓는 작가가 흔치 않다. 있더라도 사회부 기자들이 팀 차원에서 그 역할을 수행하는 편이며, 일터에 잠입해 취재한 기록을 단편처럼 엮은 것들이 대다수다. 그나마 국내에는 '업세이(본업과 에세이를 합친 말)', 혹은 연구기관이나 노동운동가가 쓴 책들이 주류를 이룬다.

한승태는 스스로를 '사소하고 보잘것없는 일들의 기록자'라고 말한다. 세간이 궁핍하다고 여기는 직업군에 종사하며 버텨온 하루들을 수십 권의 일기에 빽빽이 적어왔다. 그렇게 완성된 문장엔 유머가 있고 타인에 대한 찰진 애정이 있다. 사명감은 둘째고, 누구나 그렇듯 벌어야 먹고살 수 있기에 땀 흘려온 사람들의 요지경 세상사가 얼큰하게 쓰여 있다.

작가는 성향상 평범한 직장인으로 살기 어렵다는 것을 일찍이 절감하고 대학을 졸업한 뒤 궁금했던 업들의 세계로 뛰어들었다. 그리하여 꽃게잡이 배 선원, 돼지농장·양계장과 비닐하우스 일꾼 등이 되어 기록한 직업 순례기를 차곡차곡 세 권의 책에 담았다. <퀴닝>(개정판), <고기로 태어나서>에 이어 최근에 나온 책이 바로 <어떤 동사의 멸종>이다.

그의 세 번째 노동 에세이 <어떤 동사의 멸종>은 '전화받다, 운반하다, 요리하다, 청소하다, 쓰다'라는 챕터로 이뤄져 있다. 작가는 앞으로 인공지능으로 대체되어 소멸할 직업의 자리에 자기 하루를 포갰다. 이 기록을 다르게 말하자면 콜센터 상담사, 택배 상하차 일을 하는 '까대기', 주방 보조·청소일 하는 사람, 작가의 하루들로 불러볼 수 있겠다.
 
  책 <어떤 동사의 멸종>
ⓒ 시대의창
 
한승태는 인공지능의 대체 가능성이 90% 이상인 직업 중에서, 역사상 오래됐으며 도시에 사는 사람이 하루에 한 번 이상 마주할 법한 일들에 뛰어들었다. 그가 빌딩에서, 지하 주방 등에서 일한 기록을 읽으며 만나는 또 다른 재미는 본문 하단에 쓰인 각주. 음악가, 웨이터 등 작가가 자신의 노동을 반추하며 논한 또 다른 직업의 인공지능 대체 확률이 깨알같이 표기돼 있다. 확률은 직업군마다 다양한데, 읽다 보면 이 확률들에 별안간 무심해진다. 왜일까.

지옥 같은 일터에서 건진 참깨같은 성취감

어쩌면 그가 달아놓은 각주들은, "정직한 통계에도 일정한 함정이 숨겨져 있다(<고기로 태어나서>)"고 전에 밝혔던 작가가 파놓은 함정일 것이다. 즉, 특정한 직업들이 사라질 확률이 높든 낮든 그와 무관하게 최선을 다해 일하는 평범한 사람들의 오늘을 더 집중하게 하는 일종의 장치로 읽힌다.

AI가 그 무수한 일자리들을 빼앗거나 말거나 책에는 "다부지고 강단 있는" 노동자들의 초상이 각자 다른 개성의 모양새로 선명하게 그려져 있다. 확률과 통계의 커튼을 걷어내면 사람의 실루엣이 비로소 보인다. 특히 작가는 일하는 사람의 처지를 함부로 슬퍼하거나 노동의 고통을 미화하지 않는다.
 
"내가 처음으로 찾아간 곳은 콜센터였다. 콜센터가 내 작가 경력에 남긴 최고의 성취는 오랫동안 고민해 온 묘비 문구를 결정짓게 도와준 것이다. 이름 옆에 딱 이렇게만 적을 생각이다. '콜센터가 제일 힘들었다.'"
-<어떤 동사의 멸종>(한승태) 중에서
 
춘천의 비닐하우스를 비롯해 아산의 돼지농장에서 일한 기록 등을 담은 전작 <퀴닝>에서 매일같이 돼지 똥을 치운 경험을 회고한 그는 이미 노동 경험을 업종별로 보유한 사람. 즉 일에 관해선 어느 정도 도가 텄을 테다. 그럼에도 악취가 코를 찌르는 돈사의 오물은 "물과 비누만 있으면 씻어낼 수 있지만" 사람들이 입으로 쏟아낸 "오물은 1년, 2년이 지나도 말끔히 사라지는 법이 없고 갑자기 기억 속으로 파고들어 분노로 온몸을 부들부들 떨게" 만들었다. 
작가에 따르면 콜센터 상담사의 일과는 여덟 시간 동안 컴퓨터 앞에서 자신에게 달린 악플들을 소리 내어 읽는 일과 같다. 고객들은 언제나 필요 이상의 친절, 상식 이하의 미션 해결을 요구한다('토마토가 빨갛다'고 상품을 바꿔달라고 한 요청이 예시로 실려 있다).
 
 실화 기반, 콜센터 노동자가 된 현장실습생의 비극을 다룬 영화 <다음 소희> 중 한 장면.
ⓒ 트윈플러스파트너스㈜
 
떼쓰는 고객들이 즐비한 지옥 같은 일터에서 고객의 '상식적이고 자연스러운' 요청을 해결하고 감사하다는 목소리를 들었을 땐 놀랍게도 "보람찼다." 감정노동의 극한 장소라 불리는 콜센터에도 성취감이 있었다.
 
"삶의 허무함을 몰아내는 감각이 분명 우리가 하는 일에 녹아 있었다. 다만 그 감각을 경험하기 위해선 거대한 원석에서 참깨만 한 다이아몬드를 추출할 때처럼 어마어마한 양의 감정을 낭비해야 했다. 그리고 그 감정은 밖에서 이 일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견해와는 다르게 우리가 유한하게 보유한 에너지의 일부였다."
- <어떤 동사의 멸종>(한승태) 중에서
 
어쩌면 우리 모두 참깨만 한 노동의 성취를 뇌 해마 어딘가에 엔진처럼 저장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콜센터 상담사로 분투하며 얻은 '참깨만 한 노동'의 행복감을 작가는 빠트리지 않고 술회한다.

그 와중에 극한 노동을 버텨내는 동료와 버티지 못하고 떠나는 동료, 직장에서 절대 만나지 말아야 할 관리자와 챙겨주는 관리자 등 다양한 인간군상들이 그의 이야기에 등장한다. 그가 겪은 노동은 누군가가 또 그러한 오늘을 겪어내듯 온갖 삶의 맛을 끓여낸 진한 도가니탕이다.

관찰자가 아니라 실제 동료가 되어보는 연습

한승태가 구사하는 이야기엔 큰따옴표가 많다. 대화형 문장이 많다는 얘기다. 르포 에세이를 읽다 보면 지나치게 연구자적인 입장을 견지하느라 현장에 처한 당사자들의 개성이 소거됐다고 느낄 때가 있다. 즉, 관찰자의 견고한 '전지적 시점'이 취재의 목적을 잃고 이야기를 잡아먹을 때다.

그런 이야기엔 특정 분야의 산업재해 발생률과 처우 개선을 위한 당면 과제만 머리에 모호하게 남는다. 결국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의 표정이 이야기라는 수면 아래 가라앉고 만다. 한승태의 글에는 일하는 사람들의 표정이 천태만상으로 일렁인다. 

그의 글은 독자에게 관찰자의 입장이 아닌, 일하는 사람의 동료가 되어보는 연습의 눈을 길러 준다. 만화 <원피스>의 루피가 "너, 나의 동료가 되어라!" 하고 모험의 세계에 같이 입성할 것을 제안했듯이.

르포르타주를 공부한다면 <어떤 동사의 멸종> 마지막 챕터 "마무리하며: 쓰다"를 일독하길 권한다. 논픽션이 "공동체의 투병기"인 까닭, 작가가 자신의 결점을 글에 드러내야 하는 이유를 만날 수 있다. 르포 작가가 지녀야 할 윤리들이 꿀팁처럼 담겼다.

양계장과 사육장, 자동차 부품공장 등 동물의 살점과 똥, 이주민과 내국인의 갈등이 난무하는 노동 현장에서 한승태는 일관되게 들여다봤다. 같이 일하는 사람의 말습과 살아온 내력, 온갖 모순에 번민하는 자신의 마음을. 그는 '동료들'의 처지를 연민으로 보지 않으며 싸구려 위로를 내뱉지도 않는다. 그의 책에 나오는 큰따옴표는 그래서 힘이 세다. 그것은 '신성한 노동'이 아닌 노동 안에 '신성한 숨'을 뱉고 삼키는 사람이 있음을 알게 하는 울타리다.

한승태 작가는 "한국어에서 가장 공격적인 단어가 '상관없어'라는 말"이라며 이렇게 염원한다. 사람과 돼지가, 고시생과 선원이, 사장과 직원이, 부자와 가난한 사람이 서로 상관있게 되기를 바란다고. 2049년 AI가 소설가를 대체할 거라는 전망이 무색해지는 순간이다. AI는 글을 써야할 이유도 바람도 없는 무생물이다.

책 말미, 그는 "서로가 서로에게 상관있게 만드는 글을 쓰고 싶다"고 밝힌다. 그것이 성공했다는 증거는 찾아볼 수 없다고 담담히 고백하는데, 왠지 증거를 내밀지 않는 게 독자의 도리인 것만 같다. 그럼에도 출근이 이어지는 내 여름을 청명하게 해준 작가의 쓰기 근육이 기운차게 탄탄하길 바라는 염원이 나 역시 든다. 그리하여 달아보는 다짐 같은 독후 한줄평.

"이 책을 읽고 멸종해가는 나와 동료들에게 한 뼘 더 고요히 상관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졌습니다. 적어도 몹시 피곤한 어느 하루에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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