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작 꿈꾼 후계자의 최후, 상류층의 복수법

안지훈 2024. 7. 23. 1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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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지훈의 뮤지컬 읽기] 김범의 뮤지컬 데뷔작 <젠틀맨스 가이드 : 사랑과 살인편>

[안지훈 기자]

2000년대 후반 엄청난 인기를 누린 드라마 <꽃보다 남자>의 OST를 부르고, "거침없이 하이킥"이라는 대사를 치면 객석에선 웃음이 새어 나온다. <꽃보다 남자>와 <거침없이 하이킥>에 출연한 배우 김범이 무대 위에 있기 때문이다. 김범이 코미디 뮤지컬 <젠틀맨스 가이드 : 사랑과 살인편>(아래 '젠틀맨스 가이드')을 통해 데뷔했다.

<젠틀맨스 가이드>는 애드리브를 허락할 만큼 유쾌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지만, 내용은 살인으로 점철되어 있다. 가난하게 살던 주인공 '몬티 나바로'가 어느 날 자신이 성을 소유한 다이스퀴스 가문의 후계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자신이 가문의 백작이 되기 위해 앞선 후계자들을 살해하는 과정이 우스꽝스럽게 그려진다.

2018년 국내에 처음 소개된 이후 올해 네 번째 시즌을 맞이한 <젠틀맨스 가이드>는 '몬티 나바로' 역에 김범과 손우현, 송원근을 캐스팅했다. 1인 9역으로 다이스퀴스 가문의 인물들을 모두 연기하는 '다이스퀴스' 역을 정상훈, 정문성, 이규형, 안세하로 이어지는 쿼드러플 캐스팅으로 구성했다. 이외 허혜진과 류인아가 몬티의 연인 '시벨라 홀워드'를 연기하고, 김아선과 이지수가 몬티와 사랑에 빠지는 다이스퀴스 가문의 여인 '피비 다이스퀴스'를 연기한다. <젠틀맨스 가이드>는 오는 10월 20일까지 압구정에 위치한 광림아트센터 BBCH홀에서 공연된다.
 
 뮤지컬 <젠틀맨스 가이드> 공연사진
ⓒ (주)쇼노트
 
백작 되기 위한 고군분투

김동연 연출가는 <젠틀맨스 가이드>라는 코미디 뮤지컬을 이야기하며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는 찰리 채플린의 말을 인용했다. 뮤지컬을 보다 보면 왜 연출가가 채플린의 말을 인용했는지 금세 알아차릴 수 있다.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백작이 되어야만 하고, 백작이 되기 위해 자신보다 앞선 후계자들을 살해해야 하는 몬티 나바로, 그리고 몬티에 의해 살해당할 후계자들의 운명은 비극적이다. 하지만 그 과정은 코미디로 포장되기에 희극처럼 보인다.

비극과 희극이 교차하는 이들의 이야기는 몬티의 가난에서 시작된다. 몬티는 가난한 탓에 모두에게 무시당한다. 자신이 다이스퀴스 가문의 후계자임을 알게 되고, 다이스퀴스 가문에 도움을 청하는 서한을 보내지만 조롱만 당한다. 후계자 중 한 명인 '애스퀴스 다이스퀴스 2세'는 몬티에게 냄새가 난다고도 한다. 영화 <기생충>에서 기택(송강호 분) 가족을 상징하는 '가난의 냄새'가 연상되는 장면이다.

여기서 무시당하는 사람(몬티)보다 더 우스꽝스러운 무시하는 사람(다이스퀴스)의 모습은 웃음을 자아낸다. 오히려 몬티는 세련됐고, 후계자들은 어딘가 엉성하다. 웃으며 지나칠 수 있는 이 장면을 좀 더 들여다보면, 기득권자가 다른 이들을 무시하는 이유를 발견할 수 있다.

사회학자 노르베르트 엘리아스와 존 스콧슨은 "기득권자는 자신의 세계에 균열이 생길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낙인을 찍고 모욕을 준다"고 설명한 바 있다. 극에서도 이런 장면은 꾸준히 등장한다.

이후 후계 순위가 점차 상승한 몬티가 은행원이라는 직업을 갖게 되고, 번듯한 옷을 차려입으니 사람들은 더 이상 무시하지 않는다. 몬티는 어느덧 기득권에 편입됐다. 사회학자 엘리아스가 자신의 대표작 <문명화 과정>에서 열거한 상류층의 문화를 조금씩 체득했기 때문이다. 계획대로 일이 착착 진행되는 몬티 앞엔 백작 지위와 인정만이 기다리고 있는 듯하다.
 
 뮤지컬 <젠틀맨스 가이드> 공연사진
ⓒ (주)쇼노트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

몬티는 끝내 백작 지위에 오른다. 다이스퀴스 가문의 모든 걸 손에 넣게 된 것이다. 몬티는 백작이 되는 과정에서 언제든 기회만 되면 살인을 감행해야 했기에 주머니에 독약을 넣고 다녔다. 이제 몬티에게 그 독약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되었다. 그렇게 몬티는 자기가 소유한 성에서 행복을 즐긴다.

바로 그때, 몬티 곁을 맴돌던 청소부가 무대 2층에 다시 모습을 드러낸다. 순진한 표정으로 몬티에게 순종하던 그는 또 다른 다이스퀴스 가문의 후계자로, 그가 백작이 되기 위해서는 몬티가 죽어야만 한다. 그는 몬티가 한대로 독약을 주머니에 넣고 몬티를 내려다본다. 그렇게 <젠틀맨스 가이드>가 끝난다.

뮤지컬은 끝났지만, 몬티의 이야기는 끝난 게 아니다. 몬티는 백작 지위를 노리는 새로운 후계자 '천시 다이스퀴스'로부터 끊임없이 목숨에 대한 위협을 받을 것이다. 이후의 이야기를 더 상상해 보자. ▲천시 다이스퀴스가 몬티를 죽이고 새로운 백작이 된다 ▲그런 천시를 노리는 또 다른 후계자가 등장한다 ▲그가 천시를 죽이고 백작이 된다. 이런 식으로 이야기는 반복될 수 있다.

이스마일 카다레의 휴고상을 수상한 소설 <부서진 사월>이 연상된다. 소설은 한 가문의 누군가가 다른 가문으로부터 살해당하면 반드시 복수를 해야 하는 관습법을 다룬다. 관습법에 의해 이 가문의 누군가가 죽고, 복수를 통해 저 가문의 누군가가 죽고, 또 복수를 통해 이 가문의 누군가가 죽는다. 복수는 무한 반복된다.

이런 세상에서 태어난 이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누군가를 죽여야 하는 운명, 그리고 그 탓에 죽어야 하는 운명을 지니게 된다. 소설은 곧 운명의 부조리함을 읊조린다. 

<젠틀맨스 가이드>의 엔딩과 이후 벌어질 이야기는 <부서진 사월>이 제기하는 문제의식과 맥락이 닿는다고 볼 수 있다. 결국 <젠틀맨스 가이드>라는 작품은 운명의 부조리와 인간 실존의 문제를 담은 비극을 그려낸 게 아닐까. 
 
 뮤지컬 <젠틀맨스 가이드> 공연사진
ⓒ (주)쇼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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