싼 전기·가스 끌어다 쓴 현세대…부담은 미래세대가[위기의 부채공룡]②
원가보다 싸게 쓰는 사람과 이자로 인상요금 부담할 사람 달라
요금 인상 늦어지면 안정적 전력공급 차질 불가피
한국전력공사와 한국가스공사의 막대한 부채는 두 공기업만의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 원가 이하로 전기와 가스를 공급한 탓에 적자를 면치 못한 한전과 가스공사는 빚을 내 회사를 운영하고 있다. 빚은 공짜가 아니다. 이자가 더해져 시간이 지날수록 더 늘어나고, 요금을 급격히 올려야 하는 악순환의 고리를 만들게 된다. 또 값싼 전기와 가스는 현 세대가 쓰면서도 이 부담을 미래 세대에 전가하는 요금 주체의 불공정성도 발생시킨다. 한전과 가스공사의 재무위기를 더 방치할 경우 설비투자 감소에 따라 안정적인 전기·가스 공급에도 악영향을 줄 것이라는 지적이 제기된다.
23일 한전과 가스공사에 따르면 지난해 연간 이자비용(연결기준)은 한전이 4조5000억원, 가스공사는 1조7000억원으로 총 6조2000억원에 이른다. 하루 이자만 170억원에 달하는 셈이다.
◆이자 내려 부채 더 늘어…수익자부담원칙에도 어긋나
한전은 지난해 4조5416억원 규모의 영업손실을 기록하면서 이자비용을 고스란히 부채로 쌓았다. 1조5534억원의 영업이익을 낸 가스공사도 수익으로 이자를 감당하지 못했다. 이 같은 위기상황은 두 공기업 수장의 발언에서도 극명히 드러난다. 김동철 한전 사장은 지난 5월 "한전의 노력만으로는 대규모 누적적자를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는 한계에 봉착했다"고 했다. 최연혜 가스공사 사장은 "벼랑 끝에 선 심정"이라고 토로했다.
250조원에 이르는 한전과 가스공사의 부채는 두 기업의 재무상황 악화를 넘어 여러 악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크다. 정연제 서울과학기술대 에너지정책학과 교수는 "한전과 가스공사의 부채는 막대한 이자를 유발하고 결국 돈을 제대로 벌지 못하는 상황에서 이자를 내려면 부채를 더 늘릴 수밖에 없는 구조"라며 "실제 전기와 가스를 (원가보다 낮은 가격에) 사용한 사람과 나중에 이자를 반영해 오른 요금을 부담해야 하는 사람이 다른 문제가 발생한다"고 지적했다.
이처럼 전기와 가스요금은 수익자부담 원칙에 위배된다. 한전 관계자는 "전기는 필수재여서 한시라도 전력공급이 중단돼서는 안 되기 때문에 요금인상이 계속 늦어지면 결국은 공적자금 투입이 불가피할 것"이라며 "전력산업에 대한 막대한 공적자금이 투입될 경우 전력공급 비용을 미래 세대로 미루게 되고, 전기를 많이 사용하는 고소득자 및 대기업에 대한 특혜 논란을 유발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도시가스 시장 상황도 비슷하다. 가스공사는 2008~2012년 발생한 막대한 원가와 공급가의 차이인 미수금을 2013년 요금인상과 이후 지속된 저유가에 힘입어 2017년까지 5년에 걸쳐 회수했다. 하지만 지금은 중동전쟁 등 글로벌 에너지 위기 상황 탓에 고유가 국면이 장기화할 것으로 예상돼 과거와 같은 방식의 미수금 회수를 기대하기 힘들다. 요금 인상 없이는 '미수금 증가→차입금 증가→재무구조 악화→가스공사 신용등급 하락→이자비용 증가→요금인상 요인 추가 발생→미래 세대 부담 증가'의 결과로 이어지게 된다고 가스공사는 설명했다.
◆원가 이하 전기·가스가 에너지절감 동기 약화
원가 이하의 전기·가스 공급은 소비자가 에너지 소비량을 줄여야 할 유인을 감소시키는 결과도 초래한다. 가스공사 관계자는 "국제 시세 대비 현저히 낮은 요금은 불필요한 에너지 과소비를 조장하고 고가의 에너지 수입을 증가시켜 국가 경상수지 악화로 이어지게 된다"고 우려했다. 실제 에너지 수입액은 2021년 1124억달러에서 2022년 1908억달러로 70% 급증했다. 이 탓에 2022년 한국의 무역수지는 역대 최대 규모인 475억달러 적자를 기록한 바 있다. 한전에 따르면 한국의 에너지 자급률은 18%에 불과하지만 오랜 기간 지속된 낮은 요금으로 전기소비량은 세계 최상위, 에너지 효율은 최하위 수준을 기록하고 있다. 한전 관계자는 "국내 전력 소비의 비효율성을 개선하고 전기 과소비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전기요금의 정상화를 통한 가격신호 기능 회복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한전과 가스공사의 적자경영이 지속될 경우 안정적인 전력공급이 어려워지고 전력산업 생태계 자체가 붕괴할 우려도 있다. 전력산업은 미래 필요가 예상되는 설비를 선제적으로 건설하고 장기간에 투자금을 회수하는 특성이 있다. 정부가 올 5월 말 공개한 제11차 전력수급기본계획(전기본·2024~2038년)' 초안에 따르면 2038년 최대 전력수요는 128.9GW로 지난해 최대 수요(98.3GW) 대비 30.6GW가 늘어날 전망이다. 반도체 산업과 인공지능(AI)의 확산으로 큰 폭의 증가가 예상되는 데이터센터와 산업부문을 중심으로 한 전기화 수요가 늘어난 데 따른 것이다. 필요한 설비를 적기에 확보하기 위한 대대적인 투자가 필요하다.
하지만 당장 빚을 갚기에 급급한 한전으로서는 설비투자 축소를 피할 수 없는 상황이다. 설비투자 축소는 결국 전력기자재와 건설발주 물량 감소로 이어져 관련 산업을 위축시킬 우려가 크다. 이는 장기적으론 전력산업의 경쟁력 약화를 초래해 안정적인 전력공급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이다. 이미 정전 건수가 늘고 있다. 한전에 따르면 지난해 정전 건수는 1046건으로 2022년 933건보다 12.1%(113건) 증가했다. 한전은 송배전 보강 설비투자에 2021년 2조5579억원에서 지난해 2조4295억원으로 줄였다.
가스공사의 재무여건 악화는 더 비싸게 액화천연가스(LNG)를 도입하게 되는 결과로 이어질 수도 있다. 가스공사 관계자는 "높은 부채비율 등 악화한 가스공사의 재무여건은 LNG 판매자와의 가격 협상력 저하로 이어져 LNG 도입단가 상승 및 국민 부담 증가 우려가 있다"며 "2022년과 같은 글로벌 에너지 위기가 재연돼 다시 LNG 가격이 폭등할 경우 가스대금 지급불능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세종=주상돈 기자 do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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