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혼' 선언했던 당당한 신입 변호사, '원나잇'이 왜 나와
[이진민 기자]
'쪽수'로 몰아붙인다고 여성 서사가 되는 건 아니다. 주인공이 여성이거나 메인 캐릭터에 여성이 많은 게 충분조건이 아니다. 관건은 여성 캐릭터가 '어떻게 존재하고 기능하냐'다. 좋은 여성 캐릭터를 뽑아놓고 겨우 이성 관계에 목매게 하거나, 그가 가진 소신을 꺾어버린다면 남는 건 '어쨌든 여자가 나오긴 나왔다'는 허탈한 만족감뿐이다.
지난 12일 시작한 SBS <굿파트너>는 '워맨스'라는 타이틀을 내걸고 홍보할 만큼 여성 서사로서 기대감을 품게 했다. 이혼이 '천직'인 스타 변호사 차은경(장나라 분)과 이혼은 '처음'인 신입 변호사 한유리(남지현 분)가 앙숙 사이에서 제목처럼 '굿 파트너'가 되는 과정을 그린다.
두 캐릭터가 켜켜이 쌓아갈 여성 서사를 기대했건만, 현실은 '비혼' 선언에 '원나잇'이란 찬물을 끼얹었다는 것. 과연 <굿파트너>는 구색 맞추기용 '워맨스' 그 이상을 보여줄 수 있을까.
▲ <굿파트너> 스틸컷 |
ⓒ SBS |
신입 변호사 한유리의 패기는 어딘가 익숙하다. 선배들의 말에 대들면서 소신을 지키고, 그러다가 현실에 부딪혀 성장하는 유리의 모습은 '신입'하면 떠오르는 전형적인 장면이다. 그래서 차은경의 말을 꺾고, 초반부터 "이곳에서는 나의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며 퇴사를 선언하는 유리의 캐릭터성이 신선하지는 않다. 여타 캐릭터와 다른 한유리의 한 끗은 '여성 캐릭터'로서 한유리다.
유리는 숏컷에 정장 차림으로 다니며 메이크업을 거의 하지 않는다. 말투는 단호하고 감정 표현에 주저함이 없다. 언제나 자신의 의사를 정확히 표현하는 유리는 지금까지 미디어에서 다뤄왔던 일반적인 '신입' 캐릭터와 비슷할지는 몰라도 '여성 신입' 캐릭터와는 다르다.
▲ 권위를 갖기 어려운 여성 사회초년생을 따라한 <SNL 코리아> 속 '주기자' 캐릭터 |
ⓒ 쿠팡플레이 |
<굿파트너>의 한유리는 '주기자'와 다르다. 완곡 화법을 쓰거나 미소 짓지 않는다. 당당하고 자신감 넘치는 그의 모습은 '여성 신입'에 대한 편견을 깨며 새로운 캐릭터를 제시했다. 그런 그가 외친 '비혼' 선언도 마찬가지다.
유리는 남성 동료와 술자리를 가지면서 결혼에 대한 소신을 밝힌다. "혼자 살아도 짠 내 나는데 결혼하면 오죽하겠냐"며 "인간은 무언가 나눌 수 없는 이기적인 동물"이라며 비혼을 선언한다. 그의 다짐은 단번에 떠오른 것이 아니다. 아버지의 외도에 더해 이혼 변호사로서 일하며 결혼이란 구조에 의문을 품게 됐고, 혼자서도 당당한 유리의 캐릭터성이 섞이며 만들어진 가치관이었다.
현실 여성들의 비혼 선언 역시 가볍지 않다. 그 안에는 남성 중심적인 사회와 가부장제를 향한 반항과 진정한 자립을 꿈꾸는 욕망이 어려있다. 그렇기에 드라마 속 유리의 선언에 공감하고 지지하려는 여성들도 많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 장면은 이후 이상하게 연결된다.
<굿파트너>의 유리는 비혼 선언 후 남성 동료와 '원나잇'을 가진다. 그것도 인사불성으로 취해 아침이 되어서야 '원나잇'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물론 비혼과 연애는 별개일 수 있다. 다만, 신념 있는 여성으로 주관이 확실했던 한유리가 동료였던 남성 변호사 앞에서 갑작스레 가볍고 무계획적으로 변한 건 당황스럽다. 시청자들은 "원나잇 장면이 굳이 필요했냐", "한유리의 캐릭터성이 붕괴되었다" 등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게다가 '원나잇' 장면 이후 유리는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황급히 호텔을 떠난다. 직장에서 동료와 만나자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더듬고 "식사 더치페이하자", "점심은 따로 먹자" 등 부끄러워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러한 연출은 이전 회차까지 부각했던 유리의 당당함과 대조되고, 이성 관계에 속절없이 무너지는 캐릭터처럼 비치게 한다.
<굿파트너>에서 비혼을 언급한 장면 이후 왜 하필 '원나잇' 장면이 등장해야 했을까. 워맨스를 기대하는 이들에게 유리와 다른 남성 간의 로맨스는 그야말로 수요 없는 공급이다. 우리가 기대하는 건 '진정한 사랑을 찾은' 한유리가 아니다. 또 다른 여성 캐릭터인 차은경과 '진정한 파트너가 되는' 한유리다. 영화 <델마와 루이스>까진 아니어도, '워맨스' 타이틀이 무색하지 않은 <굿파트너>를 기대해도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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