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현목의 시선] 당신의 ‘코모레비’는 무엇입니까
중년 남성은 이웃집 노파의 비질 소리에 눈뜨자마자 이불을 개고, 화분에 물을 준다. 세수와 함께 콧수염을 다듬고, 자판기에서 캔커피를 뽑은 뒤 출근길 차 안에서 카세트테이프로 올드 팝을 듣는다. 점심시간엔 필름카메라로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살을 찍고, 퇴근 후 목욕탕에 들른 뒤 단골 선술집에서 한잔하고, 헌책방에서 산 소설을 읽으며 하루를 마무리한다.
영화 ‘퍼펙트 데이즈’의 주인공 히라야마(야쿠쇼 코지)의 일과다. 도쿄 도심의 화장실 청소부인 그는 경건한 의식을 치르듯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한다. 반사경으로 변기의 보이지 않는 구석까지 닦아낸다. “어차피 더러워질 텐데”라는 동료의 푸념에도 정성스런 손길은 멈추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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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 같은 영화 ‘퍼펙트 데이즈’
그 순간만 존재하는 ‘코모레비’
일상 속 빛나는 순간들 찾아야
」
무료한 듯한 일상이지만, 그에겐 충만한 하루의 연속이다. 자연과 음악, 책을 벗 삼아 살아가며 아름다운 하늘과 햇빛에 미소 짓는다. 이렇게 일상의 작은 변화에서 의미와 기쁨을 찾아간다.
아날로그적 교감도 그를 행복하게 만든다. 그에겐 스마트폰이 없다. 인화된 사진들 속에서 맘에 드는 사진을 고를 때, 아름다운 찰나를 포착한 기쁨이 손끝으로 전해진다. 손때 묻은 카세트테이프가 재생하는 건 노래 만이 아니다. 소중한 추억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그가 음반가게로 착각하는 스포티파이 같은 음원 플랫폼에선 불가능한 일이다.
그는 주변 사람들과도 눈으로 교감한다. 노숙자의 이상한 몸짓도 그에겐 춤사위다. 사람, 자연과 말 그대로 ‘공생’하며 살아간다.
유복한 여동생의 등장, 아버지와의 갈등을 암시하는 대사 등에서 그의 과거를 유추할 순 있지만, 영화는 전혀 드러내지 않는다. 대신 빔 벤더스 감독은 인터뷰에서 그의 과거를 설명했다.
“그는 성공한 사업가였지만, 채워지지 않는 허전함(때로는 혐오)과 함께 삶이 내리막으로 향해갔다. 죽음까지 생각하던 어느 날, 악몽에 시달리다 잠에서 깼다. 싸구려 호텔 방이었다. 왜 이곳에 있는지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머리가 깨질 듯 아픈 그에게 흔들리는 나뭇잎 사이로 햇살이 비친다. 창문을 내다보니, 구름 사이로 햇빛이 내리 쬐고 있었다. 순간 그는 깨달았다. 태양으로부터 1억5000만㎞를 여행해 자신에게 닿은 이 빛이 ‘당신은 단 하나뿐인 존재’라고 속삭여주고 있다는 걸. 이후 그는 ‘행복하지 않은’ 일을 그만두고, 화장실 청소부가 됐다. 자신을 행복하게 만드는 햇살과 나무를 늘 볼 수 있고, 남에게도 도움이 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의 삶을 바꿔 놓은 기적의 빛은 ‘코모레비’(木漏れ日,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빛)라 불린다. 그가 매일 코모레비를 찍는 건, 자신을 구원해준 빛과 나무에 대한 감사의 표시다.
그의 일상은 늘 똑같아 보이지만, 단 하루도 같은 날은 없다. 출근길에 올려다보는 하늘과 코모레비가 늘 다른 것처럼 말이다. 코모레비는 그 순간에만 존재한다. 우리의 일상 또한 반복과 차이의 연속이다. 반복되는 일상에서 의미 있는 차이를 만들어가는 게 충만한 삶이다. 히라야마가 조카에게 건네는 말(“다음은 다음, 지금은 지금”)에는 주어진 하루에 감사하며, 작은 행복의 조각들을 맞춰가는 삶의 자세가 녹아 있다.
영화를 보고서 수년 전 출근길 지하철역에서 만난 중년 남성이 떠올랐다. 전철을 기다리던 그는 창밖의 떠오르는 태양을 보며, 두 손을 맞잡고 “감사합니다”를 여러 번 읊조렸다. 귀중한 하루를 선물 받은 것에 대한 감사 표현 같았다. 출근길 내내 그에게 어떤 딱한 사연이 있을까 생각해봤다. 병마와 싸우는 환자일까, 실패를 딛고 일어선 사업가일까.
이젠 알게 됐다. 영화에서 히라야마의 과거가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지하철역의 그 남자 또한 연민의 시선으로 볼 필요가 없다는 것을. 과거에 연연하지 않고 찬란한 아침 햇살에 감사하며 충만한 하루를 보내려 하는 그에게 따뜻한 응원을 보내주면 된다. 출근길 아침 햇살이 그의 코모레비가 아니었나 싶다.
빔 벤더스 감독은 자신이 만든 캐릭터인 히라야마에게 편지를 썼다. ‘베를린의 일상 속에서도 항상 코모레비를 봅니다. 코모레비 덕에 나무와 잎새들, 바람과 빛에 감사하게 됩니다. 당신은 허구의 인물일지 몰라도 제겐 실재하는 사람이 됐습니다.’
영화 속 히라야마의 삶을 보면서,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사소하고 평범한 일들이 사실은 기적의 연속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나만의 코모레비를 찾아야겠다는 결심도 했다. 거창하진 않아도 다람쥐 쳇바퀴 같은 일상을 조금이나마 새롭게, 그리고 빛나게 해줄 그 무언가 말이다.
정현목 문화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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