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빌리 이야기’의 힘 [김선걸 칼럼]
도널드 트럼프는 ‘스토리텔링의 힘’을 안다.
부통령 후보로 39세의 오하이오주 상원의원 ‘J.D. 밴스’를 낙점하는 것을 보며 또 한 번 그 생각을 하게 됐다.
밴스는 서른두 살인 2016년에 ‘힐빌리의 노래’라는 회고록을 썼다. 애팔래치아 산맥 외딴 마을에 사는 빈곤층 백인 가족의 삶에 대한 자전적 에세이다.
2017년, 여론조사 결과 우세했던 힐러리 클린턴을 꺾고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에 당선됐다. 그때 이 책은 몰락한 공업 지역인 러스트벨트 백인 빈곤층의 심리를 대변했다고 평가됐다. 당시 국제부장으로 일했는데, 책을 중간에 놓을 수 없어 끝까지 읽었던 기억이 난다. 의미심장한 스토리인데 소설처럼 재미있게 썼다.
‘힐빌리(Hillbilly)’는 우리말로 ‘촌뜨기’라는 비하하는 표현이다. 밴스의 아빠는 양육권을 버렸고 엄마는 마약 중독자였다. 가족은 엄마와 생물학적인 아버지와 법적인 아버지, 그리고 자주 바뀌는 ‘아버지 후보’들이었다. 이복형제남매를 어디까지 형제라 불러야 할지도 헛갈렸다고 한다
밴스의 주변은 가난과 폭력, 무지와 무질서로 점철됐다. 그는 주변 친구들처럼 대마초나 피워대며 평생 늙어갈 확률이 높았다. 이런 어린 그를 끝까지 지켜준 사람이 그가 ‘할모(Mamaw)’라는 애칭으로 불렀던 외할머니였다.
물론 ‘할모’ 역시 다툼이 생기면 언쟁을 생략하고 곧장 방아쇠를 당기는 집안 출신이었다. 그러나 약물 중독의 친엄마가 어린 밴스를 위협해 경찰에 체포될 정도의 거친 환경에서도 할머니는 손자를 지키며 용기를 줬다. “절대 자기 앞길만 높은 벽으로 막혀 있다고 생각하는 빌어먹을 낙오자처럼 살지 말거라. 네가 하고 싶은 일이면 뭐든 할 수 있단다(63p)”라는 말이 할머니가 틈만 나면 했던 말이라고 한다.
오랜만에 이 책을 다시 펼쳤다. 기억과는 느낌이 다르다. 8년 전에는 미국 백인 빈곤층의 생소한 현실에 집중해서 읽었다. 그런데 지금 보니 마약과 폭력이 난무하는 그의 살벌했던 유년 시절이 따뜻하게 서술됐다는 느낌이 든다. 험악한 스토리가 이렇게 거부감 없이 읽히는 건 왜일까.
이유를 발견했다. 이 회고록의 전반에 흐르는 낙관적인 믿음, 그리고 따뜻한 가족애 때문이다.
그는 백인 노동자인 ‘힐빌리’들이 미국에서 가장 비관적인 집단이라고 설명한다. 라틴, 흑인계보다 다음 세대를 비관하는 비율이 높다.
그러나 밴스는 그렇지 않았다. “할모는 우리가 지구상에서 가장 훌륭하고 위대한 나라에 살고 있다고 가르쳤다. 어린 나에게는 큰 도움이 됐다. 집에서 벌어지는 사건이나 난동으로 괴로울 때도 삶을 스스로 개척할 수 있는 나라에 살고 있어 내 앞날은 밝을 거라는 믿음을 가졌다(310p).” 그를 힐빌리의 이방인으로 만든 요소는 바로 ‘낙관’이라고 서술한다. 그리고 이런 낙관으로 그는 예일대 로스쿨을 나와 미국 상원의원까지 된다. 낙관과 가족애로 충만한 그의 책은 그래서 거친 내용에 비해 재치 있고 밝은 느낌을 준다.
트럼프는 밴스를 부통령에 지명해 자기가 부족한 정직성, 신뢰성을 메웠다. 백인 노동자 ‘힐빌리’들과아메리칸 드림을 가진 사람들, 그리고 가족을 지키려는 사람들의 표도 얻었다. 무엇보다 ‘미래를 낙관하는 애국자들’의 표를 얻을 것이다.
스토리텔링의 힘이다. 정치는 바로 이런 것 아닌가 싶다. 미래를 긍정하고 위대한 나라를 꿈꾸는 사람들의 이야기로 같은 마음을 가진 국민들의 공감을 얻는 것.
트럼프는 그 힘을 아는 것 같다. 지금 한국의 리더들은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나.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269호 (2024.07.24~2024.07.30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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