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용진의 수학 인문학 산책]‘만족하다’와 ‘만족시키다’
우리말 중에 주로 수학에서만 쓰는 동사가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만족하다’ 또는 ‘만족시키다’라는 동사다. 수학에서 “다음 조건을 만족하는 (또는 만족시키는) 함수 f(x)를 구하시오”와 같은 문장이 많이 등장한다. 그런데 문법적으로 만족하다가 맞느냐 아니면 만족시키다가 맞느냐에 대한 논란이 예전부터 있었다. 그래서 대학수학능력시험이나 한국수학올림피아드 등 중요 시험에서 수학문제 출제진은 늘 만족하다파와 만족시키다파로 나뉘어 왔다.
국립국어원은 ‘만족시키다’로 결론
수학 교과서에서는 어느 쪽을 택해 쓰고 있을까? 교과서 집필진에게도 이것은 어려운 문제인지라 논란을 피하고자 만족에 대한 동사를 가급적 사용하지 않고 “~인 함수 f(x)를 구하시오”와 같은 문장을 주로 쓰고 있다. 그런데 참고서나 문제집에서는 만족하다파가 만족시키다파보다 좀 더 우세한 편이다. 그래서인지 수업시간에 대학생들에게 만족하다와 만족시키다 중 어느 쪽이 옳다고 생각하는지 손을 들어보라고 하면 만족하다파가 우세한 편이다.
나는 이 둘 중에 어느 편이 맞느냐 하는 문제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그것이 뭐가 그리 중요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다는 점이라고 생각한다. 이 문제는 우리 문화 중에 만연돼 있는 ‘무감각’과 ‘대충주의’의 좋은 사례다. “그냥 대충 하지” “뭣이 중헌디”와 같은 말을 자주 하는 사람을 까다롭지 않고 성격이 좋은 사람으로 여기던 시절도 있었다.
그러한 문화 때문인지 오랫동안 이 동사의 올바른 용법에 대한 결론을 내리지 않고 넘어가고 있었는데 그래도 다행히 최근에는 어느 쪽이 맞는지 결론을 내려야 한다는 의견을 가진 사람들이 많아졌다. 실은 이미 어느 정도 승부가 났는지도 모른다. 얼마 전부터 대학수학능력시험에서 ‘만족시키다’만을 사용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몇년 전에 국립국어원의 온라인가나다에 이에 대한 질문이 올라왔고 국립국어원은 다음과 같이 답하였다. “‘만족하다’는 ‘흡족하게 여기다’를 뜻하는 자동사로 목적어 ‘다음 조건을’ 뒤에 쓰일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마음에 흡족함’을 뜻하는 명사 ‘만족’에 사동의 뜻을 더하고 동사를 만드는 접미사 ‘-시키다’를 결합한 말로 목적어를 가지는 ‘만족시키다’를 써야 합니다.”
나는 이 대답이 해당 연구원의 개인적인 생각인지 국립국어원이 연구 끝에 내린 공식적인 결론인지 알지 못한다. 그러나 나는 국립국어원의 연구원들이 다음과 같은 것들을 고려해 주었으면 한다.
수학이라는 특수성 고려했으면
첫째, ‘만족하다’가 ‘흡족하게 여기다’라는 의미의 자동사라고 했지만 수학에서 쓰는 용법에서는 만족하는 주체가 다르다는 것이다. ‘사람’이 만족하는 경우와 ‘조건’이 만족하는 경우는 다르다. 즉, “길동이가 만족한다”와 같은 경우에는 만족하는 주체가 길동이므로 “길동이를 만족시킨다”가 맞겠지만 “조건을 만족시킨다”라고 할 때는 ‘조건’이 스스로 흡족하게 느끼는 주체가 아니므로 경우가 다르다는 것이다.
둘째, 논의되고 있는 동사는 주로 수학에서만 사용하고 있다는 특수성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 ‘만족하다’를 ‘흡족하게 여기다/마음에 흡족하다’의 의미라고 하지만 이것은 수학이라는 특수 영역에서의 용법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
결국은 만족하다를 타동사의 의미로도 쓸 수 있느냐 없느냐가 쟁점인데, 동양 3국에서는 이 동사를 어떻게 쓰고 있을까? 어원인 중국어에서는 만족(滿足)을 타동사(satisfy)의 의미로 쓴다. 그래서 중국어 용법을 그대로 수용한다면 ‘만족하다’가 맞다. 일본어에서는 한자어를 쓰지 않고 만족하다와 같은 의미의 타동사로 ‘미타스(みたす)’라는 말을 쓰고 있다.
존경하는 이오덕 선생님께서 쓰신 <우리글 바로 쓰기>라는 책에서는 ‘혹사시키다’ ‘실현시키다’와 같이 사동을 뜻하는 접미사를 남용하는 경우가 많다고 지적하고 있다. ‘~시키다’는 ‘혹사하다’ ‘실현하다’와 같이 써야 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나는 이와 같은 맥락에서 ‘만족시키다’보다는 ‘만족하다’를 지지한다.
이 문제는 좀 더 공론화하고 전문가들이 연구하여 최종적인 결론을 내려야 할 것이다. 만일 그렇게 내린 결론이라면 나는 어느 쪽이든 무조건 수용할 용의가 있다. 그동안 이 용어에 대한 혼란이 너무 컸기 때문이다.
송용진 인하대 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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