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을 읽다]페이팔 마피아의 '십년대계'‥트럼프에 올인
밴스 부통령 후보, '페이팔 마피아'들이 부통령 후보로 키워내
트럼프 당선 시 AI·가상화폐 등 美 과학 기술 정책 변화 노려
#1.지난 6월21일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은 데이비드 삭스가 운영하는 팟캐스트 올인(ALL IN)에 출연했다. 삭스는 ‘페이팔 마피아’로 잘 알려진 실리콘밸리의 거물이다. 트럼프와 실리콘밸리의 만남이 어색해야 하지만 이들의 모습은 달랐다. 너무나 친숙했고 조 바이든 대통령을 비판하는 발언이 연이어 터져 나왔다.
#2. 팟캐스트 녹화에 앞서 샌프란시스코의 호화주택에서 트럼프의 선거자금 모금 파티가 열렸다. 이 행사를 주도한 인사는 공화당 소속 J.D. 밴스 상원의원이었고 파티가 열린 집 주인은 데이비드 삭스였다. 트럼프는 최대 30만달러의 입장권도 모두 매진된 이 행사에 대단히 만족해했다. 오하이오주 상원의원이 민주당의 텃밭인 샌프란시스코에서 트럼프를 초대해 기금 모금에 나선 걸까. 밴스가 학창 시절의 인연을 계기로 실리콘밸리에서 벤처캐피털리스트로 활동하며 확보한 인맥 덕분이었다. 그 인맥들은 트럼프에게 밴스를 부통령 후보로 추천했고, 대선 승리에 도움이 될 것으로 판단한 트럼프는 흔쾌히 승낙했다.
2024년 대선이 4개월도 남지 않은 상황에서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당선이 유력해지고 있다. 실패로 끝난 트럼프 암살 시도가 오히려 그의 당선 가능성을 끌어올리고 있는 가운데 흙수저 출신 J.D. 밴스 부통령 후보의 등장은 달리는 말에 박차를 가하는 모양새다.
이번 선거에서 놀라운 점 중 하나는 실리콘밸리의 표심이다. 제조업 몰락으로 나락에 빠지던 미국 경제를 되살리고 전 세계의 혁신을 주도 중인 실리콘밸리 기업들은 지금껏 진보적 성향을 띄어왔다. 하지만 올해 선거를 계기로 상황이 달라지고 있다. 이제 실리콘밸리가 키운 인물이 부통령이 되고, 4년 뒤에는 대통령이 될 수도 있다는 예상까지 나온다. 미국의 실리콘밸리 정책은 물론 향후 과학과 기술, 경제 분야에서 큰 변화를 불러올 수 있다는 예상도 확산하고 있다. 트럼프 뒤에 있는 실리콘밸리 인사를 파악한다면 향후 예상되는 미국의 기술 육성 정책도 예상해 볼 수 있다.
◇8년전 1명에 그쳤던 실리콘밸리 트럼프 지지..대세로 굳어지나= 2016년 미 대선을 앞두고 열렸던 공화당 전당대회는 트럼프 가족 잔치라는 비난을 들었다. 공화당 핵심 인사들이 전대 참석은 물론 찬조 연설을 외면할 때 한 실리콘밸리 인사가 연단에 올랐다. 그의 이름은 피터 틸(Peter Thiel). 틸은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와 함께 ‘페이팔’이라는 금융결제 회사를 운영하다 이베이에 매각해 벤처 갑부가 된 후 투자자로 변신했다. 그의 이름은 페이스북의 첫 투자자라는 명성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틸은 트럼프가 선거에서 승리한 후 실리콘밸리 인사들을 이끌고 뉴욕의 트럼프 타워를 방문하기도 했다.
8년 전 대선에서 사실상 틸이 홀로 실리콘밸리 내 트럼프 캠프를 주도했다면 2024년 선거판은 완전히 달라졌다는 평가가 나온다. 머스크는 트럼프의 확실한 우군으로 부상해 대규모 선거자금을 기부하고 있다. 또 다른 페이팔 마피아인 데이비드 삭스도 동참했다. 페이팔 마피아만의 현상이 아니다. 실리콘밸리 대표 벤처캐피털인 앤드리센 호로위츠 주인인 마크 앤드리센과 벤 호로위츠도 트럼프를 지지하고 나섰다.
이들의 영향력은 단순한 지지에 그치지 않는다. 트럼프 당선 시 차차기 대통령을 노리는 부통령 후보까지 만들어냈다. 밴스 상원의원이 부통령 후보가 된 것은 페이팔 마피아들의 적극적인 지원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다. 밴스가 트럼프의 ‘아바타’이거나, 백인 흙수저 출신 정치인인 것은 오히려 부차적인 이유라는 평가가 나온다.
◇페이팔 마피아가 만들어낸 부통령 후보, 실리콘밸리 출신 백악관 주인으로 이어지나= 밴스를 지금의 자리로 이끈 공로의 90%는 틸에게 있다는 것이 정설이다. 밴스는 예일대 재학 당시 특강을 위해 학교를 방문한 틸과 운명처럼 만났다. 밴스는 학업을 마친 후, 미 대륙의 정반대편인 샌프란시스코로 향했다. 밴스는 그곳에서 틸의 벤처캐피털(VC)인 미스릴캐피털에 합류해 기술 분야 인사들과 교류하기 시작했다. 밴스의 자전적 소설 ‘힐빌리의 노래’ 추천사를 쓴 것도 틸이었다. 실리콘밸리에선 틸의 수제자가 밴스라는 소문이 돌았다. 밴스는 어느 정도 경력을 쌓은 후 자신의 VC를 설립해 독립했지만, 어느 순간 정계 진출을 꿈을 꾸기 시작했다.
이때도 틸이 결정적인 지원을 한다. 틸은 밴스의 선거를 지원하는 ‘슈퍼팩’에 거금을 기부한 데 이어 반트럼프 진영에 있던 밴스를 설득해 트럼프와 만남을 주선하고 트럼프의 지지를 얻도록 지원했다. 트럼프의 지지 선언은 밴스가 2022년 중간선거에서 오하이오주 상원의원에 당선하는 ‘승리 보증수표’를 찍어줬다.
이번 대선에서 밴스가 부통령 후보가 되는 데도 페이팔 마피아들의 지원이 결정적이었다. 미 언론들은 머스크가 밴스를 부통령 후보로 만들기 위해 트럼프와 통화했다고 전하기도 했다.
◇규제에 지친 실리콘밸리, 트럼프와 통하다= 실리콘밸리가 트럼프 지지에 나선 것은 바이든 민주당 정부의 규제에 대한 반발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대표적인 예로 머스크와 바이든의 갈등이다. 바이든은 친노조 성향의 대통령이다 보니 재임 기간 내내 노조가 없는 테슬라를 패싱해왔다. 미국 전기차 산업을 주도한 1위 기업을 외면한 채 노조가 있는 기존 자동차 업체만 챙기다 보니 머스크의 불만도 쌓여갔다. 코로나19 기간 불거진 공장 운영에 대한 논란과 캘리포니아주의 자유주의적 성향이 머스크와 지속해서 충돌한 것도 머스크가 공화당 성향으로 돌아서는 데 영향을 미쳤다.
바이든 정부의 가상화폐 규제 움직임도 적잖은 영향이 있었다는 평가가 나온다. 가상화폐와 블록체인에 대한 투자를 늘린 실리콘밸리 측은 정부의 가상화폐 규제가 불만일 수밖에 없다. 이는 트럼프가 최근 가상화폐에 우호적인 발언을 이어가는 상황과도 맞물린다. 가상화폐 대표 투자자로 꼽히는 윙클보스 형제가 트럼프 측에 비트코인으로 기부한 것도 규제 완화를 노린 움직임으로 봐야 한다.
인공지능(AI)에 대한 바이든 정부의 시각이 육성보다는 규제 쪽에 방점이 찍힌 것도 실리콘밸리를 자극한 요인이라는 해석도 나온다. 대표적인 예가 엔비디아와 오픈AI에 대한 반독점 규제 논란이다. 미 연방거래위원회(FTC)는 최근 마이크로소프트, 엔비디아, 오픈AI가 시장을 독점하고 있다며 조사에 나설 방침을 밝혔다. 실리콘밸리 트럼프 지지 세력들은 AI가 초기 단계인 상황에서 독점 논란으로 기업을 몰아세우는 것에 노골적인 불만을 제기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트럼프는 삭스의 팟캐스트인 올인에 출연해 AI 규제가 아닌 AI 지원을 위해 필요한 전력과 핵발전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소형모듈원전(SMR), 핵융합 등의 분야는 실리콘밸리의 주요 투자처이기도 하다. 트럼프가 자신을 지지하는 실리콘밸리 인사들과의 교류를 통해 많은 지식을 축적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실리콘밸리의 지원으로 새로운 백악관의 주인이 나온다고 해도 그들의 뜻대로 정책이 이뤄진다는 보장은 없다. 밴스도 과거 구글과 같은 빅테크(대형 정보기술 기업)에 대한 불만을 제기한 바 있다. 그럼에도 밴스가 부통령이 된다는 것은 실리콘밸리와의 소통을 위한 고속도로가 열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밴스와 막역한 사이로 알려진 트럼프의 큰아들 도널드 트럼프 주니어는 "기술 분야에 대한 밴스의 지식을 높게 평가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아시아경제 유튜브 채널의 '[AKRadio]백종민&강희종의 테크토크 '실리콘밸리는 왜 트럼프 뒤에 섰는가' 편에서 보다 자세한 내용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백종민 기자 cinqange@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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