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명당을 수백 년 함께 누려온 마을 이야기

이완우 2024. 7. 22. 1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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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여 년의 역사와 설화를 간직한 임실 주천마을

[이완우 기자]

 매봉, 노산, 주천마을 앞 독산
ⓒ 이완우
 
임실 오수면 주천리(酒泉里)의 마을 뒤편은 응봉(鷹峰, 608m)과 노산(魯山, 540m)이 이웃하여 병풍을 두른다. 마을 가운데로는 두 산에서 내려온 개울이 아침 햇살의 깨끗하고 맑은 정기를 받은 서출동류수(西出東流水)로 흐른다.

옛날에 선조들은 대서 절기에는 삼복더위를 피해서 계곡을 찾아가 시원한 물에 발을 담그는 탁족(濯足)을 즐겼다. 여름 무더위에 돌도 큰다는 대서 절기에 주천마을 앞 멀리 만행산 천황봉이 깃발처럼 우뚝한 기상을 북돋우고 있었다.

이 주천마을은 '수레기'라고도 부르는데, 술이 솟는 샘이라는 '술내기'가 어원으로 보인다. 마을의 북서쪽 노산(露山)을 임실 지역에서는 역사적으로 단종의 군호인 노산(魯山)으로 여기고, 여러 가문이 이 산을 바라보며 삶의 터전을 잡아 왔다.

주천마을은 500여 년의 역사와 설화를 간직하고, 마을 안에 두 개의 명당이 함께하는 풍수지리 이야기가 인상적이다. 
 
 귀노재
ⓒ 이완우
 
이 마을의 입향조는 곽도(郭都, 1390~1458)이다. 그는 단종이 왕위에서 물러나자, 벼슬을 버렸다. 단종이 영월에 유배되자, 치악산에 은둔하여 세상을 잊고 학문에만 뜻을 두었다.

단종이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등되자 단종을 연상하는 이곳 노산에 숨어 호를 노재(魯齋)라 하고, 단종을 향한 일편단심으로 여생을 보냈다. 세조가 곽도의 충심을 가상히 여겨서 특별히 출사하라고 불러도 응하지 않았다고 한다. 훗날 그의 아들 곽득형(郭得亨)도 이곳에 정착하여 귀노재(歸魯齋)를 지었다. 

이수(李洙)는 호가 호은(壺隱)이고 아호는 주천(酒泉)이다. 그는 효령대군(1396~1486)의 후손으로 어지러운 정국을 피하여 이 마을에 은거하였다. 이수는 멀지 않은 둔덕마을에 낙향한 왕실 종친인 춘성정 이담손(李聃孫, 1490~?)의 조카였다.

이수는 호산재(壺山齋)를 짓고, 마을 앞 독산(獨山)의 반석 위에 파여 있는 주발 같은 돌 구멍에 술을 채워 놓고 술잔을 기울이며 어지러운 세상을 잊었다. 이수는 자손들에게 신신당부하였다고 한다. "효와 충을 벼리 삼아라. 과거에 응시하지 말아라. 공명(功名)을 멀리하라."
 
 귀노재 뒤 명당 묘소에서 본 옥토망월 명당 형국
ⓒ 이완우
 
이곳 주천마을의 풍수지리상 중심 지형은 마을 앞 개울가에 자리한 자그마한 봉우리인 독산이다. 이 독산은 이 마을에 두 개의 명당을 이루는 핵심이다. 이 독산을 노산 기슭의 곽도 가문에서는 달로 인식하여 옥토망월(玉兎望月) 명당으로 삼고, 응봉 기슭의 이수 가문에게는 독산을 말 먹이 명당의 말 먹이로 본다.  
이 독산의 개울가 바위에 지름 20cm, 깊이 11cm의 주발만 한 구멍은 이수에게는 세상 근심을 잊는 은둔의 매개체였다. 그러나 이 지역 백성들은 '한때 어떤 이가 술샘 바위 구멍에서 술이 많이 나오라고 지팡이로 후벼 팠는데, 그 이후에는 술이 전혀 안 나왔다'는 이야기를 흥미롭게 파생시켰다. 그런데 이렇게 백성들에게 전승되는 이야기가 임실의 향토지인 운수지(雲水誌, 1675년)에 실려 있다.
 
 호산재
ⓒ 이완우
 
옥토망월 명당. 마을 뒤 응봉과 노산의 능선을 병풍으로 하여 곽득형의 묘소가 마을 앞 개울가의 독산을 바라보며 멀리 천황봉을 앞두고 옥토망월 명당을 형성한다. 마을 뒷산 줄기인 매봉에서 노산까지는 1.2km 거리이며, 노산에서 독산까지는 1.6km, 옥토망월 묘소에서 독산 480m 거리이다. 

귀노재에서 100여m 거리의 옥토망월 명당 묘소는 묘의 벌안 지표면을 상당히 낮게 파내고 봉분을 썼다고 한다. 그래야 마을 앞 독산이 떠오르는 달처럼 더 높이 보인다는 것이다.

그런데 봉문 앞의 표지석 비석은 땅에 묻힐 아래 부분을 제법 땅 위에 드러나게 높여놓았다. 마치 토끼가 깨금발 딛고 달을 쳐다보는 모습처럼 재치 있는 발상이었다. 마을 가운데를 흐르는 개울은 하늘의 은하수가 된다. 이 마을이 옥토끼가 은하수(개울) 건너 보름달을 쳐다보는 형국이라니 동화 속의 마을같이 느껴졌다. 
 
 호산재 뒤 명당 묘소에서 본 말 먹이 명당 형국
ⓒ 이완우
 
말 먹이 명당. 응봉의 산자락 한 줄기가 이 마을로 벋어내려 말 형국을 이루고 그 머리에 해당하는 곳에 말 먹이 명당이 있고, 이곳에 이수의 묘소가 있다. 매봉에서 독산까지는 2.1km 거리이고, 말 먹이 명당 묘소에서 40여m 거리의 호산재 옆을 지나서 독산까지는 120m 거리이다. 호산재의 정문은 취성문(聚星門)이라 쓰인 편액이 걸려있어, 호산재에 덕망 높은 선비들이 모인다는 의미이다. 

이수의 호인 호산(壺山)은 속이 빈 아가리가 작고 배가 볼록한 호리병처럼 '속이 텅 빈 산'이니, 마음을 비운 선비의 자화상 같다. 말 명당 형국의 앞들에 여러 선비들이 말을 매어놓고 호산재에서 학문을 토론하였을 것이다.

선비들이 매어 놓은 말들은 말 먹이 명당에 해당하는 독산에서 풀을 뜯고 개울물을 마셨을까? 말 먹이 명당이라는 풍수 지리와 호산재에서 세상을 잊고 학문에 전념했던 선비들 모습이 잘 어울린다. 
 
 노산과 독산의 술바위, 왼편 아래 바위에 주천 구멍이 보인다.
ⓒ 이완우
 
풍지 지리의 명당들은 대체로 개인과 가문의 영달과 부귀를 우선 추구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런데 이 마을에서는 옥토망월과 말 먹이의 두 명당이 단종을 향한 충절과 세상과 절연하는 방편으로 지조 높은 선비들이 학문에 전념하는 의미로 이해될 수 있다. 

귀노재의 용마름은 중앙 부분 기와 위에 꿩 2마리를 잡상으로 올렸다. 꿩(雉)의 한자를 파자하면 '화살같이 나는 새'이다. 꿩은 화살처럼 직진하여 앞으로 날아가므로, 충신의 충직한 행로를 비유한다. 또한 귀노재 옆 사당 건물의 출입문 문설주 위에는 달을 중심으로 양쪽에서 달을 받드는 두 마리의 토끼 형상을 올렸다. 토끼의 받드는 달은 특이하게 붉은색이어서, 이 조각에서 단종을 향한 일편단심을 엿볼 수 있다. 호산재의 취성문에서는 불의한 세상에 타협하지 않는 선비들의 기개를 느낄 수 있다.

임실 오수면 주천리 주천마을은 매봉과 노산 아래 개울을 사이에 두고 집성촌을 이루어, 두 명당을 500여 년 동안 사이좋게 이어왔다. 매봉과 노산 아래 귀노재와 호산재에 자리 잡은 곽도와 이수의 정신이 현재까지 이 마을에 살아있기 때문일 것이다. 역사와 설화가 전해오는 오래된 마을의 돌담길, 이끼 낀 재각과 풍수 지리의 명당 이야기를 찾아 떠나는 역사 문화 탐사는 마음을 설레게 한다.
 
 임실 주천마을 명당 개념도
ⓒ 이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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