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빵야' 전성우, 장총이 되다 "역사 소재 작품, 책임감 느껴요" [엑's 인터뷰]
(엑스포츠뉴스 김현정 기자) 드라마 소품 창고에 박혀있던 99식 장총 한 자루. 보기에는 낡은 총일뿐인데 알고 보면 한국 근현대사의 비극이 녹아있다. 연극 ‘빵야’에서 이 장총은 말을 한다. 드라마 작가 나나가 쓰는 글에서 빵야라는 이름으로 의인화돼 가슴 아픈 이야기를 이어간다.
2007년 뮤지컬 '화성에서 꿈꾸다'로 데뷔해 다양한 연극, 뮤지컬, 드라마에서 안정된 연기와 섬세한 표현을 보여줬던 배우 전성우가 빵야와 한 몸이 돼 무대에 오르고 있다.
“‘빵야’는 저에게 새로운 소재로 다가왔어요. 총을 의인화했다는 것, 또 이 작품이 주는 메시지가 새롭게 다가왔죠.”
2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군의 주력 소총으로 역사의 생생한 현장 가운데 있었지만, 역사의 흐름에서 밀려난 낡은 장총 한 자루는 무대 위에서 소품이 아닌 인물이 돼 자신이 목도한 한국 현대사를 이야기한다.
사람이 아닌 장총, 또 긴 역사를 지닌 장총을 연기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터다. 전성우는 자신만의 해석을 보태 캐릭터를 완성했다.
“장총은 몸이 노인인 거지 노인의 모습을 한 총이라고 생각하진 않았어요. 세월의 흔적이 묻어있다고 생각했죠. 만들어진 당시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세월이 묻어있는 게 보였으면 했어요.
직전에 언어 없이 움직임으로만 하는 ‘네이처 오브 포겟팅’ 무대에 올랐어요. 치매를 앓으며 점점 기억이 없어지는 역할을 맡았죠. 50대의 남성이 기억 속의 10대로 돌아가면서 일어나는 일들을 움직임으로 보여주는 거거든요. 모든 걸 움직임으로 표현하면서 배운 것들이 있었어요. 저라는 사람은 한 사람인데 변화를 주기 위해 어떤 움직임과 행동을 해야 할까 했죠. 나이가 들수록 호흡에 무게가 생기거든요. 어린아이였을 때의 호흡과 나이가 들었을 때의 호흡이 점점 내려가는 걸 느꼈고 ‘빵야’에도 많이 대입했어요."
빵야는 1945년 인천 조병창에서 만들어졌다. 만주에서 독립군을 토벌하는 일본 관동군의 조선인 장교 기무라를 시작으로 8·15 광복 전후에는 중국팔로군 강선녀, 제주 4·3사건 때는 제주도 국방경비대 병사 양무근과 서북청년단원 방신출, 한국전쟁 중 한국군 학도병 이원교와 북한군 의용대 조아미의 손을 거친다. 빨치산 토벌부대 보아라부대 병사 반동식과 빨치산 소녀 지설화도 빵야의 주인이었다. 이후 심마니, 사냥꾼, 포경꾼, 건설업자, 영화 제작자 등을 거쳐 드라마 소품 창고로 왔다.
이후 한물간 드라마 작가 나나가 그런 빵야를 발견하면서 시나리오 소재로 되살아난다.
“표면적으로 보면 총을 의인화한 건데 결과적으로 보면 나나의 상상 속 인물이거든요. 역사의 세월, 흔적이 남아있는 인물의 모습을 담아보려고 했어요. 나나와 비슷한 결과 느낌을 담기 위해 같이 상상하고 고민해 봤어요.
연극 '빵야'를 하면서 어렴풋이 기억나는 역사도 있고 몰랐던 부분도 있고 대본 안에서 생각하게 된 것도 있는데, 역사적인 사건을 다시 한번 찾아보는 계기가 됐어요.”
극에서 나나는 역사를 이야기로 쓸 자격에 대한 두려움을 이야기한다. 기억하고 기록하고 증언하기 위해 이야기를 쓰고 있는 것인지, 이야기를 쓰기 위해 이야기를 쓰고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다. "내가 진심으로 그들과 함께 아파하고 있는 걸까, 아니면 이야기의 완성을 위해 그들의 고통을 내 마음대로 편집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라며 고민한다.
전성우 역시 그런 고민과 생각에 몰두하면서 진심으로 연기에 임하려고 한다.
“예술 하는 사람의 고민인 것 같아요. 작가도, 배우도 각자의 책임감을 느껴요. 역사 소재를 이용해서 관객에게 전달하는 매개체 입장이긴 하지만 단순히 즐기는 유희로 쓰기에는 너무 무거운 소재잖아요. 역사를 알리려는 목적도 있지만 나의 성공을 위한 도구라는 측면도 분명히 있으니까요. 그래서 저도 그 부분에 대해 고민해요.
창작 예술을 하는 분들이라면 누구나 인물을 표현할 때 너무 가볍게 전달되는 건 아닌지, 그저 웃고 즐기고 눈물 흘리는 소재로 사용되는 게 아닐지 고민하는 것 같아요.
공연을 하게 되면 마음 아픈 인물들이 많아요. 그런 인물을 표현할 때 단순하게 이미지로 표현하는 것보다는 그 인물이 이렇게 할 수밖에 없던 이유를 전달하고 있어요. 각자 캐릭터가 가진 게 다 다른데 어떤 이유에 의한 행동이라고 생각하거든요. 특히 아픔이나 슬픔 같은 경우에는 조금 더 고민을 많이 해요. 진심으로 다가가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9명의 인물 중에 가장 마음이 아프거나 애착이 가는 인물을 물었다. 그러자 “나도 사람인지라 그때그때 인물의 감정에 이입하는 게 달라진다”라고 답했다. 같은 무대에서 같은 캐릭터를 선보이지만, 회차마다 느낌이 다르단다.
“어떤 날은 이 인물에게 마음이 쓰이고 어떤 날은 이 인물에 마음이 아프고요. 사실 나쁜 인물들도 있고 너무나 순수한 인물도 있어요. 순수하다고 다 좋고 나쁘다고 다 싫은 건 아니지만 그들의 입장을 매번 다르게 보게 돼요.”
사진= 높은엔터, 엠비제트컴퍼니
김현정 기자 khj3330@xports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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