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퍼 엔저]③"엔저 계속되면 스태그플레이션"...'日 선진국 탈락' 경고, 노구치 교수
"엔저, 정부의 잘못된 정책이 누적된 결과"
"미일 금리차 축소되지 않으면 엔저는 계속될 것"
물가 상승으로 임금, 소비↓…日경제 스태그플레이션에 빠졌다
"엔저에 중독된 일본 정부가 나라를 망치고 있다."
일본 경제 분야의 석학인 노구치 유키오 일본 히토쓰바시대 명예교수는 엔저(엔화 약세) 현상을 이같이 평가했다. 그는 지금의 엔저 현상이 정부의 잘못된 정책이 누적된 결과라고 비판한다.
2012년, 아베 신조 전 총리의 경제 부흥 정책이었던 아베노믹스가 시행되고 일본 기업은 소위 '마약 같은 엔저 효과'에 취했다는 것이다. 굳이 기술 혁신에 힘쓰지 않더라도 엔화 약세에 힘입어 손쉽게 기업의 이익이 늘고 주가가 상승했다.
그러자 엔화 약세에 안주하고자 하는 경향은 심화됐고 경제정책도 엔화 약세를 유지하는 방향으로 쏠렸다. 결국 '나라를 망치는 엔저'가 일본 기업의 기술혁신을 게을리하게 해 일본을 침체의 늪에 빠지게 했다는 것이다.
노구치 명예교수는 지난 11일 아시아경제와의 서면 인터뷰에서 "일본은 2002년경부터 엔저 정책을 추진해 왔고, 2013년 이후 대규모 금융 완화를 통해 엔저 정책을 더욱 강화했다"며 "이러한 정책에서 벗어나지 못한 탓에 2022년 이후 미국의 급격한 금리 인상에 대응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는 이 같은 상황 속에선 엔저가 계속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노구치 명예교수는 엔저의 직접적인 원인이 '미국과 일본의 금리차'라고 언급했는데, 금리차가 축소되려면 일본이 파격적인 금리 인상을 단행해야 한다. 하지만 내수 부진, 무역 적자 등으로 약해진 일본 경제가 발목을 잡고 있어 강력한 금리 인상은 쉽지 않은 상황이다.
그는 일본 경제가 현재 스태그플레이션(경기 침체 속 물가 상승)에 빠져 있다고 진단했다. 기업의 이익과 주가가 상승하고 있지만, 엔화 약세에 의해 물가가 상승하면서 실질 소득이 감소하고 실질 소비도 줄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물가상승분을 뺀 일본의 실질임금은 지난 5월까지 26개월째 감소하고 있다. 일본의 가계소비도 여전히 답보 상태에 있다.
일본 경제가 회복되기 위해선 정부의 노력이 중요하다고 그는 강조했다. 노구치 명예교수는 "금융 정상화와 더불어 불필요한 보조금은 중단돼야 한다"고 말한다. 인기를 얻기 위해 돈을 뿌리는 정책이나, 반도체 공장을 일본에 유치하기 위해 보조금을 지급하는 등의 시도가 이뤄져선 안 된다는 것이다. 또 대학 기초연구 강화, 디지털화 추진 등 게을리했던 기술 혁신을 위해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는 점도 지적했다.
노구치 명예교수는 일본 대장성(현 재무성) 관료 출신의 원로 경제학자다. 일본 도쿄대 응용물리학과를 졸업, 미국 예일대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았고 일본 대장성에서 근무했다. 도쿄대와 와세다대 등 여러 대학의 교수직을 거쳐 현재는 히토쓰바시대 명예교수로 재직 중이다. '일본에서 가장 활발하게 저술 활동을 하는 경제학 권위자'로 알려져 있다. 경제뿐만 아니라 다양한 분야에서 100여권의 책을 출간했다. 국내에선 2022년 '일본이 선진국에서 탈락하는 날'을 출간해 일본이 잘못된 엔저 정책에서 벗어나기 위해선 인기에 영합하는 돈 뿌리기 정책만 일관해선 안 된다는 점을 강조했다.
다음은 노구치 교수와의 일문일답.
- 최근 엔저(엔화 약세)가 심화되고 있다. 과거의 잘못된 정책이 누적된 결과인가.
▲그렇다. 일본은 2002년경부터 엔저 정책을 추진해왔고, 2013년 이후 대규모 금융 완화를 통해 엔저 정책을 더욱 강화했다. 이러한 정책에서 벗어나지 못한 탓에 2022년 이후 미국의 급격한 금리 인상에 대응하지 못했다.
- 지난 3월, 일본은행(BOJ)의 금리 인상 조치에도 불구하고 엔저가 장기화되는 모습이다. 최근 엔저가 계속되는 원인은 미국의 금리인하 지연과 같은 대외적 요인 때문인가, 혹은 내수 부진과 같은 내부적 요인 때문인가.
▲엔저의 직접적인 원인은 미일 금리차가 축소될 전망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본이 쉽게 금리를 인상하지 못하는 이유는 일본 경제가 약하기 때문으로, 이 점에서 내부 요인의 영향도 크다.
- 일본은행이 파격적으로 금리를 올리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일본 경제가 약화되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좀비 기업의 파산 등이다.
- 일본의 경직된 물가와 임금이 엔저를 더 심화시켰다는 이야기도 있다. 올해 일본의 경기가 개선되고 임금과 물가가 크게 상승했음에도 불구하고 엔저가 계속되는 원인은 무엇인가.
▲환율은 기본적으로 금리차에 의해 결정된다. 미일 금리차가 크게 축소될 전망이 없는 한, 엔저는 계속될 것이다.
- 정부의 대규모 부채로 인해 일본은행이 기준금리를 쉽게 올릴 수 없다는 이야기도 있다.
▲장기 금리가 상승하면 국채 이자 지급 부담이 증가해 정부의 재정 부담이 커진다. 그러나 그동안의 저금리 정책으로 이자 부담이 경감된 결과, 재정 규율이 느슨해지고 불필요한 보조금이 증가한 것도 사실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정부의 이자 부담이 증가하는 것은 바람직할 수 있다.
- 엔저가 언제까지 계속될 것이라고 예상하나.
▲미일 금리차가 현재와 같은 상태로 유지되는 한, 엔고로 전환될 가능성은 낮다.
- 일본의 생산성을 높이려면 디지털화를 추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일본의 디지털화가 늦은 이유는.
▲디지털화를 추진하기 위해 디지털청이 설립됐지만, 디지털화는 지지부진한 상태다. 정부 자체가 아직 종이와 인감 시스템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 큰 이유다.
- 해외에 투자하는 개인·기관투자가가 늘어나면서 엔저 현상을 심화시켰다는 뉴스가 있다.
▲특히 일본의 신(新) 소액투자비과세제도(NISA)가 가계 자산의 해외 투자를 촉진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엔저의 직접적인 원인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환율 시장에선 엔 캐리 트레이드(저금리의 엔화를 빌려 고금리 국가의 자산에 투자하는 것)의 영향이 훨씬 크다.
- 최근 일본 주식 시장이 호조를 보이는 배경에 엔저가 있나.
▲엔저는 기업의 이익을 증가시키며, 특히 대기업에 큰 효과를 미친다. 이것이 주가를 상승시키는 주요 원인이다.
- 엔저가 일본 경제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나.
▲물가 상승을 통해 가계의 실질 소득을 감소시키고, 실질 소비를 감소시키고 있다. 일본 경제는 스태그플레이션에 빠져 있다.
- 엔저에 대한 일본 전반의 여론은 어떤가.
▲보도에서는 엔저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이 많다(물가가 상승해 생활이 어려워지기 때문). 기업은 이익이 증가해 환영할 것으로 보이지만, 이러한 시각은 거의 보도되지 않는다.
- 일본 경제가 회복되기 위해 일본 정부가 조속히 해야 할 일은.
▲금융 정상화를 조속히 추진하고, 반도체 산업 등에 대한 불필요한 보조금을 중단해야 한다. 또 인재 육성과 기초 연구를 위한 정책을 추진하고, 기술 혁신을 위한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
박재현 기자 now@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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