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훈 칼럼] 내전의 시대

2024. 7. 22. 0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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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훈 본사 칼럼니스트·중앙대 명예교수

그 총격이 우발적인 것은 아니었다. 외톨이의 일탈로 치부하기도 어렵다. 일주일 전의 트럼프 후보 암살 시도는 미국에서 끓어오르는 불길한 흐름의 연장선에 있다. 3년 전(2021년 1월 6일)에도 수천 명의 무장 폭도들이 워싱턴의 의사당을 공격한 바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지지하는 시위대가 2021년 1월 6일(현지시간) 워싱턴 의사당에 난입해 회의장을 점거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 사진은 의사당 로툰다 홀을 점거한 시위대. AFP=뉴스1

무장 폭도들은 2020년 미국 대선 선거인단 투표 결과를 확정 중이던 양원 합동 회의장에 난입하였다. 이들의 목표는 바이든 후보가 승리했던 결과를 폭력적으로 뒤집는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의회 경찰관 1명이 순직하고 폭도들 여럿이 사망하였다. 사실상 폭도들의 난동을 방조하였던 당시 트럼프 대통령은 이와 관련하여 그해 1월 13일 두 번째 탄핵을 당하였다.

「 트럼프 피격, 정치적 내전의 양상
간헐적 폭력·테러가 21세기 내전
우리 정치도 불길한 흐름 확산 중
정치 정상화로 극단주의 차단해야

지난주 트럼프 후보는 3년 전의 굴레에서 어느 정도 벗어난 셈이다. 천만다행으로 총탄은 비껴갔고 트럼프 후보는 목숨을 구했다. 또한 피격 직후 침착하고 담대한 모습을 내보여 대선 고지를 향한 결정적 발판을 마련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실질적 정치 내전에 근접해 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오늘날의 내전은 1860년대 남북전쟁처럼 무장 군대가 충돌하는 전쟁의 양상을 띠지는 않는다. 21세기 정치 내전은 증오하는 세력 간의 간헐적 폭력과 테러의 형태로 나타난다. 트럼프 피격 직후 로이터 여론조사에서 84%의 미국인들은 11월 대선 이후 폭력 사태가 다시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고 응답하였다.

15일 오후 충남 천안시 유관순체육관에서 열린 국민의힘 제4차 전당대회 대전·세종·충북·충남 합동연설회에서 참석자들 일부가 연설중인 한동훈 후보에게 '배신자'라고 외치며 의자를 집어 던지려고 하자 경호원과 당직자들이 제지했다. 뉴시스

미국만큼은 아니지만 한국의 정치 갈등 역시 21세기형 내전으로 비화할 소지는 결코 작지 않다. 지난주 국민의힘 후보 토론회에서 벌어진 폭력 사태는 우발적이라고 하기 어렵다. 다른 생각을 가진 세력에 대한 심각한 폭력은 이미 우리 정치에서 일련의 흐름으로 이어져 왔다. 금년 초 이재명 민주당 대표 피습사건, 배현진 의원에 대한 테러. 그리고 지금 국회 의사당을 휘감고 있는 여야 간의 불같은 적대감과 물리적 충돌.

정치 내전의 확산을 지켜보면서 세 가지 논점을 짚어보려 한다. ①21세기형 정치 내전은 독재국가나 건전한 민주국가에서는 벌어지지 않는다. 경쟁 세력에 대한 폭력과 테러 위협은 민주주의가 흔들리고 있는 반(半)민주주의에서 주로 벌어진다. ②허약한 민주주의가 경제 양극화, 인종-문화 갈등, 정치 부족주의에 의해서 휘청거릴 때 정치 내전은 심각해진다. ③결국 민주 정부의 역량, 정치 제도의 역량의 회복이라는 상식적인 해법을 통해서만 우리는 내전의 위험을 줄일 수 있다.

먼저 반(半)민주주의와 정치 내전. 강력한 독재국가에서는 경쟁 세력에 대한 폭력이나 테러가 일어나지 않는다. 모든 힘은 이미 독재자들의 수중에 있으므로. 다른 한편으로 민주주의가 건강하게 작동한다면, 상대 세력에 대한 폭력이나 테러 위협이 설 자리는 좁아진다. 과거 민주주의 전성기 시절의 미국에서 정치폭력은 매우 예외적인 사건이었다. 하지만 민주주의가 뿌리째 흔들릴 때, 상호 절제가 무너질 때, 폭력이라는 독버섯이 자라난다. 트럼프 대통령이 첫 번째 임기 중(2017~21)에 백인 우월주의자들의 폭력 시위에 대해 모호한 태도를 취했을 때, 내전의 불씨는 이미 커지고 있었다. 게다가 정치 폭력 사태에 대해 그저 얼버무리는 태도를 취하는 트럼프 아류들이 속속 등장하면서 브라질(보우소나루), 아르헨티나(밀레이), 엘살바도르(부켈레)에서도 21세기형 내전의 위험은 커지고 있다.

두 번째 이슈. 21세기의 세계 곳곳을 폭력으로 얼룩지게 만드는 정치 내전의 뿌리에 대해서는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경제사회 양극화, 인종-문화적 갈등의 폭발, 그에 따른 정치 양극화가 궁극적으로는 정치 부족들 간에 폭력과 테러로 이어진다는 음울한 진단은 이미 충분히 나와 있다.

셋째, 앞으로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 하는 질문이 남는다. 인간이 사회를 이루고 사는 한 갈등 없는 청정지대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문제는 인간 존재 안에 도사린 야수적 성향을 어떻게 달래고 통제하는가이다.

정치학자들은 오늘날 비틀거리는 반(半)민주주의를 회색지대로부터 끌어올려 민주주의를 정상화할 때 폭력과 테러로서의 내전 위험은 줄어든다고 본다. 제도가 정치 세력들의 타협과 상호수용을 촉진할 때, 예컨대 국회의 여러 절차가 갈등 해소의 효과적 해법이라는 믿음이 자리 잡을 때 정치는 정상화된다.

정청래 국회 법제사법위원장이 19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법제사법위원회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안 즉각 발의 요청에 관한 청원 관련 청문회에서 국민의힘 의원 항의 속에 위원장실을 나섰다. 뉴시스

하지만 현실은 꽤 음울하다. 국민의힘 전당대회, 그리고 국회 법사위에서 벌어지고 있는 여야의 물리적 충돌은 우리 정치가 정상화는커녕 점점 위험한 길로 접어들고 있음을 보여준다. 트럼프 피격에서 보듯이, 정치인들이 조용한 다수보다는 소란스러운 극단 소수를 자극하고 그에 영합하는 악순환이 쌓이게 될 때 정치는 21세기형 내전으로 점점 추락하게 된다.

우리는 면밀히 지켜보아야 한다. 누가 갈등 유발자인지. 누가 갈등을 증폭하고 이용하는지. 누가 극단론을 부추기는지.

장훈 본사 칼럼니스트·중앙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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