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가로수에 이메일 보낼 수 있게”…멜버른의 ‘희한한’ 도시숲 전략
멜버른의 정책
도시가 달군 팬처럼 뜨겁다. 여름은 이제 시작인데, 낮 기온은 30도를 웃돈지 오래다. 그래도 거리에 나무가 있어 사람들은 잠시 숨을 돌린다. 한여름 가로수는 도시의 휴식처다. 여러 겹의 가지가 촘촘히 햇빛을 막고, 시원한 공기를 내뿜어 주변을 쾌적하게 한다. 사람을 걷게 하고, 폭염과 폭우가 주는 충격을 완화한다.
제주도가 나무를 다시 생각하기 시작했다. 도민·기업과 손 잡는 방식으로 녹지정책의 패러다임을 바꿨다. 국민일보는 달라진 제주도 도시숲 정책을 취재했다. 우리보다 앞서 기후 변화를 경험한 호주 멜버른의 고민과 이 도시의 녹지정책도 함께 살펴본다.
2009년 호주 빅토리아주에서 발생한 최악의 자연재해는 지역 전체가 도시의 상황을 새롭게 인식하는 계기가 됐다. 당시 멜버른시에서 도시숲 업무를 담당했던 이안 쉬어스 전 국장은 국민일보와 인터뷰에서 “호주에선 가뭄이 10년 가까이 지속되고 있었고, 한 달 넘게 이어진 화재와 45도까지 치솟은 폭염으로 수백 명이 사망했다”며 “시민들이 전례 없던 기상 이변을 경험했다”고 회상했다.
그는 “당장 도시에 그늘이 필요했지만 오랜 가뭄으로 많은 나무가 쇠퇴한 상태였다”며 “더 극심한 더위가 찾아올 것이라는 전망이 나왔기 때문에 시는 새로운 도시숲 전략을 짜야 했다. 누구도 나무를 거리를 장식하는 요소로만 볼 수 없는 상황이 됐다”고 설명했다.
도시의 위기
무엇보다 도시 온도를 낮추는 일이 시급했다. 호주기상청과 세계기상기구 등 많은 기상 전문기관이 호주 대륙에 폭염과 가뭄이 더 잦아질 것으로 전망하고 있었다.
멜버른시는 도시가 직면한 위기를 기후 변화·인구 증가·도시 가열 3가지로 진단했다. 기후 변화로 폭염이 늘고, 인구 증가는 도시 온도를 더 끌어올릴 것으로 예측됐다. 멜버른의 인구는 시드니와 달리 계속 늘고 있었다. 시는 많은 보고서를 검토한 뒤 기후 위기에 대응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녹색 인프라에 투자하는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전략 수립에 앞서 도시 녹지 상태를 진단했다. 종 다양성이 크게 부족하고, 장기간 이어진 가뭄과 노령화로 10년 이내에 전체 나무의 27%, 20년 이내에 44%가 사라질 것이라는 암울한 전망이 나왔다.
시는 이 같은 진단을 토대로 2년간 도시 각계 의견을 수렴해 2012년 멜버른 시 최초의 도시숲 전략(‘Urban Forest Strategy, 2012~2032’)을 확정했다.
해법의 전제
기상 이변을 경험한 뒤 멜버른이 수립한 도시숲 전략의 핵심 키워드는 ‘캐노피(canopy, 전체 토지에서 나무 그늘이 차지하는 물리적 범위) 확대’였다. 시는 ‘큰 나무를 도시의 가장 필요한 곳에서부터 늘려간다’라는 대원칙을 세웠다. 당시 22% 수준이던 공공영역의 캐노피 비율을 2040년까지 40%로 끌어올려 도시 기온을 3~4도 낮춘다는 목표를 세웠다. 연간 3000그루의 나무를 심기로 했다.
도시숲을 늘려가는 과정에선 나무 등 도시의 식생을 건강하게 유지하고, 향후 늘어날 병해충 발생에 대비해 종 다양성을 최대한 확보하기로 했다.
지속적인 도시숲 확대의 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지역사회와 소통을 늘리는 방안도 마련했다. 시민의 협조를 얻는 일은 도시 대부분을 차지하는 사유지에 녹지를 확대하는 매우 중요한 이슈였다.
나무 그늘을 늘려라
우선 식재 순서를 정했다. 이를 위해 거리 가로수 현황을 조사하고, 열화상 카메라로 도시 공간을 분석했다. 시가 도시숲 전략을 뒷받침하기 위해 작성한 ‘도시숲 구역 계획(Urban Forest Precinct Plans)’에는 향후 10년 동안 어떤 나무를 어디에, 언제 심을 것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실행 계획이 담겼다.
시가 정한 우선순위는 △식재 또는 나무 교체의 계획이 잡혀 있는 거리 △다른 지역보다 도시 온도가 높고, 열에 취약한 5세 미만 영유아나 74세 이상 노인이 많이 사는 거리 △다른 지역보다 온도가 높은 거리 △향후 10년 이내에 나무 교체가 요구되는 거리순이다.
수종 선택 기준도 구체화했다. 전략 수립 당시 멜버른에는 버즘나무·느릅나무·유칼립투스 나무 계통이 43%를 차지하고 있었다. 종이 단조롭다는 것은 병해충 등 외부 위협에 취약하다는 사실을 뜻했다.
시는 ‘2040년까지 전체 동일 종(種) 5% 이하, 동일 속(屬) 10% 이하, 동일 과(科)의 20%’ 이하로 유지하겠다는 기준을 만들었다.
거리 여건과 보도·차도의 넓이에 따라 식재 가능한 나무의 종류도 구분해 명시했다. 보도가 넓거나 도로에 화단형 중앙분리대가 있는 경우에는 수고(樹高)가 높고 캐노피 면적이 넓은 큰 나무를 심고, 차량 이동이 많은 도로에는 공해와 진동, 답압에 강한 나무를 심도록 권장했다. 고온과 가뭄에 강한 나무를 심는 일도 중요했다.
2011년 발간한 ‘도시숲 다양성 가이드라인(Urban Forest Diversity Guidelines)’에는 보도 넓이, 공간의 쓰임, 주차장·전력선 설치 여부에 따라 거리를 16개 특성으로 나누고, 적정 수종을 기재했다. 거리 폭 60m 이상인 공원 가장자리나 대로 중앙분리대에는 수관 폭 10m, 수고 8m 이상 되는 울무라 프로세라(Ulmus procera) 등 80여종을 권장하는 식이다.
생태 건강성 확보
멜버른시는 나무 그늘을 넓히는 동시에 도시 전체 식생을 건강하게 유지해야 하는 과제도 안고 있었다. 가뭄이 빈번해질 것으로 전망되면서 지속적인 물 공급이 중요했다. 시는 빗물을 적극 활용하기로 했다.
2011년 멜버른 동부지역 달링 스트리트(Darling Street)에서 빗물 집수 프로젝트를 시행했다. 지하에 빗물 집수 및 저장 장치를 설치하고, 이 물이 주변 공원(Darling Square)과 보호지역(Powlett Reserv), 인근 거리(Grey·Simpson·Powlett·Albert Streets) 나무에 물을 공급하도록 했다. 시스템은 매년 2400만 리터의 빗물을 모을 수 있도록 설계됐다.
배수구에서 빗물을 끌어와 지하 저장 탱크에 포집하는 방식도 확대해 나가기로 했다. 다른 빗물 수집 형태보다 비용이 적게 들고, 폭우 시 물을 분산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시는 빗물이 지하로 원활히 스며들도록 도시 바닥을 다공성 표면으로 교체하고, 지면 아래 구조용 토양을 삽입하는 작업도 진행했다. 토양 수분 보유를 장려하고, 도시 표면 온도를 낮추는 효과가 기대됐다.
시는 ‘2040년까지 멜버른 나무의 90%가 건강해지도록 한다’는 목표도 세웠다. 지속적인 물 공급과 함께, 모든 나무에 대해 매년 식생 점검을 시행하기로 했다.
멜버른대학교 호주 도시생태학연구센터와는 생물 다양성 전략 개발에 협력하기로 했다. 도시의 나무는 다른 생물의 서식지가 되고, 생물 다양성은 시민 일상에도 영향을 준다. 한 예로 작은박쥐(micro bat)가 있다. 멜버른 도심 나무에 살지만, 매우 빠르고 야행성이라 시민들은 자주 볼 수 없다. 하지만 모기를 주로 먹기 때문에 이들이 도시에서 계속 살아 가도록 서식지를 제공하는 일은 시민 건강을 위해서 매우 중요하다.
천군만마를 잡아라
멜버른은 도시숲 확대의 동반자로 시민의 역할에 주목했다. 시 전체 면적의 68%를 차지하는 사유지에 녹색 공간을 확대하기 위해서는 민간 영역의 협조가 필수적이다. 민간·공공영역 구분 없이 도시에 녹지를 늘려나가기 위해서도 주차 등 도시의 기능 감소를 우려하는 사람들을 설득해야 했다.
시는 우선 시민이 미래의 도시 풍경인 도시숲 전략에 대해 발언권을 가질 수 있게 했다. 도시숲 전략을 수립하던 2011년 11월부터 2012년 4월까지 온·오프라인 포럼, 9개 선거구별 지역사회협의회, 디자인 공모, 엽서 상담 등 다양한 방식을 통해 최소 1500명으로부터 직접적인 의견을 수집했다.
가로수 정보가 탑재된 양방향 지도(Urban Forest Visual)도 제작했다. 시민들은 지도를 통해 가로수의 종류와 수령을 알 수 있고, 앞으로의 식재 계획에 대해 의견을 제시할 수 있다. 또, 거리의 모든 나무에 대해 개별적으로 이메일을 보낼 수도 있다.
‘시티즌 포레스터 프로그램(Citizen Forester Program)’에는 여러 직업을 가진 시민 200~300명가량이 참여하고 있다. 봉사자라는 이름 대신 ‘시민산림관’이란 명칭을 쓴다. 설문조사, 전략 구상, 도시 생태모니터링 등 원하는 역할을 선택해 활동할 수 있다. 도시숲을 성장시키고 도시 생태를 개선할 수 있도록 훈련받고, 권한을 부여받는다.
시민이 도시숲 확대를 위해 할 수 있는 가장 직접적인 역할은 사유지에 녹지를 확대하는 일이다. 시는 매년 시민들로부터 계획을 신청받아 자금을 지원하고, 필요한 정보나 표준을 개발해 제공하는 일을 지속해서 추진하고 있다.
2014년 발행한 ‘녹색성장가이드(Growing Green Guide)’는 호주 최초의 종합적인 도심 건축물 녹화 지침이다. 녹화사업을 희망하는 주택 소유자와 전문가들에게 건물이나 주택에 녹색 인프라를 적용하는 방법을 알려준다.
2017년에는 진일보한 ‘녹색도시 실천 방안(Green Our City Action Plan)’을 발간했다. 시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2017년 11월까지 멜버른 시에 녹색 옥상이 38개에 불과하다는 반성에서 출발했다. ‘녹색도시 실천 방안’에는 시민참여를 더 직접적으로 독려하기 위해 녹색 지붕과 녹색 벽 도입 시 이점을 정량화한 연구 결과를 실었다.
새로운 정책에 대해서는 직접 시범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결과를 평가해 사업 모델을 도출했다. 시는 시민들을 녹화사업으로 유도하기 위해 골목길 녹화(Green Laneways Program)와 옥상 녹화 프로젝트(Green Our Rooftop Project)를 추진했다.
2017년 길포드 레인(Guildford Lane) 등 4곳에 녹색 골목길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2023년 결과 평가를 시행했다. 복잡한 골목에서 어떤 방식으로 식물을 키워야 할지 다양한 녹화 접근 방식을 테스트했다. 이후 사회, 환경, 경제, 기술, 거버넌스의 다섯 가지 영역에서 결과를 평가하고, 각각의 프로젝트에서 얻은 교훈과 피드백을 취합해 향후 골목길 녹화 프로젝트에 적용할 권장 사항 초안을 개발했다.
시는 건물의 녹색 지수를 확인하기 위한 평가 도구(Green Factor)도 개발해 무료로 제공하고 있다. 도시 전역의 녹화를 가속화하기 위해 도시숲 기금을 조성하고, 사유지에 새로운 녹지 공간 조성을 희망할 경우 심사를 통해 매칭 자금을 제공하고 있다. 지난해까지 한화 16억원 이상의 기금이 지원됐다.
멜버른=글·사진 문정임 기자 moon1125@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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