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전드 귀화선수가 한국농구에 남긴 것
[이준목 기자]
대한민국 남자농구 국가대표로 활약했던 '살아있는 레전드' 라건아가 13년 간의 한국 생활을 뒤로 하고 중국무대로 떠났다. 중국 스포츠 전문 매체 '시나스포츠'는 최근 라건아가 중국프로농구(NBL) 2부리그 구단인 창사 융성과 입단 계약을 맺었다고 발표했다. 대한농구협회는 라건아에 대한 중국 리그 이적 동의서를 승인한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시즌까지 부산 KCC에서 활약한 라건아는 지난 5월을 끝으로 소속구단과 대한민국 농구협회와 맺은 계약이 모두 종료됐다. KBL은 이사회에서 다음 시즌부터 라건아를 더 이상 귀화선수가 아닌 다시'외국인 선수' 신분으로 분류하기로 결정했다.
라건아는 한국에서 2옵션급 외국인 선수로라도 선수생활을 이어가고 싶다는 의지를 보였고 몇몇 KBL 구단들도 관심을 보였지만, 어느덧 30대 중반에 접어든 나이와 몸값 문제에 대한 이견을 끝내 넘어서지 못했다. 선택지가 없어진 라건아는 선수생활을 이어가기 위하여 결국 해외무대로 눈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비록 아쉬운 모양새로 한국을 떠나게 되었지만, 라건아가 이미 한국농구에 남긴 족적은 '레전드'로 평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미국 출신의 라건아는 본명이 리카르도 라틀리프로 미주리 대학을 졸업한 뒤 2012년 KBL 외국인 드래프트 6순위에 지명되어 울산 현대모비스에 입단하며 한국에서 첫 프로경력을 시작했다.
라건아는 대학 시절만 해도 NCAA(전미대학농구)에서 제법 이름있는 빅맨이었고, 비록 NBA(미프로농구) 드래프트에는 낙방했지만 신체적 장점면에서는 NBA급에서도 어느 정도 통할만 하다는 평가를 받던 유망주였다. 그럼에도 당시 라건아가 한국무대를 선택한 것은, 빈민가에서 불안정한 어린 시절을 보냈고 가족을 부양해야했던 사정상 기약없는 NBA 도전보다는 빨리 프로에 데뷔하여 안정적인 성공을 우선시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시작된 한국과의 인연은, 라건아의 농구인생과 한국농구의 역사까지 완전히 바꾸어놓게 된다.
시작부터 화려하지는 않았다. 아직 어렸던 현대모비스에서의 데뷔 초창기 시절에는 프로 무대가 처음이라서 그런지, 기술적으로 투박하고 완성되지 않은 원석에 가까웠다. 2년 차까지는 또다른 외국인 선수 로드 벤슨의 백업 선수에 그치기도 했다.
3년차인 2014-15시즌부터 본격적인 1옵션으로 도약하면서 기량도 만개하기 시작했다. 라건아는 그해 정규시즌에서 54경기에 모두 출전하여 평균 20.1득점 10리바운드를 기록했고 부활한 외국인 선수상을 첫 수상하며 리그 최고의 외국인 선수로 올라섰다. 소속팀 현대모비스는 라건아와 함께한 3년간 내리 우승을 차지하며 KBL 최초의 쓰리핏(3연패)을 달성하게 된다.
이후 라건아는 서울 삼성을 거쳐 다시 울산 현대모비스로 복귀했고, 2019년에는 트레이드를 통하여 부산 KCC로 팀을 옮겼다. 여러 팀을 옮겨 다니면서도 라건아의 활약은 꾸준했고 가는 팀마다 소속팀을 모두 챔피언결정전에 진출시키는 기염을 토했다. 나이를 먹어갈수록 원래 탁월했던 힘과 골밑플레이에 더하여 넓은 슛 범위까지 장착해가면서 막을수 없는 선수로 거듭났다.
원맨팀에 가까웠던 삼성에서는 유일하게 준우승에 그쳤지만 2016-17시즌 챔피언결정전은 지금까지 삼성의 마지막 챔프전 진출 기록으로 남아있다. 현대모비스로 돌아온 2018-19시즌에는 24.2점 평균 리바운드 14.2개로 절정의 기량을 과시하며 정규리그-챔프전 통합우승을 견인했다. 라건아는 외국인 선수로는 역대 최다인 개인통산 4번째 우승반지와 3번째 외국인 선수 MVP를 동시 석권했다.
또한 2018년 1월에는 법무부 특별 귀화 제도를 통하여 한국 국적을 취득하면서 어엿한 한국인이 됐다. 라건아는 한국무대에 성공하면서 태극마크를 달고 대한민국 농구 국가대표로 뛰고싶다는 의지를 꾸준히 드러내왔고, 마침 귀화선수 제도로 대표팀 전력을 강화하려는 농구협회와의 이해관계가 서로 맞아떨어졌다. 이후 라건아는 무려 6년간 국가대표 부동의 주전 센터로 활약하며 2018년과 2022년 아시안게임, 2019 FIBA(국제농구연맹) 농구월드컵 본선에 출전하는 등 국제무대에서도 꾸준한 활약으로 많은 족적을 남겼다.
라건아는 한국무대에서의 마지막 시즌이 된 2023-24시즌 프로농구 정규리그에서는 53경기에 출장하여 15.6점 8.4리바운드에 그치며 전성기가 지났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플레이오프들어 회춘한 라건아는 6강부터 챔프전까지 12경기에서는 평균 22점 12.3리바운드를 기록했고, 특히 챔피언결정전 5경기에서만 평균 20.2점, 11리바운드, 2.6어시스트, 1.4블록슛, 야투율 59.4%의 엄청난 활약으로 KCC의 우승을 이끌었다.
KCC는 프로농구 역대 최초로 '정규리그 5위팀의 챔프전 우승'이라는 대기록을 수립했고, 라건아는 개인 통산 5번째 우승의 기쁨을 누리며 화려한 피날레를 장식했다.
라건아는 오랜 세월 한국무대에서 꾸준히 정상급 활약을 펼친 만큼 우승 횟수 외에도 각종 개인 누적 기록이 화려하다. KBL 정규리그 통산 12시즌 611경기에 출전하여 18.6점, 10.8리바운드 2.0도움을 기록했다. 누적 통산 리바운드는 6657개로 서장훈(5235개)을 제치고 역대 1위이자 최초의 6천리바운드를 돌파했다.
득점은 1만 1343점으로 역시 서장훈(13,231점)에 이어 2위다. 플레이오프 통산 득점(1560점)과 리바운드 1위(937개) 기록도 라건아가 보유하고 있다. 꾸준한 실력과 자기관리가 모두 뒷받침되어야 가능한, 'KBL의 르브론 제임스'로 불리기에 손색이 없는 성적이다.
하지만 라건아의 한국 생활이 항상 행복한 순간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라건아는 외국인 선수 신분으로 활약하던 시절에는, 압도적인 활약을 보이고도 정규리그와 올스타전 MVP 등에서 성적이 크게 떨어지는 국내 선수에게 밀려 수상에 실패하는등, 여러 차례 '보이지 않는 차별' 논란에 휘말리기도 했다. 한국 국적을 취득하고 지난 2020년에는 SNS에서 수많은 한국인들의 '인종차별성 악플'로 고통을 받은 사실을 고백하며 많은 이들을 안타깝고 부끄럽게 만들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라건아가 한국을 떠나게 된 과정 역시 일종의 텃세와 차별에 가까웠다. 한국 농구계는 이미 한국 국적을 취득하여 6년이나 국가대표로 성실하게 뛰어왔던 라건아를 다시 편의에 따라 외국인 선수로 분류함으로서 오락가락 고무줄 잣대를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금전적인 문제를 떠나 라건아는 '한국인으로서든, KBL 레전드로서든' 그에 걸맞는 인정과 존중을 받지 못한 셈이다.
농구팬들 사이에서는 어느덧 35세의 노장이 된 라건아에게 이제는 국내 선수 신분을 인정해줘도 괜찮지 않냐는 의견도 많았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라건아를 보유한 팀이 사실상 외국인 선수가 한 명 더 뛰는 셈이 되어 리그 밸런스를 파괴할 수 있다는 현실론을 넘어서지 못했다. 한편으로 라건아를 대하는 한국농구의 모순적인 태도는, 특별귀화제도의 취지가 대표팀에 그저 '외국인 용병'을 들이기 위한 수단으로 변질되었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장면이기도 했다.
현재 농구대표팀은 재능있는 젊은 선수들이 많지만, 라건아의 빈 자리를 메울만한 확실한 귀화선수와 대형빅맨의 존재는 아쉽다. 농구협회는 귀화선수 문태종(은퇴)의 아들인 재린 스티븐슨(앨라배마대)를 라건아를 대체할 새로운 귀화선수 후보로 영입을 추진중이다.
라건아는 한국무대를 떠나게 되었지만 상황은 좀 더 지켜봐야 한다. 라건아가 아직은 선수생활을 더 이어가겠다는 의지가 강하고, 한국을 떠나도 이중국적은 그대로 유지된다.
프로농구 다음 시즌이 개막하고 외국인 선수 교체를 검토하는 KBL 구단이 나올 경우, 한국무대에서 검증된 라건아를 대체선수 우선 순위로 영입할 가능성도 높다. 라건아와 한국농구의 인연은 아직 완전히 끝난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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