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한 싸움을 마친 '노동자 시인'에게

조호진 2024. 7. 21.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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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문] '일과시' 동인 이한주 시인의 신간 시집 <몸이 기억하고 있다>

[조호진 기자]

이 기사는 필자가 '일과시' 동인 이한주 시인의 신간 시집 <몸이 기억하고 있다>(2024 삶창)에 쓴 '발문'의 일부를 수정한 글이다. 

시집 발문(跋文)은 시에 대한 해설과 시인과 얽힌 이야기를 적은 글이다. '일과시' 동인은 일하며 시 쓰고, 인간답게 살기 위해 투쟁하며 살아가는 창간 30년 된 노동자 시 모임으로 김명환, 김용만, 김해화, 서정홍, 손상렬, 송경동, 오진엽, 이한주, 조호진(조태진) 시인이 참여하고 있다. - 기자 말

#1. 프롤로그, 삐라쟁이에 대한 추억 
 
 <노동해방문학> 창간호 표지
ⓒ 노동해방문학
 
문학보다 노동을 앞세운 '일과시' 동인들의 인생이 붉디붉어진 것은 '삐라쟁이'(선전활동가) 김명환 시인 때문이 아니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노동해방문학>(아래 노해문)의 문예창작부장이던 그는 창원, 부산, 여수 등지에 살던 김해화 시인을 비롯한 노동자 시인들을 찾아다니면서 포섭했다.

그를 경계하지 않은 것은 까닭 없이 선한 눈망울과 어리숙한 말투 때문이었다. 그의 어리숙함은 붉은 물을 들일 때 쓰는 전형적인 수법인 줄 알았는데 40년가량 사귀어 보니 그는 어리숙한 체하는 사람이 아니라 어리숙한 사람이다.

김명환의 외삼촌은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아래 '난쏘공')의 저자 고(故) 조세희 선생인데, 난쏘공이 공전에 히트하면서 유명 작가가 됐음에도 선생은 베스트셀러 작가로 각광 받기를 거부하고 탄광촌의 아이들과 도시 빈민 그리고 농민 등 소외된 민중 편에서 불편하고 외로운 삶을 살았다.

조카인 김명환은 어용 노조였던 철도노조의 민주화와 노동자 해방 투쟁을 선전하는 서울지역운수노동자회 기관지 <자갈> 편집장과 '철도노조 전면적 직선제 쟁취를 위한 공동투쟁본부' 기관지 <바꿔야 산다> 편집장 등으로 선전활동가의 외길을 묵묵히 걸었다. 김명환은 아무리 봐도 외탁이다. 가난하고, 짓밟히고, 외롭고, 서러운 민중 속에서 애민(愛民)의 마음으로 한평생을 사신 조세희 선생은 자신의 욕망을 위해 민중을 팔아먹은 적이 없었다.

김명환 시인이 딱 그랬다. 회사 측의 탄압으로 외떨어진 시골 역으로 쫓겨갔을 때도 어리숙한 표정이었고, 파업과 투쟁의 삐라를 살포했을 때도 건방지고 오만한 표정을 짓지 않았다. 김명환 시인처럼 희생과 헌신의 낮은 자세로 임하는 선진 지도자들이 10% 정도만 됐어도 지금처럼 대중들에게 외면당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들이 노래한 노동해방은 적의와 분노, 강력한 투쟁만으로 도래하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뒤늦게 깨달았다.
 
 김명환 시인이 2019년 퇴직하면서 펴낸 <삐라의 추억> 출판기념회에서 낭독하고 있다.
ⓒ 조호진
 
1989년 4월에 창간한 <노해문>이 독재정권의 전방위적인 탄압을 견디지 못하고 1991년 1월호로 종간하고도 한참 지난 어느 때였다. 김명환 시인이 특유의 어리숙한 모습으로 "조 시인, 미안해!"라고 사과했다. 뜬금없는 사과여서 어리둥절했는데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사과할 만한 사건이었다. 하지만 사과는 김 시인이 아니라 나의 원고를 압수하고 돌려주지 않은 공안 당국이 해야 마땅했다. 내 시집 원고를 압수해 간 사건, 뿌리뽑힌 삶으로 떠돌아다니던 시절이어서 기억 저편, 까마득한 사건이었는데 기억을 되짚어 보니 내막은 이랬다.

김 시인이 나에게 시집을 묶어내자면서 노동해방의 거친 시들을 요청했고 얼치기 노동자 시인이었던 나는 붉디붉은 시들을 타이핑해서 건넸다. 사본은 없었다. 나를 구로공단 프레스공으로 취업시킨 김 시인은 '마창'(마산·창원)을 비롯해 전국을 다니면서 노동문예 일꾼들을 조직하느라 바빴고 '사노맹'(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의 입장과 노선을 대변하는 월간 문예지였던 <노해문>은 얼굴 없는 시인 박노해를 비롯한 문예 전사들이 노동해방에 대한 정치 평론, 문예 비평, 투쟁 수기, 시와 소설 등을 담아 펴내면서 투쟁을 고취하고 독려했다.

1991년 3월, 공안 당국의 수배를 받던 얼굴 없는 시인 박노해가 '안기부'(국가안전기획부)에 검거됐다. <노해문>은 박노해 시인이 검거되기 몇 달 전에 공안 당국에 의해 전방위적인 압수수색을 당했고, 그 과정에서 김 시인이 시집으로 묶기 위해 요청했던 나의 원고도 털린 것이었다.

압수해 간 원고 반환 청구 소송을 하고 싶어도 시효가 한참 지난 상태여서 쓰라린 추억으로 곱씹을 뿐이다. 그러므로, 김명환 시인이여! 사과는 원고를 탈취해 간 자들이 해야 옳은 것이지 낮은 곳에 임한 그대가 하는 것이 옳지 않으므로 그대의 사과를 사하노라!

#2. 두 철도노동자
 
 이한주 시인.
ⓒ 김해화
 
삐라쟁이 김명환은 노해문이 와해되자 전태일문학상 담당자로 활동지를 옮겼다. 노해문 동지와 연애하던 그가 결혼을 결심했다. 연애도 김명환처럼 했다. 말주변이 없는 데다 돈도 없는 그의 연애는 오늘도 걷고, 내일도 걷는 '나그네 설움' 같은 방식이었다. 결혼하려면 돈이 필요했다. 그가 일거양득으로 선택한 것이 철도청에 취직하는 것이었다. 어용 노조 민주화와 생계 보장을 위해 철도청에 입사하면서 전태일문학상 후임으로 삼은 상근자가 청년 이한주다.
군에서 갓 전역한 이한주 또한 김명환의 어리숙함에 당한 것이다. 중앙대 국문과 출신인 이한주는 대학교지 편집위원으로 활동하던 1986년 전태일기념관에 취재하러 방문한 적이 있어서 '전태일문학상' 담당자가 되는 것이 낯설지 않은 탓도 있었을 것이다.
 
매주 수요일
저녁을 거르고 오는 사람들 위해
퇴고도 하지 못한 시 한 편 뒤춤에 꽂아둔 채
넉넉히 라면 물 얹어 놓고 있었을 거다
습작토론회 마치고
사람들 배웅하고 되돌아오는 언덕길
생활이 시가 되지 못할 때
시처럼 살아가고 싶어 했으리라
 
(시집 <몸이 기억하고 있다>에 실린 '가지 않은 길'의 일부분)
 
1989년 군에서 전역한 이한주는 '청계피복노동조합'(청피노조)이 생활 야학의 일환으로 운영하던 문학반에서 강사로 활동했다. 배고픈 누이들에게 풀빵을 사준 전태일 열사처럼 살고 싶었던 청년 이한주는 하루의 노동을 마치고 달려오는 여공들의 배고픔을 달래주기 위해 물을 끓였다. 어린 누이들은 그가 끓여준 라면으로 허기만 달랬을까. 이한주는 시인의 꿈을 꾸는 어린 누이들과 각자 써온 습작(習作)을 놓고 토론하면서 삶을 아파하고 생을 고민했다.

시는 언어의 유희인가? 아름다운 시란 무엇인가? 삶의 애환과 노동의 고단함이 배제된 시는 가난한 노동자들이 살 수 없는 백화점 물건처럼 허황할 뿐, 그래서 이한주는 생활이 시가 되고, 시가 생활이 되는 시인이 되고 싶었다. 전태일 열사가 노동자의 권리를 위해 몸을 사른 것처럼 파업 출정식에 뿌려지는 삐라 같은 노동해방의 시를 생산하고 싶었다.

이한주도 김명환처럼 동지와 연애했다. 그의 연인은 청피노조 교육부장이었다. 이한주도 김명환처럼 사랑하는 동지와 백년가약을 맺고 싶었다. 문제는 돈이었다. 전태일기념사업회가 주는 상근비로는 혼자 사는 것도 빠듯했다. 그때, 철도청 오류동역 수송원으로 일하던 김명환이 철도청 입사를 권했다. 이틀 중에 하루만 일한다고, 일하는 하루 중에서도 반만 일하면 된다고, 세상에 이런 직장이 어디 있냐는 말에 철도청 입사 시험을 봤고 합격했다.

그런데 입사 후에 알고 보니, 한 달에 철도노동자들이 몇 명씩 죽어 나가는 위험한 일터였고, 힘들고 더러운 일들을 감당해야 하는 일터였다. 김명환과 이한주가 철도노동자가 된 까닭이 단순히 생계에만 있었다면 그냥 튀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에겐 철도노조 민주화란 사명감이 있었다.
 
 이한주 시인의 시집 <몸이 기억하고 있다>(삶창
ⓒ 삶창
 
세상이 앞만 보고 달릴 때
나는 늘 뒤돌아 있었다
 
넘어지는 사람은 없는지
흘리고 가는 것은 없는지
언제라도 손 내밀 준비를 하며
뒷걸음질로 다시 살피며 간다

(시집 <몸이 기억하고 있다>에 실린 '1호선 전동열차 차장' 전문)
 
언제였을까? 1호선 전동차를 타고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전동차 스피커에서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는데 귀에 익은 목소리였다. 1호선 전동열차 차장 이한주였다. 온화하고 부드러운 그의 목소리를 듣는 승객들은 편안함을 느꼈을 것이다.
무한경쟁 사회에서 각자도생으로 사는 세상 사람들은 앞만 보고 달린다. 심지어 앞에선 경쟁자를 짓밟으면서 달리기도 한다. 그런데, 차장 이한주는 "넘어지는 사람은 없는지/ 흘리고 가는 것은 없는지/ 언제라도 손 내밀 준비를 하며" 산다. 그가 운전하는 삶의 아름다운 열차를 타고 사람들이 사람답게 사는 사람의 마을에 가고 싶다.
 
빠르고 바쁜 것들은 못 본 체 지나치고
맘 약한 몇몇만 멈춰 서는 오산역
개찰구 문을 열면
고단을 이고 계단을 오르던 사람들
기다렸다는 듯이 보따리를 풀어 놓는다
묻고 또 묻고
가장 잘 보이는데 큼지막하게 붙여 놓은 것들을
믿지 못하고
20년 전동차 차장을 하다가 쫒겨온 내게
조치원 가는 차가 맞는지 다시 묻는다
손에 쥔 기차표보다
초짜 역무원 한 마디에
안심하고 계단을 내려서는 사람들
그들의 불안을 오산역 기둥에 단단히 묶어 두고
안녕히 잘 가시라 배웅 인사 하는데
한 달 전 아내를 여의었다는 초로의 사내가
다시 돌아갈 길을 찾아 서성이는 내게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냐고 묻는다
 
(시집 <몸이 기억하고 있다>에 실린 '오산역' 전문)
 
이한주 시인 또한 김명환 시인처럼 쫓겨갔다. 20년 경력의 전동차 차장이면 번듯하고 편한 역으로, 높은 자리로 상승해야 하건만 노조 활동으로 찍힌 그는 "빠르고 바쁜 것들은 못 본 체 지나치고/ 맘 약한 몇몇만 멈춰 서는 오산역"으로 강제 전출됐다. 그 오산역에서 초짜 역무원으로 근무하던 그는 "고단을 이고 계단을 오르는 사람들"과 "한 달 전 아내를 여의었다는 초로의 사내"를 만났다.
그가 선한 시인이 아니었다면, 그래서 복귀 투쟁만 외쳤다면 짠한 이웃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쫓겨난 이한주 시인은 낯선 길이 불안해서 묻고 또 묻는 가난한 승객들을 친절하게 안내하면서 안녕히 가시라는 배웅 인사를 했다. 그러나 권력을 가진 자들이 휘두르는 착취와 탄압의 칼날은 멈추지 않고, 이들에게 정당한 권리를 빼앗긴 억울한 사람들의 정의로운 투쟁은 벼랑 끝으로 내몰려 위태롭다.
 
74일 동안 광장을 떠돌다가
늦은 여름이 겨울 되어 돌아왔건만
누구 하나 버선발로 뛰어나오지 않는다
등 떠밀려 들어온 바짝 약이 오른 파업 복귀
한 놈만 걸려라 도끼눈 치켜뜨는데
급하게 벗어놓았던 작업복은
자다 나온 듯 뒷머리 긁으며
이제 오냐고 한다
마치 어제저녁 퇴근했다
오늘 다시 출근하는 것처럼
행로수첩도 시간표도 가방도
모두들 제자리에서
까딱 고개만 돌려 맞는다
 
(시집 <몸이 기억하고 있다>에 실린 '몸이 기억하고 있다' 일부분)
 
 2016년 철도노조의 투쟁 현장.
ⓒ 철도노조
 
2016년 철도노조는 공공노조 역사상 유례가 없는 74일간 총파업을 진행했다. 철도공사의 일방적인 성과연봉제 도입이 쟁점이었다. 성과연봉제는 재벌의 이익을 대변하는 '전경련'(전국경제인연합회)의 청원에 의한 대통령 중점 관심 사항으로 노동부 장관이 총대를 메고 추진하면서 철도노조의 반발을 샀다.

'철도공사'(코레일)는 노조의 교섭 요구를 거부했다. 이 사안이 노사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적 문제라는 것을 확인한 철도노조는 '최순실 게이트'와 박근혜 정부의 불법과 무능을 탄핵하는 촛불시위에 주도적으로 참여하면서 사회개혁의 목소리를 높였다.

그해 9월 12일 늦여름에 시작된 파업은 12월 겨울이 되어 끝났다. 진짜 노동자였던 시인은 승리의 깃발을 휘날리며 복귀하고 싶었는데 그렇지 못한 파업 중단 결정이 불만이었다. 74일이 아니라 150일 파업을 해서라도 사측이 그동안 휘두른 해고와 손해배상 소송 등의 횡포를 진압하고 싶었다. 그런데, 그런 승리를 거두기엔 정세와 형국은 물론 조합원들의 동요도 심상치 않았다.

그래서, "등 떠밀려 들어온 바짝 약이 오른 파업 복귀/ 한 놈만 걸려라 도끼눈 치켜뜨는데/ 급하게 벗어놓았던 작업복은/ 자다 나온 듯 뒷머리 긁으며/ 이제 오냐고 한다"고 마뜩찮아 했다. '철도공사'는 언론을 통해 철도노조 간부와 핵심 조합원을 대량 징계를 공언했다. 철도공사는 2009년과 2013년 파업 당시에 조합 간부 구속과 대량 해고하고 조합원을 대량 징계한 바 있다.

하지만 2016년에는 74일이란 최장기 파업에는 징계도 손배소송도 하지 못했다. 철도노조를 비롯한 시민사회, 그리고 전 국민의 열화와 같은 촛불 집회를 통해 모든 권력의 주인은 노동자와 민중이라는 사실을 입증했기 때문이다. 끈질겨야 이기는 것이 아니라 이기는 싸움을 해야 이기는 것이다. 지는 싸움을 하면 망할 뿐 아니라 대중의 배신과 패배의 쓴잔을 마셔야 한다.

자본가와 권력의 횡포에 대항하기 위해 노조를 결성하고, 착취에 맞서기 위해 파업을 한다. 파업을 위해 파업하는 노동자는 없다. 노조는 파괴 집단이 아니다. 노조는 무뢰배들도 아니다. 그런데, 자본가와 권언 유착된 언론들은 투쟁하는 노동자들을 반사회적 집단으로 매도한다. 하지만 노동자들은 싸움꾼이 아니다. 그들이 원하는 건 정당한 노동이다.

세상이 많이 좋아졌다고 하지만 노동자는 여전히 약자다. 억울함을 감당해야 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파업에서 복귀한 시인은 '그놈의 운전실을 벗어나고 싶었는데 파업에서 돌아온 몸은 먼저 자리 잡고 않는다'고 습성화 된 노동에 놀란다. 자본가와 권력자는 수시로 약속을 깨트리며 권모술수를 부리지만 정직한 노동자의 몸은 괴롭고 힘든데도 저절로 일한다. 
 
다시 새벽 출근이 끔찍하기만 한데
지하 구간이 낯설기도 하련만
두어 달 만이니 적응할 시간을 달라고
투정도 하고 하소연도 하고 협박도 하면서
웅크린 마음 펴질 시간이 필요했는데
덜컹이는 운전실
벗어나고만 싶었던 그놈의 운전실을
몸이 먼저 자리 잡고 앉는다
 
(시집 <몸이 기억하고 있다>에 실린 '몸이 기억하고 있다' 일부분)
 
#3. 잘난 체하지 않는 시 동인 '일과시'
 
 2023년 6월 1일부터 2일까지 1박2일 일정으로 전북 진안 김용만 시인 집에서 진행된 일과시 동인 모임. 왼쪽부터 송경동, 김용만, 김해화, 오진엽, 조호진, 서정홍, 이한주 시인.
ⓒ 김해화
 
1990년대 초였을 것이다. '일과시' 동인들은 민족문학작가회의 시국 농성장을 방문했다가 크게 실망했다. 붉은 머리띠 질끈 동여매고 두 팔을 하늘로 뻗으면서 노동해방을 외치며 철의 노동자를 부르던 노동자 시인들의 눈에 어영부영 농성하며 술잔을 기울이는 작가들의 모습에 크게 실망한 것이다.

그때, '일과시' 동인들은 문학이란 허울 아래서 노동하지 않는 자들, 룸펜처럼 기생하며 사는 자들, 노동을 폄훼하는 쁘띠부르주아지들과 어울리지 말자면서 발길을 돌렸다.

'일과시'는 1993년 제1집 <햇살은 누구에게나 따스히 내리지 않았다>(과학과사상)를 펴내면서 출발했다. 세상을 등진 동인도 있고, 암 투병 중인 동인도 있고, 여전히 공사판을 떠도는 비정규직 노동자도 있고, 정년퇴직한 노동자도 있고, 자식들을 결혼시킨 동인은 여럿이고, 손자를 본 할아버지들도 여럿 있으니 참 오랜 세월이 흘렀다.

2014년 펴낸 일과시 20년 맞이 기념 시집 <못난 시인>(실천문학사)이란 제목처럼 누구 하나 잘난 체를 하지 않아서인지 30년 넘도록 동인 모임을 유지하고 있다. 험한 세상을 어질게 살아온 동인들은 서울, 수원, 용인, 구례, 임실, 합천 등지에 흩어져 살다가 때가 되면 모여 돋보기 너머로 시를 읽고 품평하면서 착하게 술잔을 기울인다.
 
동인이라고 하면서도
5년 만에 한 번
3년 만에 또 한 번
겨우 모이면서
30년 이어졌으면
친목 모임인가 싶은데
자식 결혼식에도 부르지 않으니
같이 가는 것도 아니고
함께하는 것도 아닌데
 
(시집 <몸이 기억하고 있다>에 실린 '일과시 3-완주 소양, 2023' 일부분)
 
이한주 시인은 1995년에 펴낸 동인지 제2집 <아득한 밥의 쓰라림>(지평)부터 참여했다. 물갈이가 되지 않은 탓에 2024년 올해로 쉰아홉인 이한주 시인이 막내뻘이다. 30년 넘은 '일과시'가 펴낸 동인지는 지난 2018년에 펴낸 제9집 <고공은 따로 있지 않다>(푸른사상)가 마지막이다. 문학 생산성이 극히 저조한 '일과시'가 30년 넘도록 해산하지 않은 연유는 무엇일까.

'일과시'가 깨지지 않은 가장 큰 연유는 '청피노조' 문학반 강사 출신인 이한주 시인 때문이라고 나는 굳게 믿는다. 이 시인은 실무 간사처럼 연락부터 시작해서 원고를 모아서 복사하고, 배포하고, 모임에서 먹을 술과 음식 등의 시장보기 등 궂은일을 불평 한마디 없이 해낸다. '일과시'에 착하고 성실한 이 시인이 없었다면 아무도 나서지 않으므로 아무도 모르게 고사(枯死)하는 나무처럼 조용히 해체됐을지도 모른다.

2023년 모임은 전북 완주에서 암 투병 중인 김용만 시인의 시골집에서 이뤄졌다. 이 모임이 성사된 것 또한 성실하고 예의 바른 이한주 시인의 수고 덕분이다. 이 시인의 시처럼 "같이 가는 것도 아니고/ 함께하는 것도 아닌" 일과시가 30년 세월 동안 깨지지 않은 또 다른 배경은 동인들의 선한 품성 때문일 것이다.

김명환 동인은 여전히 어리숙하고, '미당문학상' 후보에 오르는 것조차 거부했던 거리의 시인 송경동 동인은 여전히 겸손하고, 지난 2023년 출간한 동시집 <골목길 붕어빵>(상추쌈)으로 제15회 권정생문학상을 수상한 서정홍 동인은 "이 상을 받을 자격이 없는데, 받게 됐어요. 어찌 살아야 권정생 선생님 이름을 그대로 지킬 수 있을까요? 걱정이 태산 같다"는 소감을 밝혔고, 암 투병을 하면서 KBS 다큐 <자연의 철학자들>에 출연하고, 첫 시집 <새들은 날기 위해 울음마저 버린다>(삶창)를 펴내면서 언론 등에서 주목받고 있는 김용만 동인은 돌담을 작품처럼 쌓고 꽃과 식물을 소담스레 키우며 산다. 이 정도면 자랑하고 잘난 체해도 되겠건만 일체 잘난 체하지 않는다.
 
내 시가 창피해서
고개를 못 들겠다
서른 살 그 나이가 아닌데
이제 고쳐서 더 잘 쓸 자신도 없는데
일도 시도
대충대충 넘어가지 않는다
밤늦도록 허리 꼿꼿한
노동의 새벽
 
(시집 <몸이 기억하고 있다>에 실린 '일과시 3-완주 소양' 일부분)
 
 2023년 6월 전북 진안 김용만 시인 집에서 진행한 작품 품평회를 마친 일과시 동인들
ⓒ 김해화
 
조금은 늙고 병들었지라도 동인으로 모여 술에 취해 푸념이나 하다 흩어지는 것이 아니라 노동의 새벽을 기다리는 것처럼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밤이 이슬을 맞도록 품평을 한다. 서로를 베는 무자비한 품평이 아니라 삶의 수고를 위로하고 격려하면서 힘을 북돋는 품평을 한다.

30년 넘는 세월 동안 술주정을 하거나 깽판을 놓은 동인이 한 명도 없었다. 일과시 동인들은 강철 노동자처럼 견결하진 못했으나 지면 한 푼을 얻으려고 문단을 어슬렁거리는 시인 나부랭이들과는 삶의 결을 달리하고 살았다.

정직한 삶과 진실한 노동으로 30년 세월을 살아왔는데 그에 무엇을 얻겠다고 탐할 것인가. 동인 활동 30년 세월에 얻은 것은 조금은 가난하고 쓸쓸해서 조금씩 흔들릴지라도 선한 삶의 길에서 이탈하지 않는 묵묵함이다.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늙지 않는 전태일 열사처럼 내년이면 환갑인데도 청피노조 문학청년의 맑은 눈빛을 잃지 않은 이한주 시인이 '일과시'의 간사 역할을 계속 맡아준다면 앞으로 10년은 거뜬히 이어질 것이고, 우리들은 조금 더 늙을지라도 시인의 길을 포기하진 않을 것이다.

#4. 에필로그, 시인의 대지에 시의 꽃을 피우시라
 
 이한주 시인 자녀들이 아빠의 퇴직을 축하드리기 위해 만든 이미지.
ⓒ 이한주
선한 사람은 탐욕스러운 인간을 이길 수 없다. 노동자 계급이라고 예외일 수 없다. 파업 투쟁을 선도했다가 해고된 노동자들을 지원하기 위한 모금이 진행되자 의리라곤 개뿔도 없는 야비한 노동자들은 조합을 탈퇴했다. 룸살롱에서 양주를 마실 돈은 있을지라도 동지였던 노동자들의 생계를 지원할 모금은 아까워서 조합을 탈퇴하는 비루한 노동자가 어디 한 둘인가.
어디 그들뿐인가. 비정규 노동자와의 연대와 지원보다는 자식들의 학벌과 아파트 투기로 한몫 챙기려고 안달복달 하는 귀족 노동자들은 괜찮은가. 노동자의 이름을 팔아서 한 자리를 차지한 소영웅주의자들은 어떤가. 권력과 자본에 영혼을 팔아서 이권을 챙긴 두 얼굴의 기회주의자들은 어떤가. 
 
적금을 붓고
연금도 알아보고
10년 전부터 명예로운 퇴직을 꿈꿨다
명퇴금으로 빚을 갚고
빈둥빈둥 놀 사무실을 얻고
하고 싶지 않은 일은 하지 않으면서 살고 싶었다
 
그만둔다는 소식을 듣고
정년까지 같이 가자던 동료들이
할 일이 있냐고 묻는다
이제 나를 위해 살아보겠다고 하니까
얼마나 가겠냐고 웃는다
 
나도 그럴 것 같아서
아무 계획이 없는
퇴직 후 계획을 말하지 못하고
웃는다
 
(시집 <몸이 기억하고 있다>에 실린 '명퇴' 전문)
 
삐라쟁이 김명환은 2019년 정년퇴직했고 전동열차 차장이었던 이한주는 2024년 7월에 명예퇴직했다. 그럴싸한 노후대책도 없이, 철도노동자를 전관예우 대접을 해줄 일자리도 없이, 그냥 아무 계획 없이 퇴직했다.
청피노조 교육부장이었던 이한주 시인의 아내는 딸(29세)과 아들(27세)들을 기죽게 하고 싶지 않았다. 다른 부모처럼 자식들에게 뭔가 해주고 싶었던 그의 아내는 치열한 삶의 현장에 뛰어들었다. 착한 남편은 파업에 앞장 설뿐, 나쁜 남편들처럼 검은돈을 구해올 줄도 모르고, 그런 돈을 바라지도 않기에 생의 전선에 온몸을 던지고 또 던졌다.
 
미싱사를 하다가
노조 상근을 하다가
두 아이 낳고 경력이 단절된 아내는
맥도날드에 나가고
못다 한 공부도 하고
한우리 선생님도 하고
일을 하고 싶어하는 아내는
바른생협에도 다니고
처제와 꼼꼼바느질 창업도 하고
월드크리닝 나 홀로 사장님도 되고
물어볼 때마다 하는 일이 달라진 아내는
차로 50분 쿠팡도 다니고
보건복지부 조사 요원도 하고
명퇴를 꿈꾸는 나 대신 일을 찾아 나선 아내는
간간이 서류에서 떨어지기도 했지만
내년 12월 홈플러스에서 정년을 맞는다
 
(시집 <몸이 기억하고 있다>에 실린 '이력서' 일부분)
 
그의 아내는 "아내 말 잘 듣고/ 밥이며 빨래며 설거지며/ 집안일도 열심히/ 아이들 편들어 주고/ 술 담배 하지 않는 나를/ 좋은 아빠/ 착한 남편이라면서도/ 아내는 아이들에게/ 아빠처럼 살지 마라고 한다"(시 '손절'). 그도 그럴 것이 착하고, 욕심 없이 살 뿐만이 아니라 의로운 노동자로 당당하게 산 대가로 겪은 삶의 고통을 자식들에게 물려주고 싶지 않은 것이 엄마의 당연한 마음이 아니겠는가.
그의 아내가 억척같이 살면서 맞벌이를 하지 않았다면 그는 명예퇴직을 꿈조차 꾸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착한 남편을 끝까지 부양해줄 이한주 시인의 아내에게 감사와 존경의 박수를 보낸다.
 
 2024년 7월 철도노동자 생활 31년을 마치고 퇴직한 이한주 시인.
ⓒ 이한주
 
철도노동자 김명환과 이한주는 밀알 같은 노동자였다. 진정한 노동해방의 대지는 자신을 희생하고 헌신하는 밀알이 될 때 풍성한 열매를 거둘 수 있는 옥토가 된다. 그런데, 투쟁의 대지는 욕망의 구호로 아수라장이 되면서 아무리 객토해도 열매를 거두기 힘든 대지로 전락했다.

고액의 연봉을 받는 공기업과 대기업 노동자들은 자신보다 더 힘겨운 영세기업 노동자와 비정규직 노동자를 위해 자신의 몫을 내려놓는 배려와 연대의 세상을 거의 꿈꾸지 않는다. 욕망의 엘리베이터에 탑승하기 위한 아귀다툼에는 자본가와 노동자, 강남족과 변두리 서민의 차이가 별로 없다. 헤게모니 투쟁에 혈안이 된 노동 귀족들은 한 줌도 안 되는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소외된 노동자들의 피눈물을 외면한다.

선한 싸움을 마친 김명환과 이한주 시인이여. 그대들의 투쟁 목표는 욕망이 아닌 정의로운 노동이었고, 그 싸움에서 자신을 희생하고 헌신했으므로 그대들의 가슴에는 붉은 훈장이 달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는 그대들과 가족을 위해 살면 좋겠다. 이제는 노동해방의 깃발을 내려놓으시라. 노동자 시인이 아닌 그냥 착한 시인으로 돌아와서 삶의 아름다운 시로 꽃을 피우기를 부탁한다.

그대들의 땅에 씨를 뿌리고 거두는 시의 농부로 살기를 부탁한다. 무엇보다 비루한 자들보다 더 아름다운 시를 풍성하게 생산하기를 당부한다. 우리는 반성해야 한다. 삶에선 성실하고 치열했던 반면 시인으로선 게으른 생산자였던 것이 사실이었므로 실로 깊이 뉘우치고, 삶이 깊어지는 만큼 아름다운 삶의 시로 뒤늦게라도 끗발 올리면 참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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