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임약 30년, 비아그라 6개월... 약에도 정치가 있다

서은솔 2024. 7. 21. 0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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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료실에서 보내는 편지] 약 처방으로 보는 사회...미소프로스톨과 하모닐란의 경우

[서은솔]

ⓒ pixabay
 
저는 주말 병원에서 약사로 일하고, 주중에는 보건학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드리는 편지는 진료실이 아닌 진료실 밖에서 보내는 편지가 되겠네요. 약사들은 약을 통해서 환자의 건강 상태와 세상을 봅니다. 그래서인지 솔직히 말해 저는 약을 좋아합니다! 말이 좀 이상해 보이지만 의약품은 약과 진료실을 넘는 질문을 던지기 좋은 주제입니다. 병원에서 제가 받은 처방전으로 조제한 약 두 가지 얘기를 나눠 볼게요. 

미소프로스톨(Misoprostol) 200mcg 2T : 어디까지 왔나, 임신 중지 의약품

병동에서 미소프로스톨 처방이 나왔네요. 환자의 성별과 나이를 보니 계류 유산(태아가 죽은 채로 자궁 안에 오래 머물러 있다가 나오는 일)인가 봅니다. 약사용 설명서(insert paper)에는 정식으로 적혀있지 않지만 약물 기전 상 사용하는 처방을 오프라벨 처방(허가 용도 외 처방)이라고 합니다. 미소프로스톨은 국내에선 오프라벨로 계류 유산, 임신 중지에 사용할 수 있는 대표적인 약입니다. 세계보건기구(WHO)는 임신 중지 가이드라인에서 미소프로스톨을 약물적 임신 중지에 사용 가능한 의약품으로 소개하고 있으며 국내에서도 170원 정도로 구할 수 있습니다.

WHO 임신중지 가이드라인에 소개되어 있지만 아직 국내에서는 구하지 못하는 약이 있습니다. 바로 미프진(미페프리스톤, Mifepristone)입니다. 30년 넘게 90개 넘는 국가가 사용하고 있지만 아직 안전성을 이유로 허가가 나지 않고 있습니다. 한국 의약품 안전성 평가의 주요 기준이 되는 국가인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스위스, 영국, 캐나다는 이미 먼 옛날부터 사용하고 있는데 말입니다. 심지어 여성에게 매우 보수적인 일본도 작년부터 미프진을 허가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안전하지 않다'를 '식약처, 정부에 정치적으로 안전하지 않다'로 해석합니다.

의약품의 허가와 개발 과정에서 과학은 무척 강조됩니다. 하지만 의약품을 둘러싼 정치·경제는 고려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가까운 나라 일본에서 피임약을 허가받는 데 30년이 걸렸습니다. 이유는 위험성 때문이었습니다. 반대로 발기부전 치료제인 비아그라(sildenafil)는 6개월밖에 안 걸렸습니다. 비아그라 역시 심혈관계 부작용과 사망 사례가 존재하는데도 말입니다. 둘 다 재생산과 관련된 의약품인데, 대상이 여성과 남성이라는 이유로 이렇게나 결과가 다릅니다. 젠더와 인구 정책에 대한 국가의 생각이 반영된 결과입니다.

미프진은 과학적 근거로만 따지면 국내에서 허가가 안 될 이유가 없습니다. 미프진보다 효과성이 불분명하고 안전성이 충분히 검토되지 않은 약들이 급여권까지 진입한 사례도 있습니다. 그러나 미프진은 사회정치적인 이유로, 즉 젠더 권력과 재생산 특히 인구 통제 의제 때문에 허가를 못 받고 있습니다.

낙태죄 헌법불합치 이후 한국에서 임신 중지는 불법이 아닙니다. 이미 임신 중지가 가능한 확실한 방법이 있음에도 선택권을 주지 않는 것은 재생산권(신체적 자기결정권과 건강권, 출산과 성에 대한 양성 평등권, 자녀양육 등을 위한 공적 지원 요청권 등으로 구성되는 포괄적인 인권)을 충분히 보장하지 않는 것입니다. 재생산권이 충분히 보장된다는 말은 필요한 사람이 의약품을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해외에서 직접 구매하지 말고, 의료기관에서 미프진을 손에 넣을 수 있어야 합니다. 임신을 중지하는 데 들어가는 돈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어야 합니다. 젠더와 나이를 불문하고 누구든 초경, 임신, 피임, 출산, 임신 중지, 완경까지 자유롭게 개인이 재생산을 결정할 수 있는 것, 그리고 이것을 사회가 보장하는 것이 재생산권 보장의 의미입니다. 그래서 미프진 투쟁은 한국 재생산권에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하모닐란 1 bag : 이들의 곡기가 끊기는 것은 누구의 책임인가

병동에서 하모닐란 처방이 나왔습니다. 하모닐란과 엔커버 처방은 하루에도 왕왕 나옵니다. 하모닐란은 누군가에게 한 끼 식사입니다. 간혹 하모닐란이 터지는 경우가 있는데, 냄새가 아주 진합니다. 하모닐란은 단백질, 당, 비타민, 지방 등 다양한 영양성분으로 구성되어 있어 냄새가 강한 것이 당연합니다.

저는 하모닐란과 피딩 라인(feeding line)을 챙겨서 병동으로 올려보냅니다. 피딩라인은 밥을 씹어서 넘길 수 없는 분들에게 유동식을 넣어주는 호스입니다. 이렇게 경구 영양 섭취가 어렵고, 영양분의 흡수가 어려운 환자들에게 처방되는 전문의약품이 하모닐란과 엔커버입니다. 이것을 경관 유동식이라고 부릅니다. 환자들에게 경관식은 의약품이지만 밥입니다. 그런데 이런 경관식의 지독한 품절 사태로 환자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유동식을 먹어야 하는 환자의 가족들은 유동식을 구하지 못할 것이라는 불안감에 시달립니다.

경관식 품절 문제는 왜 일어나는 걸까요. 하모닐란과 엔커버는 해외에서 수입하는 의약품입니다. 그래서 세계 각국의 전쟁 때문에 공급이 어려워졌습니다. 세상에! 다른 나라의 전쟁이 이렇게 누군가의 의약품 공급에 차질을 빚기도 합니다. 국내에는 2개 제약회사가 독과점으로 들여오는데, 엔커버와 하모닐란을 들여오기도 어렵고, 많이 들여올수록 손해 본다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현재 한국 의약품 유통에서는 이런 문제가 정말 생산공급 때문인지, 유통이 불균형해서인지, 수요가 갑자기 많아져서인지 제대로 된 원인 파악도 못합니다. 그러다 보니 제시되는 대안은 의약품을 유통하게끔 약값을 올려주는 것뿐입니다.

전문의약품인 경관 유동식은 국내에 하모닐란과 엔커버 두 가지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비슷한 경관 유동식으로, 의약품이 아니라 식품으로 분류되는 뉴케어 등이 있습니다. 이런 경관식들은 굳이 의약품으로 진입할 이유가 없어서 임상시험과 의약품 허가 과정을 거치지 않았습니다. 경관 유동식의 접근권과 관련하여 여러 대안이 제시되지만, 근본적으로 어떤 것은 의약품이고 어떤 것은 식품인 애매한 상황에 교통 정리가 필요한 시점입니다. 그래서 하모닐란과 엔커버는 의약품의 정의와 유통의 책임 주체에 대한 질문을 던집니다. 그래도 환자들이 밥은 먹어야 하지 않느냐는 질문을 국가에 던질 수밖에 없는 현실입니다.

지금까지 의약품이 무엇인지, 의약품으로 인한 이익이 누구에게 가는지, 왜 무엇은 의약품이 안 되는지에 대한 질문을 간략하게 던져봤습니다. 여러분들도 조금은 약을 좋아하게 되었을까요? 현재 진행형인 이 두 가지 의약품 접근권 투쟁에 함께해주길 바랍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을 쓴 서은솔님은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회원, 약사입니다. 이 글은 한노보연 월간 일터 7월호에도 실립니다. 한노보연 후원 문의 : 02-324-8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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