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가짜뉴스'... 일제 판사 깜짝 놀라게 한 농민의 통찰력 [김종성의 '히, 스토리']

김종성 2024. 7. 20. 1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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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외전] 노몬한 전투의 실상 알린 박범광·장창윤

[김종성 기자]

제2차 세계대전(1939~1945)의 일환으로 전개된 태평양전쟁(1941~1945)에 관한 우리 사회의 이미지가 있다. 일본이 하와이 진주만과 필리핀·싱가포르를 공습해 이 전쟁을 일으킨 뒤 남태평양 일대로 확전시키다가, 미국의 원자폭탄 공격을 받고 패망한다. 이런 이미지 속의 일본은 계속 남쪽으로 내려가다가 결국 패망한다. 그런데 일본이 왜 북쪽이 아닌 남쪽으로 진격했는가에 대한 답은 우리 사회에 널리 퍼져 있지 않다.

일본 바로 위쪽에는 소련이라는 강적이 있었다. 소련을 놔둔 채로 남진하는 것은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는 길을 떠나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1917년에 러시아혁명이 발생하자, 일본은 이를 무산시키고자 1918년에 시베리아 출병을 단행했다. 이 과정에서 1920년 4월참변이 일어나 최재형·김이직 같은 독립운동가가 희생되고, 1921년 자유시 참변이 일어나 홍범도 등이 고난을 겪었다. 그런데 이렇듯 소련에 대해 민감했던 일본이 제2차 대전 중에는 소련을 놔둔 채 남쪽으로 진군하는 태평양전쟁에 주력했다.

일본이 왜 그렇게 했는지를 알려주는 답은 존재하지만, 그 답이 우리 사회에는 별로 알려져 있지 않다. 이는 미국의 영향력과도 무관치 않다. 한국 사회에서는 일제 패망과 관련해 미국 원자폭탄의 위력을 과도하게 부각시키는 경향이 존재한다. 이는 한국 독립운동의 성과를 실제보다 저평가시킬 뿐 아니라, 위 문제에 대한 답이 우리 사회에 퍼지는 데도 부정적으로 작용한다.

소련에 패배한 일본.... 사건의 실상 알린 한국인들
 
 일본군이 할힌골강을 건너는 모습.
ⓒ 위키미디어 공용
 
제2차 대전 발발(1939.9.1) 4개월 전인 5월 12일, 동아시아 북부에서 대규모 전투가 발발했다. 국경선이 불확실해 이따금 분쟁이 발생했던 몽골과 만주국의 국경지대에서 일어난 충돌이다. 이날 몽골 기병 약 700명이 할힌골강을 넘고 일본군이 공격을 개시해 전투가 시작됐다.

할힌골강과 그 인근 도시인 노몬한의 사이에서 벌어진 이 전투는 국제전의 성격을 띠었다. 이는 '몽골-소련 대 만주국-일본'의 구도로 전개됐다.

2021년에 <군사발전연구> 제15권 제2호에 게재된 전갑기 전남대 초빙교수의 논문 '노몬한 전투가 일-소 군사전략과 군사행동에 미친 영향'은 "8월 31일 소련군이 포위한 일본군 제23보병사단 병력을 궤멸함으로써 이 전투는 소련군의 승리로 종결되었다"라며 사상자 규모를 이렇게 정리한다.

"노몬한 전투에서 일본군은 사상자 1만 6343명, 행방불명 1021명 등 1만 7000명 이상의 병력 피해를 입었다. 소련군 사상자도 약 1만 8500명으로 추정된다."

소련도 많은 피해를 입었지만, 이 전투의 승자가 일본·만주 연합군이 아니라는 점은 이듬해에 몽골과 만주의 국경이 획정될 때 소련의 주장이 대체로 관철된 점에서도 확인된다. 이 결과는 일본이 북쪽이 아닌 남쪽을 향해 침략전쟁의 화력을 쏟아붓는 전환점이 됐다.

2009년에 <만주연구> 제9집에 실린 한석정 동아대 교수의 '러일·만몽·몽몽의 대결 – 노몬한(할힌골) 전투 70주년 기념 학회 참관기'는 노몬한전투에 관한 선구적 연구를 남긴 미국 역사학자 앨빈 쿡스의 학술 성과를 근거로 "쿡스에 의하면 이 전투는 세계사의 전환점"이었다며 이 전투의 파급력을 이렇게 기술한다.

"노몬한의 패전으로 인한 대(對)러시아 공포로 일본은 1941년 파시스트 동맹인 독일군의 러시아 공격에 동참하지 않았다. 만약 일본이 독일의 요구에 응해 러시아를 동쪽에서 침공했더라면 소련은 두 전선을 지탱할 수 없어 붕괴(되고), 전후 냉전시대에 거대한 사회주의진영을 구축할 수 없었을 것이라 한다. 결국 일본은 소련과의 대결인 북방노선을 폐기하고, 자신의 패망을 초래할 운명적인 남진을 감행하였다. 즉 미국과의 전쟁으로 치닫게 된 1940년(1941년의 오기인 듯) 동남아, 태평양행 진격을 결정하게 된 것이다."

일본제국주의의 북진이 막히는 이 중대한 사건의 실상을 일제의 전쟁 동원이 분주한 식민지 한국에 전파한 이들이 있었다. 일본의 식민지 통제에 영향을 주고도 남기 때문에 일본 입장에서는 절대로 전달돼서는 안 될 뉴스였다. 이런 뉴스를 일부러 퍼트렸으니, 일본이 볼 때는 명백한 반일 불순분자들이었다.

박범광·장창윤의 통찰
 
 경성지방법원이 박범광에 내린 판결문
ⓒ 국가기록원
 
그중 두 사람의 이름이 1939년 10월 6일자 경성지방법원 판결문에 등장한다. 이날 육군형법 위반죄로 8개월의 금고형을 선고받은 40세의 박범광은 이 판결문에 따르면 서당에서 약 3년간 공부한 뒤 강화도 맞은편인 황해도 연백군에서 농업에 종사했다.

박범광은 노몬한 전투가 한창인 그해 7월 하순에 장남 박준식이 운영하는 연백군 연안읍의 대흥상점에서 이 고장 주민인 장창윤을 만났다. 이 자리에서 박범광은 <동아일보> 1면에 실린 '소련기 53기를 노몬한 상공에서 격추'라는 기사를 보여주며 이것은 가짜뉴스라고 귀띔한다.

판결문은 박범광의 발언을 '조언비어'로 규정하면서, 그가 유언비어를 발설한 때가 7월 25일 오후 7시 30분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위 신문은 7월 26일에 나왔으므로, 판결문의 25일은 26일로 정정돼야 할 것 같다. 판결문에 따르면, 박범광의 '조언비어'는 이렇다.

"이 기사는 아무리 생각해도 허위 같이 생각되는 것은 일본군 비행기도 격추되었을 것인데 신문지상에 발표되지 않으니 이는 일본군에게 불리한 기사를 발표하면 민심의 동요를 불러올까 염려하여 소련군의 패전만 발표하는 것이며, 장개석은 이번에 패전하여 오지에 숨어들은 것 같지만 지금도 항전을 지속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는 참으로 영웅이며 일본군이 이미 지나(중국) 각지를 점거하였으나 일본의 국력으로는 이 같은 넓은 점령지를 완전하게 유지하는 것은 극히 곤란한 것이니 이 전쟁을 중지하는 것이 양책이다."

박범광은 몽골·소련 대 만주·일본의 전황뿐 아니라 중국·일본의 전황까지 설명하면서 일본의 실패를 점쳤다. 1995년 6월 2일 자 <조선일보> 12면에 실린 박춘호 국제해양법재판소 재판관(당시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장)의 특집 기고문에 의하면, 박범광은 이 발언을 한 사실이 발각돼 파주경찰소에 체포되고 8월 하순에 검찰로 넘겨졌다.

대흥상점에 우연히 들렀다가 박범광을 만난 장창윤은 연백군에서 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황해수리조합에서 글씨 베끼는 사자생(寫字生) 일을 하고 있었다. 7월 26일에 박범광을 만난 것으로 보이는 그는 28일에도 대흥상점에 들러 그곳 입구 처마 밑에서 '조언비어'를 퍼트렸다. 박범광의 아들인 박준식, 이웃 상점 직원인 채도현과 최장환이 그 자리에 있었다.

이때 장창윤은 박범광에게서 들은 것을 토대로 일본의 패전을 점치는 이야기뿐 아니라, 지원병 명목의 강제징병이 앞으로 더 심해질 거라는 이야기도 함께 언급했다. 이런 장창윤의 모습이 일제 판사의 비위를 거슬리게 했던 모양이다. 판사는 판결문에서 장창윤의 발언을 소개하면서 "자기의 박식을 과시하기 위하여", "자기가 들어 알고 있는 것에 상상을 더하여" 같은 표현을 사용한다.

박범광과 장창윤이 전파한 내용은 파주경찰서 고등계에 입수됐다. 위 박춘호 기고문은 "마음을 착잡하게 하는 것은 이러한 유언비어로 체포돼 곤욕을 치른 사람들의 대부분이 일본 비밀경찰의 사주를 받은 밀대(密隊·밀정)들의 밀고로 일본인의 손에 넘겨졌다는 사실"라며 "그들의 밀고 내용이 그렇게 상세하고 보고 시간이 즉각적이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고 토로한다.

박범광과 장창윤은 직업적인 항일투사는 아니다. 하지만 프로 독립운동가가 하기 힘든 분야에서 일제의 전쟁 수행을 방해했다. 이들이 한 일은 일제의 전쟁 선전전에 대한 저항의 성격을 띠었다. 일제 고등경찰이 밀대 조직을 운영하며 유언비어 전파자들을 색출한 것은 이들이 했던 일이 그만큼 중요했기 때문이다.

이들의 목숨을 건 발언은 일본의 선전전이 한국 민중에 미치는 영향을 차단하는 효과를 발휘할 수 있었다. 동시에, 일본에 대한 불신과 적대감을 퍼트리는 작용을 하는 발언이었다. 활자로 인쇄된 항일 메시지보다 멀리 날아가지는 못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그 이상의 파급력도 발휘할 수 있는 것이었다.

국가보훈부는 박범광과 장창윤을 독립유공자로 인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밀대들이 곳곳에 암약하는 읍내 상점가에서 위험을 각오하고 노몬한 전투의 실상을 전파하다가 8개월이나 감옥에 수감된 분들을 독립운동가가 아니라고 말하기도 곤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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