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경의 산속에서 생산되는 '?' 맥주의 비밀 [윤한샘의 맥주실록]
[윤한샘 기자]
▲ 태평양조 양준석 대표. 맥주와 양조장을 설명 중이다. |
ⓒ 윤한샘 |
"비 오는 게 더 좋을 거 같아요. 산속이지만 더우면 오히려 힘들 수 있거든요. 폭우만 아니기를 바라야죠."
주말에 비가 올까 봐 걱정이라는 문자에 양준석 대표는 쿨하게 답했다. 한 달 전부터 태평양조 맥주 바비큐 파티를 기대했던 나는 장마가 이 계획을 망칠까 전전긍긍하던 중이었다.
6월 마지막 토요일, 문경새재를 지나는데 비가 흩뿌리기 시작했다. 다행히 날씨 앱이 알려주는 강수량은 높지 않았다. 중부내륙 고속도로 점촌함창 나들목(IC)를 빠져나와 40분 정도 들어가니 지동리 표지판이 나왔다. 태평양조는 여기서 뭉우리골을 끼고 산으로 더 들어가야 했다.
궂은 날씨로 내내 불안했던 마음은 양조장 입구에서 환한 웃음을 짓고 있는 태평양조 식구들을 보자 풀어졌다. 함께 갔던 한국맥주문화협회 회원들의 표정도 비로소 밝아졌다. 태평양조 외관은 그냥 창고였다. 이상한 일은 아니다. 많은 소규모 맥주 양조장들이 창고나 산업단지 안에 자리 잡고 있다. 외관이 뭐가 중요하랴, 맛있는 맥주만 나오면 됐지.
시끌벅적한 환영 인사가 끝나고 본격적인 양조장 투어가 시작됐다. 초입에는 스테인리스 스틸 발효조가 줄지어 있었고 안쪽 끝으로 맥주를 만드는 브루하우스가 보였다. 오랫동안 양 대표와 손발을 맞춰 온 김만종 양조사는 모든 것들을 직접 설치했다고 말했다. 바닥, 전기, 공조는 물론 장비 설계와 세팅까지 3명이 해냈다니 믿기지 않았다.
브루하우스는 하루 두 번 연속 배치가 가능한 구조였다. 몇몇 발효조에서 간헐적으로 거품이 쏟아져 나왔다. 효모가 뱉는 이산화탄소였다. 발효 중이라는 뜻이다. 입구로 향하던 중 이슬이 맺힌 발효조 앞에 서 있는 양 대표가 보였다. 손에는 짙은 붉은색 액체가 들려있었다. 잠시 맛을 본 뒤 괜찮다는 사인을 보내자 양조사들이 발효조에 달린 관에서 맥주를 뽑아 나눠주었다.
▲ 오미자와 크랜베리가 들어 간 맥주 |
ⓒ 윤한샘 |
한 모금 마시자 짜르르한 신맛이 입안을 때렸고 이내 신선하고 풍부한 베리 향이 물씬 올라왔다. 생과일을 넣은 사우어 에일(sour ale)이었다. 신맛 나는 맥주를 좋아하지 않는 내 입맛에도 괜찮았다. 이 맥주는 다른 업체와 계약한 물량이라고 했다. OEM(주문자 상표 제조 상품) 맥주지만 태평양조의 색을 입히고자 노력했다는 말도 덧붙였다.
양조장 설명이 끝나자 양준석 대표는 자신들의 철학을 보여줄 맥주가 있다며 우리를 밖으로 데려갔다. 오르막 뒤편에 다른 창고가 있었다. 안은 넓었지만 대부분 비어있었다. 희미한 전등 밑으로 작업하다 만 자재들이 보였다. 안쪽 끝에는 거대한 냉장창고가 윙윙 소리를 내고 있었고 그 옆으로 철제 선반이 놓인 작은 공간이 있었다.
▲ 숙성되고 있는 맥주들 |
ⓒ 윤한샘 |
이곳은 병입 된 맥주들을 숙성하는 창고였다. 750밀리 맥주들이 빽빽하게 누워있었다. '와일드 가든 청수' 라벨이 붙어 있는 맥주도 있었지만 없는 것들도 많았다. 순간 기시감이 들었다. 기억을 더듬어보니 벨기에 람빅 양조장 깐띠용이 떠올랐다. 그곳에도 복도 여기저기에 맥주들이 누워있었다. 병입 후 숙성되고 있던 맥주였다. 여기도 마찬가지였다.
"이게 저희가 추구하는 맥주들입니다. 문경에 있는 미생물들을 이용하고 있습니다. 발효 자체가 가진 놀라움을 맥주에 담고 싶거든요. 인위적으로 무언가를 첨가하거나 홉을 대량으로 넣어 향을 내는 것을 지양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방식이 지역성을 맥주에 입히는 방법이라 믿습니다."
▲ 와일드가든 청수 |
ⓒ 윤한샘 |
와일드 가든 청수는 양조장 뒷산에서 채취한 미생물과 와인을 만들고 난 포도 껍질을 이용한 맥주다. 우아한 신맛 위에 젖은 가죽 향과 은은한 과일 향이 느껴졌다. 양 대표는 구석에서 맥주 몇 병을 가져왔다. 종이 라벨에는 손으로 대충 쓴 "?"와 "바비큐 그릴 뒤 있던"이라는 문구가 있었다.
▲ ? 맥주. 정체가 궁금하다 |
ⓒ 윤한샘 |
태평양조 맥주들이 흥미로운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와 "바비큐 그릴 뒤 있던"은 태평양조의 시간이 담겨 있었다. 술의 세계에서 발효가 가진 매력이 녹아있었다. 인간이 통제하지 못하는 영역에서 나오는 미지의 향미들. 사실 선조들은 이 땅에서 아주 오래전부터 이렇게 술을 빚어 왔다. 일제강점기와 급격한 산업 사회를 겪으며 우리가 기억하지 못하는 것일 뿐.
와일드 에일과 와인 양조가 발달한 해외에는 다양한 야생발효 맥주들이 나오고 있다. 지역 미생물과 과일 그리고 발효 환경에 따라 수 백 가지의 매력을 발산한다. 아직 맥주 문화가 척박하고 크래프트 맥주 역사가 짧은 우리는 이제 막 걸음을 내딛는 단계다. 그러나 확신한다. 김치와 젓갈에 익숙한 우리 어딘가에 선조들의 DNA가 새겨져 있음을.
태평양조는 가장 적극적으로 와일드 에일을 선보이고 있는 양조장이다. 다른 맥주에 비해서 위험도 존재한다. 야생발효는 발효기간이 길 뿐만 아니라 오염으로 실패할 확률도 있다.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양조사의 강력한 철학과 인내가 필요하다. 태평양조도 '와일드 가든 청수'를 출시하기까지 많은 맥주를 폐기했다고 한다. OEM 맥주들은 자본 회전을 위한 수단 중 하나다.
▲ 바비큐 그릴 뒤 맥주. 정체가 궁금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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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조장을 둘러보니 긴 테이블에 맥주와 과일이 놓여 있었다. 야외 그릴 위 돼지고기에서는 모락모락 김이 올라왔다. 비 내리는 풍경, 흔들리는 나무 소리 그리고 맛있는 고기 냄새가 꿈처럼 느껴졌다.
맥주는 셀프다. 맥주 탭이 달려 있는 맥주 냉장고(케그레이터)가 테이블 뒤에 준비되어 있었다. 먹고 싶은 만큼 양껏 마실 수 있다. 와일드 에일도 있었지만 여기서 만든 인디아 페일 에일(IPA)와 밀맥주도 맛볼 수 있다. 양조장에서만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호사다.
남은 "?"를 마시며 야생발효 맥주 양조에 대해 궁금했던 점을 물어봤다. 야생효모와 젖산균은 와일드 에일에서는 아군이지만 그렇지 않은 스타일에서는 적군이다. 이 녀석들은 생명력이 강하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남아있으면 언제라도 다른 맥주를 오염시킬 수 있다. 카스에서 시큼한 맛이 난다고 상상해 보라. 이런 재앙을 막기 위해 양 대표는 야생발효 맥주 라인과 타 맥주 라인을 구분한다고 했다. 장비 내 자동세척(Clean In Place)이라 불리는 맥주 청소도 더 세심하고 강력하게 하고 있다고 했다.
지역 미생물을 컬처링(culturing), 즉 접촉시키는 방법도 궁금했다. 이를 위해서는 맥즙을 일정 시간 야외에 노출시켜야 한다. 자칫하면 원치 않는 균이 영향을 미치거나 벌레나 들어갈 수도 있다.
양 대표는 가장 많은 실패를 경험한 부분이라고 털어놨다. 더운 여름은 피해야 하고 늦가을이나 초겨울에만 가능한데 그 타이밍을 잡는 것이 쉽지 않다고 했다. 자세한 건, 태평양조의 비밀이라며 싱긋 웃었다. 그러고 보니 람빅도 비슷했다. 람빅 양조사도 늦가을 밤에 맥즙을 짧은 시간 미생물에 노출시킨 후 나무 배럴에서 발효와 숙성을 진행한다. 불필요한 오염을 막기 위해서다.
앞으로 어떤 맥주를 계획하고 있는지 물으니 '발효의 미학'이라는 단어가 나왔다. 지역 나무로 직접 만든 큰 배럴을 이용한 맥주도 그리고 있다고 했다. 실행에 옮겨진다면 한국에서는 쉽게 만날 수 없는 독특한 맥주가 될 것만은 분명하다.
▲ 태평양조 로고. 동물의 정체는 해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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