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윤의 딴생각] 시간을 절약하는 방법
가진 거라곤 시간뿐일 때가 있었다. 넘치는 시간을 어찌 보내야 할지 몰라 온종일 거리를 쏘다녔다. 긴긴 산책이 지루해지면 미술관, 영화관, 도서관 등 관이란 관은 죄다 찾아다니며 시간을 죽였다. 밤이 되면 싸구려 술을 진탕 마시고 아침이 되면 숙취에서 헤어나오려 물을 들이켰다.
여기저기서 시간 아까운 줄 모른다는 잔소리가 들려오기는 했지만 시간이 넘쳐나니 펑펑 써도 괜찮다며 무시했다. 만일 시간을 저축해 바쁠 때마다 꺼내어 쓸 수 있는 상품이 있었대도 가입하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처럼 시간에 허덕일 줄은 꿈에도 몰랐으니 말이다.
일이 몰아친다. 산더미처럼 쌓인 일만 떠올리면 마음이 무거워져 숨을 자주 몰아쉰다. 생각 같아서는 쉬엄쉬엄 일하고 싶지만 물 들어올 때 노를 젓지 않으면 망망대해와도 같은 세상에서 표류하는 신세를 면치 못할 것이 뻔하다. 잠을 줄여가며 일한 탓일까. 샤워할 때마다 머리카락이 한줌씩 빠져나간다. 수챗구멍에 어지럽게 엉킨 머리카락을 치우며 생각했다.
머털이처럼 머리카락으로 분신술을 부려 여러 명의 나에게 일을 분담하고 싶다고, 그럴 수만 있다면 잠도 실컷 잘 수 있을 거라고, 숙면을 취하고 나면 더 맑은 정신으로 더 나은 결과물을 만들어낼 수 있을 거라고 말이다. 하지만 나에게는 그런 도술을 부릴 능력이 없으므로 다른 방법을 강구하기에 이르렀다.
충분한 수면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불필요한 행동을 삼가기로 했다. 페이스북 최고경영자 마크 저커버그는 옷 고르는 데 에너지를 소모하지 않기 위해 회색 티셔츠만 입는다지. 그렇다면 나는 오염에 강한 검정 티셔츠만 입어 빨래하는 시간마저 아끼도록 하지. 지지고 볶는 집밥은 사치, 끼니는 배달로 때우자. 오히려 좋아. 맛있어. 매일 하던 영어 공부도 챗지피티를 믿고 잠시 스톱. 잠들기 전까지 쓱쓱 넘겨 보던 숏폼은…, 절대 포기 못해! 대신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한 시간만 보는 걸로.
그럼에도 하루가 빠듯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누가 나 대신 화장실 청소 좀 해준다면, 머리 좀 감겨주고 말려준다면, 각종 공과금 좀 알아서 내준다면 삶이 한결 가붓해질 텐데. 아, 고되고도 자질구레한 인생이여.
한시가 아까운 마당에 절친한 친구에게서 연락이 왔다. 내 생일을 맞이해 근사한 점심을 대접하겠다는 이유에서였다. 여유를 부리면 꼭 그만큼 일이 쌓이는데 이를 어쩐다. 그러나 나보다 몇 곱절은 바쁜 워킹맘 친구가 나를 위해 애써 시간을 낸다는 제안을 차마 거절할 수 없었다.
약속 당일, 촘촘한 24시간을 보내기 위해 새벽같이 일어난 나의 귓가에서 미국 드라마 ‘하와이 파이브 O’의 테마곡이 환청처럼 들려오기 시작했다. “두구두구두구두구, 챙!” 하며 시작한 나의 하루는 “빠빠빠빠빠빰, 빠빠빠빠빰, 빠빠빠빠빠빰, 빠빠빠빠빰!” 하는 리듬에 맞춰 정신없이 흘러갔고, 결국 일과 친구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는 쾌거를 이뤘다.
내가 가진 기력을 모두 소진하고 집으로 터덜터덜 돌아오는 길, 쉬어 꼬부라진 파김치처럼 이마에 척 달라붙은 앞머리를 쓸어 넘기며 숨을 푹 몰아쉬었다. 그날의 첫 한숨이었다. 어라, 그러고 보니 머털이가 되고 싶네, 인생이 고되네 하는 푸념 역시 단 한 번도 하지 않았잖아? 그런 데 내어줄 시간조차 없을 만큼 분초를 다투며 하루를 보낸 덕이었다.
그제야 나는 알았다. 이전의 나는 바쁘긴 바빴으나 눈코 뜰 새 없을 정도로 바쁘지는 않았음을, 걸핏하면 신세를 한탄하느라 일 자체에 몰입하지 못했음을, 그 결과 생각보다 많은 시간을 허비하고 있었음을 말이다. 그러니까 시간을 아끼기 위해 내가 삼가야 할 행동은 다름 아닌 ‘불평’이었던 것이다.
샤워기 아래에 서서 하루의 피로를 맑은 물로 씻어보냈다. 깨끗해진 몸을 자리에 누이고 날이 밝으면 해야 할 일을 머릿속으로 정리해 봤다. 만만치 않은 하루가 되겠다는 생각에 또다시 한숨이 나오려 했지만 입을 꾹 다물고 미소를 지으며 뜨거운 콧김을 내뿜었다.
나에게 주어진 삶을 감사하게 받아들이자거나 매일매일을 인생의 마지막 날인 것처럼 열심히 살아보자는 낯간지러운 말은 못하겠지만, 불평만은 하지 말자는 작은 결심을 해본다. 그렇게 번 시간으로 약간의 여유를 즐길 수 있기를 희망하며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밤 숏폼은 1시간30분은 봐도 괜찮겠지?
이주윤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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