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승-전-중국!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결국 향한 곳 [김기협의 남양사(南洋史) <21>]
“최초의 세계일주” 하면 ‘마젤란(1480?-1521)’의 이름이 바로 떠오른다. 그러나 마젤란 본인은 세계일주를 완성하지 못했다. 1519년 9월 스페인을 떠난 그는 1521년 4월 막탄섬(필리핀)에서 목숨을 잃었다. 그의 업적은 정확히 말한다면 세계일주가 아니라 태평양항로 개척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가 이끈 함대의 다섯 척 배 중 한 척이 원래의 약 270명 대원 중 18명을 싣고 1522년 9월에 스페인으로 귀항했다. 이들을 “최초의 세계일주”의 주인공으로 봐야 할 것이다. (빅토리아호로 돌아오지 못하고 나중에 귀국한 대원이 16명 있었고 도중에 이탈한 배로 먼저 돌아온 55명이 따로 있어서 함대의 인명 피해는 약 180명이었다. 이 집계는 정밀하지 않다.)
마젤란의 공적을 받드는 사람들은 그가 앞서(1505-1512) 말라카 등지에서 활동한 사실을 들어 “거의 완전한” 세계일주였다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좀 억지스럽다. 말라카와 필리핀 사이의 거리도 수천 킬로미터나 된다. (적도 기준으로 지구 둘레는 4만 킬로미터다.)
그보다는 공식 기록에 오르지 못한 진짜 주인공을 지목하기도 한다. 마젤란이 말라카에서 유럽으로 데려갔던 엔리케란 이름의 노예가 있었는데, 항해 후 해방시켜 준다던 마젤란의 약속이 마젤란이 죽은 후 지켜질 것 같지 않자 도망해 버렸다. 필리핀에서 엔리케가 말레이어로 현지민과 소통한 사실을 보면 자기 고향을 찾아갔을 가능성이 크다.
‘2차 지망’으로 스페인을 찾은 콜럼버스와 마젤란
대항해시대의 주역으로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나란히 꼽히지만 15세기 말 시점에서는 포르투갈이 단연 앞서 있었다. 스페인이 1469년 카스티야-아라곤 통합으로 국체를 세우기 시작할 때 포르투갈은 항해왕 엔히크(1394-1460)의 주도하에 막강한 해상력을 키워놓고 있었다. 스페인은 1492년 그라나다 ‘탈환’ 무렵에야 경쟁에 나설 형편이 되었다.
‘도전자’ 스페인이 단기간에 포르투갈의 ‘맞수’로 올라서는 데 콜럼버스와 마젤란이 큰 공을 세웠다. 둘 다 포르투갈 배를 몰고 싶어 하다가 2차 지망으로 스페인을 찾은 사람들이다. 디펜딩 챔피언 포르투갈은 아프리카 남단을 돌아간다는 기존 전략에 집중한 반면 도전자 스페인은 모험적 전략을 취하던 상황을 보여준다.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해외 활동영역을 구획한 토르데시야스조약(1494)이 잘 알려져 있는데, 그전에는 포르투갈에 전적으로 유리한 알카소바스조약(1479)이 있었다. 아메리카 발견으로 기세가 오른 스페인의 요구에 따라 전보다는 대등한 조건의 조약으로 바꾼 것이다.
새 조약의 핵심 내용은 카보베르데(Cape Verde) 군도 서쪽 370리그 지점을 지나는 경도선을 기준으로 동쪽은 포르투갈, 서쪽은 스페인의 활동영역으로 한다는 것이었다. 아프리카 서해안 바깥의 카보베르데 군도는 콜럼버스 항해 이전 유럽인이 알고 있던 가장 서쪽 땅이었다.
허점이 많은 규정이었다. 1리그의 길이가 명확하지 않고, 카보베르데 군도의 어느 위치부터 재는 것인지도 밝혀놓지 않았다. 1529년 토르데시야스조약이 사라고사조약으로 대치될 때까지 기준 경도의 위치에 두 나라가 합의한 일이 없었다. 그리고 양측 활동권을 동서로 확장해 나가다가 지구 반대쪽에서 마주치는 상황에 대한 대비가 없었다.
지구 반대쪽에서 다시 만난 챔피언과 도전자
지구 반대쪽에서 마주치는 상황은 마젤란 항해를 통해 현실로 나타났다. 마젤란은 향료제도(말루쿠제도와 반다제도)가 토르데시야스조약에 따라 스페인 관할권에 들어간다는 주장으로 스페인의 지원을 청했다. 대서양상의 경계선을 지구 반대쪽에 투영해서 그 서쪽을 포르투갈, 동쪽을 스페인의 영역으로 본다면 향료제도는 그 동쪽에 있다는 것이었다.
마젤란은 1512년 포르투갈 함대가 처음으로 향료제도를 찾아갈 때 말라카에 있었다. 윌리엄 번스틴은 〈교역의 세계사 A Splendid Exchange〉(2008)에서 마젤란의 사촌(친구일 수도 있음) 프란치스코 세랑이 마젤란의 활동에 중요한 도움을 주었을 가능성에 주목한다.
두 사람은 1505년에 함께 인도양에 들어섰고 1509년 말라카에서 현지민의 기습을 당할 때 마젤란이 세랑의 목숨을 구해준 일도 있었다고 한다. 1511년 말라카를 탈취한 후 마젤란은 포르투갈로 돌아왔고, 세랑은 향료제도를 향해 떠났다.
세랑은 향료제도에서 타고 있던 배가 좌초한 후 그곳에 눌러앉았다. 현지 술탄의 군사고문 같은 직책을 맡은 것 같다. 그곳에서 마젤란에게 여러 번 편지를 보내 다시 동쪽으로 와서 함께 지내자고 청하며 현지에 관한 많은 정보를 보내주었다. 마젤란은 세랑이 보내준 정보 덕분에 스페인에 가서 향료제도 전문가로 통했으리라고 번스틴은 본다.
향료제도에서 포르투갈-스페인까지 편지를 보낼 수 있었던 것은 세랑이 향료 유통에서 맡고 있던 역할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 같다. 마젤란은 향료제도가 말라카에서 동쪽으로 대단히 먼 곳에 있어서 포르투갈의 관할 영역을 벗어난다는 주장을 폈는데, 현지에 있던 세랑의 편지가 그 신뢰도를 뒷받침해주었을 것이다.
스페인이 마련한 동방의 교두보 필리핀
다섯 척 중 한 척이 270명 중 겨우 18명을 싣고 돌아왔지만, 재정적으로는 대성공이었다. 빅토리아호에 실린 향료가 어마어마한 가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후속 함대가 이 항로의 어려움을 확인하면서 스페인의 동남아 진출은 늦어졌다.
로아이사(García Jofre de Loaísa, 1490~1526)의 후속 함대가 일곱 척 배에 450명 인원을 싣고 1525년 7월 스페인을 떠났으나 한 척만이 향료제도에 도착했다. 그들은 몇 해 동안 포르투갈인에게 저항하다가 항복하고 1536년에 포르투갈 배로 유럽에 돌아왔다. (1527년에 멕시코에서 떠난 또 하나의 함대도 비슷한 결과를 맞았다.)
다음에는 비야로보스(Ruy López de Villalobos, c. 1500~1546)의 원정이 1542년에 있었다. 6척의 배에 약 4백 명 인원을 싣고 온 비야로보스는 “필리핀”이란 이름을 붙인 장본인이었으나 정착에 실패하고 포르투갈인에게 체포되어 감금 상태에서 죽었다.
스페인인의 정착은 1565년에야 시작되었다. 다섯 척 배에 5백 명 병력을 싣고 온 레가스피(Miguel López de Legazpi, 1502~1572)가 세부섬을 거쳐 1571년 지금의 마닐라에 자리 잡고 초대 필리핀 총독이 되었다.
비야로보스와 레가스피의 함대는 스페인 본국이 아니라 누에바에스파냐(Nueva España, 지금의 멕시코) 식민지에서 보낸 것이었다. 물론 스페인 국왕의 승인은 있었지만 1535년 부왕국(副王國, viceroyalty)으로 승격된 식민지의 힘이 자라난 결과였다. 사라고사조약(1529)으로 향료제도의 포르투갈 귀속이 정해진 후 본국의 관심도 줄어들었다.
1525년부터 두 나라 왕실의 관계가 가까워지면서 사라고사조약이 추진되고, 엄밀한 논리보다 정치적 흥정으로 타결되었다. 말루쿠제도 동쪽 297.5리그 지점의 경도선을 경계로 삼아 향료제도를 포르투갈이 갖고 스페인에게 35만 두캇의 보삼금을 지불한다는 내용이었다. 경도상으로 포르투갈은 190도 이상, 스페인은 170도 미만을 점하게 되었다.
사라고사조약에 따르면 필리핀도 포르투갈의 영역이었다. 그러나 포르투갈이 중시하지 않는 곳이었기 때문에 스페인이 밀고 들어가는 것을 묵인했다. 얼마 후 두 나라 왕조 통합(Iberian Union, 1580-1640)으로 스페인이 포르투갈의 반대 없이 필리핀 정복을 진행할 여건이 계속되었다.
마젤란이 한쪽 길을 연 후 반세기만에...
마젤란부터 시작해서 태평양을 서쪽으로 건너간 스페인 함대는 여럿 있었으나 어느 함대도 아메리카로 돌아가지 못했다. 가는 길만 있고 오는 길이 없어서는 ‘항로’라 할 수 없다. 태평양 항로는 1565년에야 열렸고, 이로써 스페인의 필리핀 정복 사업이 가능하게 되었다.
항로 개척에 앞장선 사람이 매우 특이한 인물이었다. 로아이사 원정대에 참여했다가 10년 만에 돌아온 우르다네타(Andrés de Urdaneta, 1508~1568)는 이 기간에 (1525-1536) 일지와 해도 등 많은 자료를 작성했는데 대부분을 포르투갈 측에 압수당했으나 그 자신이 그 방면의 ‘걸어다니는 백과사전’이 되어 스페인 해상활동의 브레인이 되었다.
우르다네타는 1552년 아우구스티누스회에 입회해 수도사가 되었다. 1559년경 새 원정대를 구상할 때 누에바에스파냐 부왕도 스페인 국왕도 그를 사령관으로 삼고 싶어 했으나 사양하고 레가스피를 추천했다. 본인은 고문 자격으로 몇 명 수도사와 함께 참여했다.
1565년 2월 필리핀 도착 후 세부섬의 새 기지가 안정된 후 우르다네타는 배 한 척으로 회항로에 나섰다. 6월 1일 출발해 구로시오(黑潮)를 타고 동북쪽으로 올라갔다가 북위 38도선 어림에서 편서풍을 타고 태평양을 가로질렀다. 9월 18일 캘리포니아 해안에 도착하고 10월 8일 아카풀코에 입항했다.
이로써 ‘마닐라 갈레온(Manila galleon)’이 시작되었다. 해마다 몇 척 배가 필리핀과 멕시코 사이를 왕래하는 관례가 1815년까지 이어진 것이다. “중국 배(La Nao de China)”라는 별명이 그 역할을 보여준다. 향료를 찾아 남양으로 간 스페인인이 정작 수지맞는 사업으로 찾아낸 것은 중국 상품의 교역이었다.
조금 앞서 열린 포르투갈의 고아-마카오-나가사키 노선은 “은(銀)의 배(nau da prata)”란 별명으로 불렸다. 일본산 은을 갖고 중국 상품의 교역에 나선 것이다. 이제 스페인인은 아메리카산 은을 갖고 그 뒤를 따랐다. 중국이 움직이지 않고 있어도 그 거대한 경제력이 유럽인의 활동을 은근히 끌어들이는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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