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좌를 지키고 싶나…그 무게를 견뎌라 [한순구의 ‘게임이론으로 보는 경영’]
게임이론 입장에서 보면 주인(principal)인 공민왕이 신돈을 대리인(agent)으로 썼다. 게임이론 연구자들이 가장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로 생각하는 것이 바로 ‘주인-대리인’ 문제(principal-agent problem)다. 아마도 일반인이 알고 있는 주인-대리인 문제의 악한(惡漢)은 대리인일 것이다. 주인이 믿고 맡긴 일을 대리인이 주인 대신 열심히 하기로 약속해놓고서는 막상 대리인 자신의 이익만 챙기고 게으름을 피우는 것이 대리인 문제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인-대리인 문제를 게임이론으로 풀어보면 대리인만큼 문제가 있는 사람이 바로 주인이다. 간단히 생각해봐도 남을 위해서 일하는 대리인은 게으름을 피울 것이 뻔히 예상되는데 이런 대리인이 열심히 자신을 위해서 헌신할 것이라고 정말로 믿을 어리석은 주인이 있을지 의문이 든다.
실제로 수학적으로 주인-대리인 문제를 풀어서 분석해보면 대리인에게 맡기면 문제가 생길 것을 주인이 이미 알면서도 여러 가지 이유로 이런 대리인 문제를 감수하고 대리인을 사용하는 것으로 결과가 나온다.
다시 공민왕과 신돈의 상황으로 돌아가보자. 신돈을 대리인으로 고용해 왕인 자신의 전권을 줬을 때 신돈이 그 권력을 남용할 것이라는 것을 영리한 공민왕이 몰랐을 리 없다. 공민왕은 몽골인 왕비가 아닌 고려인 왕비인 어머니에게서 출생했다는 당시로서는 불리한 출신 성분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왕위 계승자로 인정받지 못하고 원나라에 끌려가 오랫동안 볼모 생활을 했다. 이런 험난한 성장 과정을 보낸 공민왕이 대리인인 신돈의 일탈을 예상하지 못했을 리가.
왕인 자신의 암살까지 시도하는 권문세족들 공격을 피하면서 고려를 개혁하려는 생각에서 신돈을 앞세운 것이 아닐까? 아마도 자신은 신돈이 전민변정도감에서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고 핑계를 대면서 권문세족의 비난을 피하고 신돈에게 악역을 맡겼을 것이다. 이런 목적이 있었기에 신돈이 권력을 남용해도 한동안 참아주다 권문세족 반발이 커져 개혁이 어려워지자 모든 죄를 신돈에게 물어서 처형했을 테다.
최고 지위에 오른 사람은 누구나 부하의 공은 자신의 것으로 하고 자신의 잘못은 부하의 실수로 만들고 싶은 유혹을 느낀다. 아마 공민왕은 신돈의 개혁이 성공하면 자기가 공을 차지하고 반대로 신돈의 개혁이 실패하면 그에게 죄를 묻고자 하는 생각이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대리인의 일탈을 미리 예상하지 못할 정도로 주인이 어리석지는 않다는 게임이론의 또 다른 결론은 대리인도 어리석지 않다는 사실이다. 잘못되면 대신 죄를 뒤집어씌우려는 주인의 의도를 대리인이 모를 리가 없다. 주인 대신 비난을 받고 죄를 뒤집어쓰기보다는 다른 대책을 세울 확률이 높다.
물론 신돈은 공민왕에 의해 등용되고 다시 처형됐지만, 이런 신돈의 운명은 결국 공민왕의 발목을 잡는다. 신돈을 처형한 공민왕은 자제위(子弟衛)라는 친위조직을 만들어 젊은 청년을 모았다. 신돈을 이용한 계획이 실패하자 이번에는 청년들로 친위부대를 만들어 자신의 세력을 키우려는 시도였다. 그런데 이런 자제위의 한 명인 홍륜이 죄를 지어 공민왕에게 벌을 받게 되자 오히려 한밤중에 공민왕의 방에 가서 왕을 죽인다. 공민왕이 살해되면서 고려의 운명은 결정적으로 기울어버리고 얼마 후 이성계의 조선에 나라를 넘겨주게 된다.
홍륜은 앞선 신돈의 죽음을 보고 현재 공민왕과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 해도 공민왕은 언제라도 자신을 버리고 처형할 수 있다는 교훈을 얻었을 것이다. 그래서 죽임을 당하기 전에 왕을 죽인 것은 아닐까. 앞선 대리인인 신돈의 운명을 본 다음 대리인인 자제위의 홍륜이 선수를 친 것이다.
게임이론에서 ‘백워드인덕션(backward induction)’이라는 용어가 있다. 우리가 자주 사용하는 단어로 바꾸어보면 ‘역지사지(易地思之)’라는 의미다. 주인은 대리인을 마음껏 사용하고 버리겠다고 생각하는데 대리인 입장에서 역지사지로 생각해보면 그런 주인의 의도를 예상하고 오히려 먼저 배신한다는 얘기다.
멀리 생각할 것도 없이 고려를 건국한 왕건의 경우를 보면 원래 궁예라는 왕을 모시면서 후백제와 싸우는 군대의 장군이었던 왕건이 오히려 궁예를 죽이고 새로이 나라를 세웠다. 왕건 자신이 궁예라는 주인을 위해 일해야 하는 대리인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주인인 궁예를 죽였으니 극단적인 주인-대리인 문제라고 볼 수 있다.애초에 궁예가 왕건을 동생으로 삼고 군사권을 넘긴 것이 문제의 시작이었다. 왕이 된 궁예는 전투에는 전혀 참가하지 않은 채 안전한 후방의 수도에 거주하면서 왕건만 최전선에 보내 후백제와 싸우게 했다. 어쩌면 궁예는 왕건이 전투에서 이기면 그 공은 자기가 가로채고 전투에서 지면 왕건에게 책임을 물으려는 얄미운 계획을 세웠던 것은 아닐까?
하지만 이런 궁예의 지나치게 영리한 계획을 당연히 왕건도 알고 있었을 것이고, 오랫동안 전군을 지휘하면서 권한이 커진 왕건은 궁예에게 자신이 토사구팽당하기 전에 미리 반란을 일으켜서 궁예를 제거한다는 시나리오를 세웠을 테다.
역사적으로 왕이 타인에게 전권을 맡기는 경우 심각한 대리인 문제가 발생하는 경우가 많았다. 유일하게 대리인 문제를 피할 수 있었던 상황이 어린 왕을 대신해 어머니가 수렴청정을 하는 경우였다. 당연히 어머니인 왕비는 아들을 대신하는 대리인이지만, 원래 모자 관계라는 것이 한마음 한뜻으로 피로 이어진 관계고 자식의 성공을 자신의 성공보다 기뻐하는 사람이 바로 어머니라는 점을 생각하면 대리인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이런 수렴청정의 경우가 아닌 주인-대리인 상황이 발생하면 결국 공민왕처럼 대리인인 신돈을 제거하거나 왕건의 경우처럼 대리인이 오히려 주인을 제거하는 경우가 자주 발생한다.
개혁을 하고 싶다면 공민왕이 직접 나서서 진두지휘를 했어야 했다. 신돈이라는 승려를 발탁해 전권을 줬다 해도 고려 사람들이 그것이 공민왕의 개혁이라는 것을 모를 리가 없다. 궁예도 편안한 수도에서 쉬면서 왕건만 계속 전쟁터에 내보낸 것이 실패의 원인이었다. 왕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전투에 나갔어야 했다.
어떤 조직이든 최고 결정자는 모든 책임을 지게 된다. 자기 한 몸 편하고 싶고,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고 싶지 않다고 해서 대리인을 내세워 대신 비난을 받게 하거나 궂은일을 도맡아 하게 하는 것은 언뜻 생각하기에 영리한 전략인 듯하지만 역사적으로 성공한 사례가 많지 않다. 최고 결정자의 무게를 피하지 말고 스스로 책임지는 자세가 없다면 그 조직은 주인-대리인 문제가 만연하게 돼 실패하게 될 확률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268호 (2024.07.10~2024.07.23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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