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번 우드가 내 핵무기가 된 사연 [정현권의 감성골프]
라운드를 다 돌고 카트에서 백을 내려 트렁크에 집어넣던 캐디가 말을 건넸다. 그런가 보다 싶어 무심코 답했더니 캐디로선 소소한 행운이라며 말을 되받았다.
무거운 골프 백을 카트에 싣고 내리는가 하면 진행 중에 많게는 10여개 클럽까지 들고 이동하는 캐디로선 일상이 무게와의 전쟁이다. 이러다가 한쪽 어깨가 축 처지는 직업병까지 걱정된다며 슬픈 미소를 지었다.
골프 실력이 아니라 골프 백이 가볍다고 캐디에게 칭찬받는 묘한 기분이었다. 캐디 짐을 덜어주려고 백을 가볍게 한 건 아닌데도 말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클럽 개수를 계속 줄여왔다. 10여년 전 3번과 4번 아이언에 이어 올해에는 급기야 5번과 6번마저 백에서 빼냈다.
들고 다니기 무거워서가 아니라 파워를 구사하면서 목표 비거리를 감당하기 버거워졌기 때문이다. 대신 5번 우드를 조절하면서 이들 클럽으로 감당하던 거리를 커버한다.
기능이 좀 애매하던 하이브리드나 유틸리티도 우드로 대체했다. 이래서 골프 백에는 드라이버, 우드, 아이언(7, 8, 9, P, A, S), 퍼터, 우산뿐이다.
클럽 9개+우산이다. 공도 바람막이도 파우치나 보스턴 백에 보관하기에 가벼운 골프 백으로 캐디에게 칭찬받을 만하다.
나이가 들면서 모든 게 가벼운 골프로 옮겨 가는 중이다. 몸도 마음도 비워가는 중이다.
160~170m 거리에 꽂혀 롱 아이언을 구사하던 시절도 저물었다. 집중력이 예전만 못하고 찍어 치기(다운 블로)를 구사하려면 힘에 부친다.
최애 클럽은 이젠 5번 우드가 돼버렸다. 드라이버를 제외하고는 150m 이상은 모두 우드로 해결한다. 나로선 핵무기나 다름없다.
우드로 부드럽게 스윙하면서 예전 롱 아이언 거리를 커버한다. 클럽에 임하는 부담감을 줄이니 몸에 전해지는 충격도 덜하다.
“이러다 골프를 영원히 못할까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었어. 6개월 지나 골프를 해도 괜찮다는 말을 듣고 정말 다시 태어난 기분이야.”
바쁜 사회생활 중에 골프가 유일한 낙이었던 그는 진심 골프 애호가였다. 주말에는 틈나면 골프 대회 갤러리로 참가하거나 용품점을 찾았다.
캘린더에 빼곡한 골프 일정과 수십 년 골프 일지는 그의 인생수첩이다. 골프 일지에는 그날 동반자, 날씨, 특징 등이 빠짐없이 기록돼 있다.
“이젠 좀 더 건강한 모습으로 오래 즐기는 골프를 해야죠. 스코어에만 매달리는 골프는 좀 자제하고요~” 의사가 선배에게 전한 말이다.
친한 고교 친구는 최근 햄스트링 파열로 한 달간 골프를 쉬었다. 연습 도중 오른발에서 왼발로 무게중심을 옮기려고 무리하게 하체 이동을 하다가 탈이 났다.
이러다가 평생 클럽을 못 잡게 될까 잔뜩 겁을 집어 먹고 한의원과 정형외과를 전전했다. 증상이 좀 가라앉아 다시 필드를 찾았다가 재발하자 아예 클럽을 놓고 완쾌 순간을 기다렸다.
“이젠 살살할 때입니다. 본인보다 남을 기쁘게 하는 것도 중요하고 보람 있는 일이죠.”
의사 얘기를 귀담아듣고 완전히 회복한 후에 클럽을 잡은 그는 매일 스쿼드 100번으로 하체를 보강한다. 건강한 몸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는 오랜 교훈을 이제서야 명심보감인 양 수시로 되뇐다.
요즘은 무리한 일정도 자제한다. 일주일에 한 번 정도에 그치되 가능하면 연속 라운드를 피한다. 해를 더할수록 조그만 기상 변화에도 감각이 예민해진다.
몰입은 골프의 치명적인 매력이다. 버디를 잡는 순간 강한 도파민이 분비돼 뇌를 자극한다. 일상이 심신에 박아놓은 못을 빼내고 모르핀을 투입하는 느낌이다.
늘 그렇듯 작용에는 반작용이 있다. 몰입은 때로 상상력을 제한하고 방해하는 요소로도 작용한다. 다른 직업보다 골프를 하는 문인이 유독 드문 것도 이런 이유에서인지 모른다.
한창 때는 장마철 폭우와 폭설을 불사하고 골프를 했다. 늘 따라다니던 하수가 언젠가 나를 추월하고 경쟁 상대가 놀리면 끙끙대며 잠도 설쳤다.
건강하고 오랫동안 골프를 즐길 수만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편한 사람과 함께하는 공간과 시간이 작은 행복으로 다가올 뿐이다.
“골프는 너의 인생도, 사랑하는 아내도 아니다. 단지 게임일 뿐이다.” (그레그 노먼)
정현권 골프칼럼니스트/전 매일경제 스포츠레저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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