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치기하다가 본 끔찍한 광경, 하루에 426명이 죽은 날 [박만순의 기억전쟁2]

박만순 2024. 7. 19. 1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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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군이 3.8선 넘은 날 벌어진 일... 전남 영광군 백수면 일가족이 몰살된 사연

[오마이뉴스 박만순 기자]

공격수가 된 장철수(가명, 당시 9세)는 '이번에 뽄대를 보여줘야지'라며, 땅을 파 비스듬하게 세워놓은 작은 막대기인 '알'과 알을 날려 보낼 방향을 쳐다봤다. 

수비수들은 철수가 어느 방향으로 알을 날릴지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국민학교 2학년인 철수는 친구들보다 키가 커, 자치기를 하면 인기가 많았다. 그런 이유로 상대편인 수비수들은 철수가 비록 어리긴 했지만 일찌감치 다섯 발자국쯤 뒷걸음질 쳤다. 툭 치니 '알'이 튀어 올랐고, 철수는 긴 막대인 '채'로 힘차게 쳤다. 딱 소리가 나며 철수 편 아이들이 '와!!' 하는 순간이었다.

아기부터 할머니까지

마을 하천 앞으로 집안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포함한 어른들이 밧줄에 묶여 어딘가로 끌려가고 있었다.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자치기를 하고 있던 철수와 꼬맹이들은 멀리서 어른들을 뒤따라갔다.

죽창을 꼬나쥔 이방인들의 감시 하에 끌려가는 마을 사람 중에는 철수 또래 아이들과 심지어 더 어린 아기들도 있었다. 아기들은 엄마 등에 달라붙어 칭얼댔고, 엄마들은 포대기 밑으로 아기 엉덩이를 두드려 줬다.

철수 일행이 자치기를 하던 곳에서 불과 100m도 안 된 지점에서 이방인들은 멈춰 섰다. 대장으로 보이는 아저씨가 '앞에 창' 하자, 다른 아저씨들이 일제히 죽창을 두 손으로 쥐고 마을 사람들을 꼬나 봤다. "찔러"라는 말과 동시에 십여 개의 창이 앞으로 향했다.

비명이 하천 주위를 맴돌았지만 누구도 이방인들의 살육을 만류하지는 못했다. 밧줄로 뒷결박을 당했기에 도망칠 수도 없었고, 포대기에 아기를 업은 엄마들은 자신이 죽어가면서도 '아기가 상처를 입지는 않았는지' 신경 쓰느라 정신이 없었다. 짧은 순간에 '피의 살육제'는 끝났다.
 
▲ 대전리 학살지도 백수면 대전리 앞 하천에서의 학살지도
ⓒ 네이버지도
 
짧은 순간이었지만 전남 영광군 백수면 대전리 앞 하천변에서의 피해는 컸다. 당시 71세였던 김성녀를 위시해 장순태(42), 장복기(9), 장인기(7)까지 장순태 가족 9명이 죽임을 당했다. 낙동강까지 밀려갔던 국군이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서울을 수복한 뒤 3.8선을 넘은 1950년 10월 1일에 벌어진 일이다.

UN군이 3.8선을 넘고 있었지만 전남 영광은 아직까지 인민군과 지방 좌익이 완장을 차고 있던 시절이었다. 영광면(현재의 영광읍)에 군경이 들어온 것은 1950년 10월 30일이었고, 백수면은 그보다 뒤늦은 시기다.

그러다 보니 1950년 9월 말부터 그해 10월 말까지 지방 좌익에 의한 우익인사 및 가족 학살은 빈번하게 이뤄졌다. 장순태 가족이 학살된 백수면 대전리 하천변에서의 학살은 한 번에 끝나지 않았고, 백수면에 군경이 수복할 때까지 몇 차례 행해졌다.

특히 1950년 10월 30일 영광군 백수면 대전리 하천변에서는 우익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주민 426명이 죽임을 당했다. 대한민국 군경 수복기에 백수면 대전리의 지방 좌익에 의한 피해자 651명 중 65.4%인 426명이 이날 하루에 죽임을 당한 것이다.

그렇다면 장순태 일가 9명은 왜 몰살을 당했을까? 장순태가 마을에서 구장(이장)을 봤고, 부자인데 빨치산에게 협조하지 않았다는 이유였다. 대전리 이웃들은 '피의 살육제'에서 혼자 살아남은 장순태의 아들에게 매일 밥을 줬다.

백수평야

영광군의 서쪽에 위치한 백수면은 바다에 접해 있고, 구수산(해발 339m)이 면의 절반 정도의 면적을 차지한다. 백수면의 마을들은 구수산을 동서남북으로 둘러싸고 있다.

그 가운데 남쪽의 대전리가 면소재지이고, 양성리·죽사리·학산리·지산리·상사리·하사리 등은 영광평야(약 2700정보)의 약 40%(약 1000 정보. 300만 평)에 해당하는 상당히 넓은 '백수평야'를 면하고 있었다.

구수산은 전쟁 발발 전에도 박막동(박석준)이 이끄는 빨치산이 활동하던 곳이며, 9.28 인민군 후퇴 이후 다시 박막동이 이끄는 유격대의 근거지가 된 곳이다.

구수산의 유격대가 군경에 의해 토벌된 것은 1951년 1월 20일과 3월 11일 두 차례의 작전에 의해서였으며, 따라서 구수산을 둘러싸고 있는 백수면은 1951년 3월이 되어서야 비로소 평화를 되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사이에 좌익세력과 유격대는 구수산 주변의 거의 모든 마을에서 평소에 우익성향이었거나 유격대에 비협조적인 사람들을 학살했다(박찬승, <혼돈의 지역사회>, 2023).

백수면 지산리 동봉마을에서도 역사의 비극이 벌어졌다. 마을에서 부유한 편이었던 서영중은 셋째 아들 서기석이 마을 이장이었다. 1950년 10월 9일경 흰 머리띠를 한 사람들이 서영중의 집으로 와 일가족의 손을 뒤로 묶어 봉무산으로 끌고 갔다.

불청객들은 서영중 가족을 죽창으로 찔러 죽이고 구덩이에 몰아넣었다. 서영중이 부자라는 이유였다. 서영중이 빨치산에 비협조적이서 죽임을 당했는지는 확인되지 않지만, 죽임을 당한 이들의 면면을 보면 학살의 성격을 알 수 있다.

봉무산에서 죽임을 당한 서씨 가족은 조말례(62), 서기석(22), 서오목(10), 서성자(6) 등 9명이다. 대전리 장순태 가족의 경우처럼 아동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몰살당한 것이다. 사상과 이념이 다르다며, 빨치산에 협조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처형한 것인데, 실제로는 나이와 상관없이, 이유 불문하고 가족을 몰살시킨 것이다.
 
▲ 봉무산 학살지도 백수면 지산리 동봉마을 서영중 일가가 학살된 봉무산 학살지도
ⓒ 네이버지도
  
빨치산에 비협조(?)

이런 사정으로 인해 지방 좌익에 의한 우익인사 가족 학살은 1950년 9월 말부터 1951년 3월 초까지 광범위하게 이뤄졌다. 여기서 우리가 주의 깊게 살펴봐야 할 것은 당시 학살의 성격이다. 이때의 적대세력에 의한 사건은 다른 시기, 다른 지역에서의 '적대세력에 의한 사건'과 성격이 판이하다는 점이다.

대부분 지역의 경우 인민군이 점령한 초기(1950년 7월)에 인민재판을 통해 우익인사를 처형했다. 이때의 희생자 대부분은 피난 가지 못한 경찰, 형무소 간수, 우익단체 간부, 지주, 부자, 교인 등이다.

인민공화국 초기보다 훨씬 큰 규모의 적대세력에 의한 학살이 전국적으로 벌어진 것은 인민군 후퇴기(군경 수복기)다. 대표적으로는 대전형무소와 진주형무소, 전주형무소 등지에 구금돼 있던 우익인사가 인민군과 지방 좌익에 의해 집단 학살을 당한 것이다. 이때 처형된 이들은 지역에서 내로라하는 우익인사들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전라남도, 그중에서도 영광, 신안, 영암, 완도 등지에서 학살된 이들은 우익인사가 아닌 그들의 가족이었다. 심지어는 우익인사의 가족들도 아닌 빨치산에 비협조적이라는 이유만으로 한 집안이, 한 마을이 전멸된 경우도 숱하다.

그렇기에 이 시기, 전남 지역에서의 '적대세력에 의한 사건'은 고유한 의미의 우익인사 학살이 아닌 지방 좌익 혹은 빨치산과 갈등 관계에 있던 마을주민들에 대한 집단 학살이라고 보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영광군에서 영광면, 백수면과 함께 최대의 피해자가 양산된 염산면의 상황도 이와 다르지 않다.

염산면장
▲ 한규홍 가계도 염산면 번안리 한규홍 일가 피해 가계도
ⓒ 진실화해위원회
 
염산면 번안리 한규홍의 장남 한용석은 6.25 당시 염산면장이었다. 한규홍 일가는 10월 한 달 동안 네 차례에 걸쳐 지방 좌익에 의해 가족 20명이 죽임을 당했다.

광주에서 학교를 다니다가 6.25가 나자 영광으로 온 한윤수(한용석의 아들. 당시 21세) 4형제는 1950년 10월 초 학살됐다. 마을에 곧 국군이 들어온다는 소식을 들은 한윤수 4형제는 마을에서 태극기를 그리려다가 마을주민의 밀고로 지방 좌익에 의해 끌려가 죽임을 당했다. 시신을 찾지 못해 가족들은 이들이 수장됐을 것으로 추측했다 

아들 4명이 죽자 한용석(38)은 피난을 갔다. 하지만 마을에 남아 있던 한용석의 아버지 한규홍(59), 어머니 이함평(63), 아내 유재모(40), 자식 한선수(11), 한OO이 마을 입구 집 마당으로 끌려갔다. 거기에는 한씨 일가친척과 마을주민 수십 명이 새끼줄에 묶여 있었다.

이날 한규홍 등 한씨 집안 14명은 염산면 번안리 안수마을 뒷산 구덩이에서 죽창에 찔려 죽임을 당했다. 1950년 10월 23일이었다. 한순자와 그의 남동생 한OO(4)은 어머니 유재모의 부탁을 받은 집주인의 도움으로 살 수 있었다.

한씨 가족 14명이 끌려갈 때 도망친 한선수는 다음날인 1950년 10월 24일 오전 집으로 찾아온 좌익 3명에게 다시 잡혀갔다. 그는 어디에서 죽었는지조차 확인되지 않아 시신도 수습할 수 없었다. 한선수가 잡혀간 지 한두 시간 후 좌익들이 다시 와 그의 동생 한순자와 한OO을 잡아가려 했으나, 한순자(9)가 소리를 지르고 저항하자 풀어줬다.

피난을 갔던 한용석은 가족들이 모두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다음 날인 1950년 10월 25일 마을로 돌아왔다가 좌익에게 잡혀 S씨 사랑방에서 문초를 당했다. 한용석이 살아남은 순자와 한OO을 보고 싶다고 해 기가 막힌 상봉을 했는데, 한용석이 순자의 귀를 잡고 하염없이 울기만 했다. 그날 저녁 한용석은 마을 방죽에서 수장됐다.

청주한씨(淸州韓氏) 집성촌이던 염산면 번안리 안수마을에서 한씨 집안 사람이 총 70여 명이 학살됐는데, 그중 한규홍 일가에서만 20명이 죽임을 당했다(진실화해위원회, <전남 영광 적대세력에 의한 희생사건(2)>, 2023).

아무리 한용석이 면장이었다고 해도, 그의 아들들이 타지에서 유학을 하고, 심지어 '대한민국 만세'를 불렀다손 치더라도 한 가족 20명을 몰살하는 것에 어떤 명분이 있을 것인가? 더군다나 노인과 여성, 아이들이 이념과 어떤 상관이 있는가? 그저 멸족을 위한 핑계일 뿐이다.

역 피해의식

백수면 대전리 하천변에서 죽임을 당한 장순태 일가 중에 유일하게 살아남은 장O준은 살아남은 것이 괴로워 정상적인 삶을 살지 못했다. 어른이 돼서도 술로 세월을 보내고 세상과 불화했다. 그는 끝내 전쟁의 트라우마를 극복하지 못하고 1973년도에 40대 초반의 나이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12세에 아버지를 잃은 장양희(장O준의 딸)는 얼굴 한 번 못 본 할아버지 장순태를 포함한 가족 9명의 명예 회복을 이뤘다. 진실화해위원회로부터 2024년 4월 <진실규명 결정문>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결정문을 받아든 지금은 너무나도 허망하다. 적대세력에 의한 사건의 경우 국가를 상대로 어떤 배·보상 소송도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국가 존재의 이유는 국민의 생명을 보호하는 것이다. 아무리 전쟁 중이라 하더라도 이념과 사상의 차이로 집단 학살을 당했다면 그 책임은 국가가 져야 할 것이다.
그런데 군경에 의해 희생된 이들만 배·보상 되고 적대세력에 의해 희생된 사건은 '나 몰라라' 한다면, 국가의 존재 이유에 대해 의구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장양희의 역 피해의식이 근거가 없는 것이라고 누가 말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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