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살에 시작한 인생 2막 "꿈 꾸면 최소 1/10은 이뤄집니다"

이민선 2024. 7. 19. 1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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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막보다 화려한 2막] 난치병아동돕기운동본부 '희망세움터' 문경식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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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선 기자]

 (사)난치병아동돕기운동본부 ‘희망세움터’ 대표 문경식(61).
ⓒ 문경식
  
(사)난치병아동돕기운동본부 '희망세움터(아래 희망세움터)' 대표 문경식(61). 그의 인생 2막은 서른여덟 이른 나이에 시작됐다.

건설회사, 병원 원무과 같은 직장이 지갑은 채워 줬지만, 그의 마음을 채우지는 못했다. 허전한 마음을 채우기 위해 그가 선택한 일은 '사회복지'이다.

"대학 마치고 10여 년, 평범한 직장이 이었죠. 병원 원무과장도 해봤습니다만 적응하는 게 쉽지는 않았어요. 학생운동 이후, 사회 변혁을 위해서 무엇인가 공헌하면서 살아야겠다 마음 먹었지만, 먹고 사는 문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직장에 들어갔는데 삶이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자꾸 들고, 그렇다고 돈을 아주 많이 버는 것도 아니고...계속 허전한 거죠."

대학 시절 그는 교지 편집장으로 활동하다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감옥까지 간 운동권 학생이었다. 졸업한 뒤 대학 1년 선배 고 이철규 열사 추모사업회 일을 1년여 하면서 특히 '내가 이렇게 살아도 되나'라는 생각이 컸다고 한다.

고 이철규 열사는 조선대학교 교지 편집장으로 활동하다 1989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수배 받고 도피 생활 중 의문의 변사체로 발견됐다. 문 대표는 이철규 열사에 이어 교지 편집장을 맡았다. 그 역시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학교를 졸업한 해인 1990년에 광주교도소에서 4개월여 간 옥고를 치렀다.

문 대표를 지난 11일 안양 호계동에 있는 희망세움터 사무실에서 만났다. 지인들이 지어준 그의 별명은 '작은 거인'이지만, 그는 자신을 '완소남'이라 소개한다. 완전 작은(小) 남자(男)라는 의미의 '완소남'이다. 한때 인터넷상에서 유행하던 신조어인 '매력적인 완전 소중한 남자'의 줄임말인 '완소남'을 패러디(parody)한 것이다.

이유를 물으니 "사람들이 웃어 줘서"라는 답변과 함께 '풋'하는 웃음소리가 돌아온다. 하지만 뒤이어 나온 이야기에서는 그늘이 느껴졌다. 자신을 '완소남'이라 스스로 소개하기까지 열등감을 극복하기 위한 치열한 내적 몸부림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제 키가 158cm 정도니, 정말 작은 편이죠. 중·고등학교 때는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았어요. 버스에서 내려야 하는데, 여학생들이 있으면 내리지 못하고 종점까지 갔다가 다시 뛰어오는 일이 허다했지요. 일어서면 키가 들통나니까요. 대학 가서는 나폴레옹, 강감찬, 등소평 같은 키 작은 역사적 인물 조사해서는 '영웅은 키가 작다'고 떠들고 다니고, 하하."

안정된 직장 그만두고 흔들리는 마음 다잡은 방법
   
 (사)난치병아동돕기운동본부 ‘희망세움터’ 대표 문경식(61)
ⓒ 이민선
 
자칭 완소남 문경식이 최초로 한 사회사업은 희망세움터 뿌리(전신)인 안양 한무리교회 공부방 자원봉사 교사. 먹고 사는 일만 열심히 해서는 안 되겠다는 마음에 스스로 선택한 일이었다. 초중고생들에게 국어와 영어를 가르쳤는데, 이것의 그의 화려한(?) 인생 2막의 출발점이다.

그 뒤 체질에 맞지 않다고 느끼던 '안정된 직장'을 그만두고 공장을 다니면서 퇴근 후에 밤 10시까지 학생들 가르치는 삶을 이어갔다. 그러다가 자원봉사 하던 한무리 나눔의 집 사무국장을 맡으면서 사회복지 길로 깊숙이 들어왔다.

허전만 마음은 어느 정도 채워졌지만 가벼워진 지갑이 문제였다. 웬만해서는 속을 드러내지 않는 무던한 아내. '돈 벌어오라'고 눈치 주는 일은 없었지만, 그래도 가장으로서 눈치가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직장 일에 바쁜 아내를 위해 설거지, 빨래 같은 가사 노동을 성심껏 했지만, 그래도 미안한 마음을 말끔히 떨칠 수는 없었다.

직장을 그만둔 이후에도 연봉 5000만 원이 훌쩍 넘는 '좋은 자리 제안'이 계속돼 내적 갈등이 심했다. 5000만 원은, 그가 인생 2막을 시작하던 약 25년 전 기준으로는 꽤 높은 연봉이다. 한 달 75만 원 정도 하던 한무리 나눔의집 사무국장 월급과는 비교할 수 없는 큰돈이었다. 

자꾸만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기 위해 그가 선택한 방법은 '선언'이다.

"나도 자꾸 흔들려서 주변 사람들한테 '난 사회복지에 목숨을 걸겠다'라고 선언해 버렸어요. 내 마음을 다잡기 위해서 그런 거죠. 그런데도, 당시 주변 사람들은 특히 난치병 아이를 둔 부모들은 제가 '한 1~2년 하고 말겠지' 추측했다고... 난치병 아이를 둔 부모도 아닌데, 과연 오래 할 수 있을까, 생각한 거죠. 지금까지 이 일 하는 것 보고 놀라는 분들이 많아요."

그는 자기 자신, 그리고 선언이라는 방법으로 뭇사람들과 한 약속을 철저히 지켰다. 한무리 나눔의 집을 모체로 한 (사)난치병운동본부를 지난 2002년 시민운동가들과 함께 창립을 주도했고, 2010년에는 장애통합지원센터 희망세움터를 열어 난치병으로 고통받는 아이들의 든든함 보금자리로 자리 잡게 했다. 사업을 넓혀 지금은 두리망 장애인 주간 보호센터까지 운영하고 있다.

두리망은 지난 2022년 문을 열었다. 일상생활이 어려운 장애인을 낮 동안 보호해, 가족의 부담을 덜어주며 경제 활동을 유지하도록 돕고 있다. 장애인 자립을 위한 직업 교육 훈련과 성교육 인권 교육, 보호자 상담, 재활 서비스 등 청소년기를 지나 성인이 된 장애인에 대한 모든 서비스를 제공한다. 생일을 비롯한 각종 기념일도 챙겨 준다. 장애인을 온전한 사회 구성원으로 자리 잡게 하는 게 궁극의 목표다.
 
장애아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댄스'

 
 (사)난치병아동돕기운동본부 ‘희망세움터’ 가을 나들이.
ⓒ 희망세움터
 
 
 (사)난치병아동돕기운동본부 ‘희망세움터’ 아이들 음악 수업.
ⓒ 희망세움터
  
이에 앞서 문을 연 희망세움터에서는 희귀난치성 질환을 앓는 아동 18명, 기타 여러 가지 장애가 있는 아동 61명을 포함해 총 86명을 돌보고 있다.

희귀난치성 질환이란 근육이 점차 퇴화하는 근육이영양증처럼 매우 드물게 발병해 이해하기도, 치료도 어려운 질병을 말한다. 우리나라에는 약 2000여 종의 질환과 80만 명의 희귀·난치성질환 환자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희망세움터에서 돌보는 아이들을 괴롭히는 질병은 이 중 근육병(근육이영양증 등), 다운증후군, 백혈병, 뇌병변 등 10여 종이다. 희귀난치병은 아니지만 자폐, 지적장애 등이 있는 난치성 장애 아동도 61명이나 되는데, 모두 완치가 어려운 질병이라 대부분 평생 돌봄이 필요하다.

희망세움터에서는 이 아이들에게 공연 관람, 행사 체험 같은 문화교육과 제과제빵·바리스타 교육 같은 직업 교육을 제공한다. 봄, 가을에는 나들이도 떠난다. 이 밖에 방송 댄스, 체육, 국어독해, 창의 수학, 미술 교실 등의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가장 인기 있는 프로그램은 댄스라고 한다.

"체육은, 미니 볼링처럼 움직임이 크지 않은 것을 하고 있고요. 댄스도 하는데 이게 가장 인기가 좋아요. 직업 교육은 커피 바리스타 교육이 활발한데, 이게 장애 쪽 직업으로는 최고로 자리 잡고 있지요. 제과·제빵도 뜨고 있어요.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또 다른 많은 직업을 연구·개발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안양, 군포, 과천시 등에 있는 희귀난치성질환 아동 실태를 파악해 치료비를 지원하는 사업이다. 지난 2002년 난치병아동돕기운동본부를 창립한 이래 쭉 이어오고 있는 사업이다. 2002년 첫해 모금을 통해 16명에게 치료비를 지원했고, 그 뒤 매년 2천만 원에서 5천만 원 정도를 지원하고 있다. 지원 누계는 12억 원 정도다.

일이 좋아 20여 년 여름 휴가도 가지 않고
 
 (사)난치병아동돕기운동본부 ‘희망세움터’ 사랑의 산타 행사.
ⓒ 희망세움터
  
빛과 그림자는 공존하는 법. 열심히만 하면 잘 될 줄 알았던 복지 사업에도 어려움이 찾아왔다. 희망세움터 보금자리를 만들 때였다.

"큰 건물이다 보니 이곳 집주인이 44명이나 되는데 규정상 90% 이상 동의를 받아야 입주할 수 있는 상황이었어요. 그런데 난치성질환이라고 하니까 무슨 전염병인 줄 알고 동의를 해 주지 않아서 무척 애를 먹었습니다. 한 달 정도를 쫓아다니며 '전염병이 아니라 그저 고치기 어려운 병'이라 설명하고 설득하니, 다행히 한둘 빼고는 동의를 해서... 정말 어려웠죠."

이렇듯 어려움은 있었지만 그는 이것을 감내하기 어려운 시련이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저 과정일 뿐이라 담담하게 말하며, 이보다는 기쁠 때가 훨씬 많았고, 그래서 20여 년 동안 남들 다 가는 여름 휴가 한 번 가지 않았다고 말했다. "근데, 대표가 휴가 안 가는 게 직원들한테는 어떨지 모르겠네"라고 되물으려 '풋' 웃음을 터뜨렸다.

그에게는 아주 큰 꿈이 있다. 희망세움터 같은 장애인 돌봄 시설을 마을(각 동)마다 설립하는 꿈이다. '될까요?'라고 물으니 꿈에 대한 그의 '초긍정 철학'이 흘러나왔다.

"꿈이란 게, 좀 허황된 것 같은 꿈이라도 꾸기만 하면 최소한 10분의 1은 이루어집니다. 난치병아동본부 창립과 희망세움터·주간보호센터 설립, 생각해보면 이 모든 게 꿈을 꾸면서 시작된 일입니다. 필요할 때마다 꿈을 꾸며 갈망했고 그러면서 하나, 둘 완성된 거죠."

그가 하는 일은 사회복지뿐만이 아니다. 경기중부민주화운동 계승사업회, 6.15공동선언실천경기중부본부, 안양시민사회단체 네트워크 등 시민사회 단체 일에 적극적으로 관여한다. 그의 닉네임(별명) 중 하나가 '작은 거인'인 이유다. "일이 너무 많은 게 아니냐?'고 묻자 그는 "바쁘긴 하지만, 이 또한 학창 시절 꿈꾼 사회 변혁 운동"이라고 답했다. 이어서 나온 말은 시민운동에 미래에 대한 그의 견해였다.

"나눔과 연대가 중요합니다. 비슷한 가치관, 엇비슷한 일을 하는 사람(기관)들이 서로 돕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에 여러 가지 일에 관여를 합니다. 그래서 우레 센터는 나눌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나눕니다. 승합차도 하루 2만 원 정도 받고 다른 단체에 빌려줍니다. 또 누군가 비영리 단체를 만든다고 하면 개인 정보를 제외한 모든 정보를 제공합니다. 이 계통에서는 영업 기밀에 포함되는 모금 노하우 까지. 이로 인해 우리 후원인이 그쪽으로 가는 불이익도 당하지만, 그래도 저는 아낌 없이 퍼 줍니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고요."

상근, 비상근 포함 50여 명이 넘는 센터를 책임지는 자리에 있지만 그가 하는 일은 예나 지금이나 별반 차이가 없다. 일반 직원이 하는 일과 비슷하다. 인터뷰를 마칠 즈음 그는 '체력이 자꾸 떨어지는지 아이들을 집에 바래다주는 송영이 힘들어진다'고 말했다. 그의 나이 61세이니 올해가 환갑이다. 그러면서 그는 휴대폰을 챙겨 들었다. 송영할 시간인가 보다. 그에게 '힘내요'라고 외치고 싶었다.
 
 (사)난치병아동돕기운동본부 ‘희망세움터’ 아이들 케이크 만들기.
ⓒ 희망세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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